나다움의 실존

"삶은 내 자신을 만나러 온 것"

by 깨닫는마음씨




거듭 말할 수 있지만, 실존주의는 자신답게, 나답게 사는 일을 뜻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이처럼 저마다 다 자신다운 그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의 표현이 곧 실존이다.


그러나 또 거듭 말할 수 있지만, 그래서 실존주의는 자주 오해되고 굴절된다. 실존주의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이 자신답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쉬이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 착각의 소재는 단연코 정체성이다. 특히 오늘날 인문학의 어떤 전형성을 구성할 정도로 지배적인 동향이었던 정치철학적 지향을 갖는 이들일수록 나다움이라는 표현에서의 그 '나'라는 것을 정체성으로 간주하게 되는 일은 필연적이다. 정치라는 것은 정체성에 근거해 성립되는 것이며, 나아가 가장 고도로 발달한 정체성의 게임이라서다.


나를 만드는 역사, 나를 만드는 언어, 나를 만드는 가족관계, 나를 만드는 사회제도, 나를 만드는 경제수준, 나를 만드는 계급구조, 나를 만드는 시민의식, 이 말들처럼 정말로 나라는 것이 이러한 것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모인 어떤 총화의 개성에 '나'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전부 다 정체성에 대한 의미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이해해야 할 것은, 정체성과 나다움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구성적 개성을 지키는 일과 나답게 산다는 의미는 단 1%의 연결점도 없다.


'나'라는 것은 우리에게 존재성이 실감될 때 그것이 나로서 체험될 수밖에 없기에, 그 존재성에 그저 그렇게 붙이게 된 이름일 뿐이지, 소설 속 등장인물의 개성을 부여하듯이 작동하는 언어로 구성된 정체성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다. 적어도 실존주의적 관점에서는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고 '나'라는 것이 어떤 우주에 만유한 브라흐만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것은 실존주의의 나다움이 그 반대편에서 또 한 번 오해되는 방식이다. '나'라는 것이 정체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는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채택하고 있는 이 힌두교적 인식틀 속에서 종종 동의를 이루곤 한다. 여기에서의 나라는 것은 어떤 형이상학적 주체다. 모든 것을 주시하며, 모든 것을 그 품에 담고 있는 어떤 우주적 원리다.


이는 실존주의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신분석적인 어떤 그림이다. 다양한 정체성의 아이들이 우주놀이터에서 자유롭고 안전하게 뛰어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위대한 신격의 모성 같은 것을 떠올리면 그것이 이 그림이다. 현대정신분석은 이를 '담아주는 자(container)'와 '담기는 것(contained)'이라는 용어로 묘사한다.


이러한 입장에서도 분명 '나'는 정체성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정체성은 '담기는 것'이며, '나'는 '담아주는 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담아주는 자 중의 담아주는 자>다. 그러니 가장 정체성이 아닌 것이라고 말하게 되겠지만, 그 의미는 실존주의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모든 것을 담아주는 자로서의 '나'의 실재가 바로 불교에서 의미하는 공(空)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공이라는 모종의 궁극적 개념을 어떻게든 모성과 연결짓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이들일 수 있다. 차라리 정직한 정신분석가라면 이러한 이가 여전히 엄마와 어떤 유착관계 속에 놓여있는지를 탐색하려고 할 것이다.


불교가 힌두교화되는 아주 많은 이유가, 연기, 공, 무아, 이런 개념들에 자꾸만 모성적 색채를 입히려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조금 놀라게 한다. 심리적으로 아직 탯줄을 끊지 못한 이들이, 계속해서 정신적 자궁을 필요로 하는 그 모습을 우리는 유추해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신격의 모성을 구성하기 위한 형이상학은 출현하며, 그에 따라 '나'라는 이름 또한 어떤 거대한 형이상학적 주체를 뜻하는 것처럼 굴절되어 간다.


이를 불교적 이해로 묘사해보자면, 사변으로 흐르게 된 추상적 불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작동하는 정체성에의 추구다. 쉽게 말해, 붓다라고 하는 정체성을 저 멀리에 놓아두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다만 노력하고 있는 그림을 만들면, 이것은 정체성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꽤 많은 부분을 붓다라는 정체성과 실은 동일시하고 있는 이들에게서 이러한 경향성은 잘 목격된다. 아트만이 브라흐만을 향해 가까워지는 합일의 구도를 이들은 불교적 용어들을 차용해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것이 하도 답답하고 지겨워, 선불교에서는 아예 이렇게 선언하기까지 했다.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이다.


붓다라는 모종의 위대한 정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 그러한 정체성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다움이 곧 붓다다움이자 깨달음인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 것이다.


이로써 후대의 학자들은 실존주의와 선불교를 흡사 배다른 쌍둥이처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서로 그 어떤 연결점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스스로 펼쳐진 그 뜻과 방향성이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사실에 또한 즐거워했다.


