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 수 있는 용기"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역설적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다.'와 '하루하루 죽어가다.'라는 문장들처럼, 서로 반대되는 속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언어들은 실은 동일한 하나의 현상을 의미한다.
우리가 언어에 갇히지 않고, 또 언어에 속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상대적 언어들이 실은 어떤 동일한 현상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직관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을 살아간다는 것이며, 곧 실존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묘사하는 역설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역설은 역시 삶과 죽음의 역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언어들은 우리에게 실존적 감수성을 일깨우기에는 그리 효과적인 언어들이 아니다. 왠지 모르게 추상적으로 경험되며, 나아가 그 언어의 착시효과에 의해 야기된 오해와 착각의 감정이 오히려 탐구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언어들은 '모험'과 '쉼'이라고 변환되어 쓰이는 편이 훨씬 더 유용하다. 그리고 오히려 그 의미가 더욱 존재의 사실에 근접한다.
현대인들이 쉬지 않으려는 특성을 보인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능력주의의 신화 때문이니, 미디어가 낳은 자아상의 과잉된 추구 때문이니, 유효한 여러 분석들은 많지만, 이를 모험의 감각과 연결지어 이해하는 일은 또 새로운 이해일 수 있다.
현대인들이 모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도파민이라는 보상이 뒤따른다. 쉼이 봉쇄되는 것은 그 보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보상에 쫓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준은 언제나 남들이다. 여기에서의 남들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타자가 아니다. 추상적인 어떤 이미지다. 쉽게 말해, 자신 빼고는 다 즐겁고 충만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런 이미지가, 자신이 성취해야만 하는 당위적인 기준이 되어 사람들을 뒤쫓는다.
오늘날 불면의 밤이 그리도 많아진 이유다. 몸은 피곤한데도 쉬이 잠들지를 못하는 것은 잠들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어서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잠의 시간은 그저 속절없이 버리는 시간이다. 쉼에도 효용이 있어야 한다. 쉬면서도 뭔가를 배우거나 익히거나, 최소 새로운 모종의 정보들을 감각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람직한 쉼의 양상이라고 가정된다. 그러니 다들 유튜브를 보면서 자신이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쉼에 대한 거부, 이것은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강박이다.
모험이라는 말이 흡사 이러한 지속적 각성상태를 묘사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 우리는 모험의 의미에 대해 회의해보게 된다. 그것이 정말로 모험이 맞는지를.
모험과 쉼, 또 다른 표현으로는 잠과 깨어남이라고 말하고 있는 지금의 이 맥락에서,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종교현상을 논의의 장으로 함께 끌어오면 이득이 크다. 깨달음에 관해 말하는 방식이 곧 존재의 사실에 관해 말하는 일과 정확하게 상통하는 까닭일 것이다.
혹자들은 자각으로 깨어있는 의식상태가 늘 지속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하곤 한다. 일시적인 상태를 항구적인 구조로 만드는 것이 결국 수행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는 어떤 마음작용이 일어나도 개인이 바로 이를 자각함으로써 그 작용이 사라지는 까닭에, 그러한 개인은 늘 불편하게 흔들리지 않고 쾌적한 평정심으로 살 수 있게 된다고 묘사된다.
그래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은 무슨 일을 하는가?
도무지 잠들려 하지 않는다. 마치 거리에서 살아가는 길고양이처럼 한시라도 방심하면 안된다는 듯이, 어떻게든 항시적으로 무엇인가를 알아차리려 한다. 더 정확하게는, 무엇인가를 알아차리고 있다는 자신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려 한다.
어떠한 수행자들이 늘 피곤해보이고, 본인은 화가 안났다고 하지만 이미 그 얼굴의 근육이 화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 것이다. 쉽게 말해, 잠을 못자서 생긴 수면장애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우리가 생리적으로 잠들었다가 깨어나고 또 잠드는 일을 교차하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의식 또한 마찬가지다. 의식도 자다 깨다 하는 일이 자연스럽다.