실존주의가 '실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또 선불교가 '자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결국에는 우리가 '나다움'이라고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제 한층 더 분명해진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다.


정체성이 아니라 마음을 살면, 그것이 실존하는 것이고, 자성이 드러난 것이며, 곧 나다운 것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가 우리를 깜짝 놀래키며 위협하는 것만 같은 장면이 있다. 그럴 때, 소싯적에 학생운동도 하고, 늘 약한 자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을 어머니의 교육방침으로부터 잘 학습했으며, 친구들에게서도 정의감이 남다르다는 칭찬을 자주 받아온 우리는, 바로 그렇게 구성된 우리의 정체성은, 정체성 자신을 지속하기 위해 현 상황에 용기있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려 할 것이다. 발화해야 할 대사도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조합이 되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빠르게 계산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체성을 지속하려는 그 언행이 어떤 결과를 낳든, 우리는 여하간에 피곤하다. 갈수록 이 정체성의 일에 소진되며, 결국에는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지는 무기력에까지 빠져든다. 이것은 왜 그런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마음과 일치해서 살아나지 않고, 자꾸만 마음을 무시하며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만성적으로 그러고 있다면, 우리가 끝내 살기 싫어지는 일은 당연하다. 우리가 직접 우리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있는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가장 자유롭지 못한 감옥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일과 같다.


그런데 해당의 장면에서 우리가 경험한 실제의 마음은 무엇인가? 아주 단순하게 놀람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 했던 것이다. "엄마, 깜짝이야!" 이 반응은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친다. 조금 있으면 웃음도 난다.


우리는 지금 '어떤 경우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늘 주위를 통제할 수 있는 의연한 정체성'을 산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마음'을 산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우리를 가장 우리 자신답게 만들어준다. 허약하고 주변상황에 휘둘리는 자로서가 아니라, 깜짝 놀라는 그 모습으로도 가장 든든하게 존재하고 있는 면모로 우리 자신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다움'이다.


마음에 의해 알려지고 표현되는 그 어떤 존재방식으로도 우리가 가장 힘차고 생기있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있으며, 그 사실이 우리 자신으로 드러나 증거되는 그 모습을 우리는 '나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곧, 나다움은 정체성의 연극이 아니라 존재성의 리얼리티(현실이자 실재)다. 우리는 이처럼 자연스럽게 현재 드러나는 마음을 살수록 스스로를 더욱 나로 실감하게 되며, 그 나라는 것을 아주 신뢰있게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나라는 사실이 가장 듬직하고, 믿을 수 있으며, 안심이 된다. 흡사 아주 견고한 지반에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려간 나무처럼.


그리고 마음을 따라 드러나는 나의 모습을 만나감에 따라 나라는 것은 또한 아주 큰 감동의 원천이 된다. 그럼으로써 계속해서 나라는 것이 궁금해지고, 관심이 가며, 호기심이 생긴다.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순수한 아이들만의 특권으로 여겼던 이 상태는 바로 나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 이의 상태였으며, 이제 우리에게 순순히 다시 돌아온 것이다. 사는 일이 마냥 좋고, 삶을 그리워할 줄 아는, 흡사 연인을 떠올리며 설레는 듯한 이 최고의 상태가.


"삶이라는 것은 내 자신을 만나러 온 것."


우리가 어디선가 이런 시구를 접해본 적이 있다면, 이것이 그 의미였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하루 마음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마음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마음을 알아가게 된다. 어찌보면 삶이란 마음을 알아가는 이 일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을 직접 만나야만 알 수 있다. 지식과 정보로는 알 수 없다.


마음을 직접 만나는 일을 우리는 체험이라고 하며, 삶은 통째로 이 마음의 체험이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이 하는 일은 결국 우리 자신의 어떠한 면모를 개방해주는 일이다. 우리는 마음을 통해 지금껏 몰랐던 우리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마음을 체험한다는 것은, 곧 마음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만난다는 것이다.


마음이 만나져서 그것이 자신임을 안다. 자신을 만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이미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이처럼 내 자신을 만나서 내 자신으로 살려고 온 것. 마음이 계속 나로 펼쳐져서, 더욱 나를 알려가고, 그러한 나에게 끝없이 반할 수 있는 것. 그럼으로써 기쁘고도 기쁘게 더욱 나로 존재하게 되는 이것이 바로 '나다움의 실존'이다. 불성이 자성인 것이고, 존재가 나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필연적으로 "나는 마음으로 존재한다."라는 표현이 "나는 나답게 존재한다."와 동일한 의미로 드러나게 된 이 순간, 우리는 어떤 마음이든 그 마음으로 살 자유와, 고로 내가 무엇으로든 또 나로 살 자유를 동시에 얻는다. 그렇다면 이것이 다시 한 번 '나다움의 실존'이라는 그 의미로 우리에게 반갑게 만나진다. 이 존재의 자유가 마침내는 우리가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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