심지어 종교적 전통이나 영적 지향에 있는 이들이 어떤 높은 차원인 것처럼 인식하곤 하는 공(空)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될 때는 거기에 의식이 없기까지 하다. 가장 잠든 상태처럼. 그러니 실은 체험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체험 이후에야 다시 의식이 돌아오면서, 마치 완전한 죽음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 이 모든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처럼 경험하게 될 뿐이다. 체험 후에 모든 것이 다 붓다로 보인다거나 하는 것은, 지금 그렇게 새로운 존재의 눈으로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알아볼 수 있게 된 까닭이다.
이것은 흡사 아주 온전한 쉼을 누리고 난 뒤 우리가 다시 모험의 세계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 모든 사물과 풍경이 쉬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온전한 그 색채와 향기로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되는 현실과도 같다.
요는 무슨 말일까?
깨달음도 쉼의 감각이라는 것이다. 온전한 잠이 온전한 깨어남을 만들고, 온전한 쉼이 온전한 모험을 만든다는 것이다.
잠이 없는 깨어남이란 수면장애에 불과하며, 쉼이 없는 모험이란 고행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그저 자면 안된다는, 쉬면 안된다는, 나아가서는 죽음이 있으면 안된다는, 그렇기에 계속 깨어있어야만 하고, 계속 모험해야만 하며, 계속 삶만 있어야 한다는 망상이 낳은 강박일 뿐이다.
물론 계속 깨어있고, 계속 모험하며, 계속 삶만 있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생리의 문제다. 인간의 몸은 그것을 할 수 없다. 할 수 없는 것을 계속 가능하다고 고집하는 것이 망상이다. 그러면 몸이 피로해지고 망가지며, 정서적 차원에서도 화와 만성적인 우울에 끊임없이 시달리게 된다.
강박은 자유를 잃은 상태이며,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이처럼 인간은 병들게 된다.
자유는 존재의 본래적 특성이기에, 자유를 잃었다는 것은 곧 인간이 존재를 지금 상실해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재를 잃으면 스스로의 근거가 사라진다. 그것은 뿌리없는 식물의 생태와 같으며, 결국에는 살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역설적인 상황인가. 인간이 잠-쉼-죽음을 소외해버리면 오히려 인간은 가장 빨리 죽음에 이르게 된다. 반대로 잠-쉼-죽음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실로 드러날 때, 인간은 더욱 깨어있게 되고, 더욱 모험할 수 있게 되며, 결정적으로 더욱 살게 된다. 살아있는 것으로서 생생하게 그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왜 그럴 수 있는지는 분명하다.
인간은 할 수 없는 것을 존재가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재를 잃었을 때, 즉 자기가 깨어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때를 관찰해보면 거기에는 늘 이러한 생각들이 있다. 자신이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자신이 주체성있게 다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자신이 아니면 이 모든 것은 다 엉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늘 깨어있는 각성의 상태로 모든 일을 자신이 다 처리하고자 하는 이 정보처리기계에 '나'라는 이름을 붙이곤 한다.
그러나 이것의 잘 알려진 이름은 바로 자아다. 자아의 형식이 바로 정체성이며, 이 자아정체성이 도저히 잠들 수 없는 것의 실체다.
수행론적인 입장에서도 무엇인가를 의식적으로 알아차린다고 하는 그 주체 역시 자아다. 자기는 메타인지적인 입장으로 빠져 그 모든 것을 다 알아보는 주시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고 해서 자아가 아닌 것이 아니라, 그 주시자적 속성이 원래 자아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더 쉽게는, 일단 무엇이든 자기가 다 주체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가장 강렬한 의지와 목소리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자아다.
실존주의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자아정체성에, 그것이 아무리 고급언어로 포장된 자아정체성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나'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정체성이 아니라 존재의 이름이다. 그러니 차라리 실존주의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내가 늘 깨어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다 맡기고 잠들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쉼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존재를 회복할 기회다. 쉼으로써 존재는 우리에게로 돌입해와 '나'의 자리에 서게 된다. 그러한 '나'에게 다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흡사 기독교적 비유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 수도승은 이렇게 노래했다.
"당신이 힘들고 절망스러울 때, 그냥 그 자리에 쓰러지세요. 그러면 당신이 쓰러진 그 자리에 주님께서 오셔서 당신 대신 싸워주실 것입니다."
수피시인 루미는 유사하게 이러한 얘기를 들려준다.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 이는, 자아가 아닌 그 자리에 온전히 하나님만이 계시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존재한다."라고 우리가 정확하게 발화할 수 있다면, 그때 그 존재의 사실이라는 것은 이러한 위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아가 아니라 존재가 한다."라는 말을 채택한다.
존재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하이데거는 또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존재는 인간을 모험한다."
인간이 존재를 묻고 존재에로 향하고자 할 때, 존재도 인간을 향하며 인간에게로 들이닥친다. 그것은 존재의 모험이다. 존재가 인간을 모험하는 것. 다시 한 번 기독교적 비유로, 하나님이 인간을 모험하고자 해서 펼쳐진 것이 예수라는 사건이다. 예수는 '나'의 본이다. 존재가 인간을 통해 '나'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펼쳐내갔는지의 그 본이다.
비단 예수뿐일까. 우리가 종교적 선각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하나같이 다 이 '나'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나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그 '나의 모험'을. 그들의 성격적 개성이 그 일을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자아정체성이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 나의 존재로 이제 내가 다 떠맡아 존재의 일을 해야지."라고 했던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한 것은 그저 맡긴 것뿐이다. 존재에게. 그러니 무엇인가를 실은 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쉼 속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자 존재의 모험이 펼쳐졌다. 전술한 것처럼, 쉼과 모험은 동시적인 것이었던 셈이다.
매우 전형적인 표현으로, 자아가 쉬어야 존재가 모험한다고 묘사하면 우리가 이러한 근본적 상황들을 이해해보는 일에 훨씬 더 도움이 될까?
그렇다면 그것은 이제 이렇게 형상화될 것이다.
우리의 모험은 결국 쉼을 향한, 조금 두렵고 어렵지만 그래도 한번 쉬어보고자 하는 그 '쉼의 모험'일 것이라고.
이는 정말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험이다. 쉬면 안된다고 믿어지는 속에서, 자신이 쉬면 다 잘못될 것 같은 두려움의 생각들에 지배받는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쉼을 향하고자 하는 그것은 분명 용기다. 모험가가 용사로 드러나는 순간이란 이러한 순간일 것이다.
용사가 용기를 통해 하는 일이란 인간의 해방이다. 자유의 회복이 분명한 그의 임무다. 그러면 안된다고 하는 강박의 현실에 대해, 인간이 쉴 수 있고, 잠들 수 있는, 아주 작은 현실이라도 출현시키게 된다면 용사의 승리다. 그럼으로써 용사가 얻는 최고의 보상물이란 곧 존재다.
아니, 이미 그렇게 존재를 향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은 용사 자신이 이미 존재에 포섭되어 있다. 틸리히는 이를 '존재에의 용기'라는 표현으로 잘 묘사한다. 용기를 낸 순간 이미 존재와 함께다. 용기가 우리를 든든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 실증인 것이다.
우리가 쉼으로써 실은 가장 위대한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또 가장 위대한 모험의 결과를 성취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 말은 얼마나 우리에게 용기를 자극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이제 '잠들 수 있는 용기'라고 불릴 것이다. 수면장애 속에서 늘 걱정과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 아닌, 정말로 우리가 마음 편히 안심하며 다만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그 현실을 어떻게든 묘사하고 있던 것이 실존주의다. 실존주의는 이러한 '쉼의 모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