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우라고 운명지어진 존재의 현실을 향해"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아 틸리히와 불트만은 각기 과거의 신화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틸리히는 기독교신학의 고전적인 용어들을 문자주의적으로 소비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다시금 상징의 차원으로 되돌림으로써 의미를 개방해야 한다는 상징의 방법론을 말했고, 불트만은 유사한 맥락으로 과거의 표현들은 오늘날의 실존에 따라 새로이 해석되어야 한다는 탈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하게 과거의 주술적 믿음에 근거한 비합리적 개념들을,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 개념들로 바꾸자는 얘기가 아니었다. 주술의 비합리성을 이성의 합리성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이 발상은 여전히 주술이다. 이는 우리에게 매우 빈번히 착각되고 그만큼 어렵게 경험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는 실은 대단히 명백하다. 비합리적인 언어에서 합리적인 언어로 바꾼다고 해도 그것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곧 주술의 소재이고, 언어를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고 하는 것이 바로 주술의 작동원리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말할 것도 없이, 틸리히와 불트만은 다 실존을 강조한 것이다. 언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이 모든 것의 핵심으로 자각하도록 안내하는 일로써 그들의 기획은 시도되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탈신화화는 인간의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고.
신화는 표현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다. 거기에서 벗어난다(脫)는 것은 신들의 세력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신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식의 얘기가 아니다. 그렇게 잘못 이해함으로써 만들어진 사유들이, 결단이니, 주체적 선택이니, 역사적 책임이니 등의 이름으로 인간의 어깨에 더 무거운 짐을 지우던 정치적 실존주의의 전통이었다.
'정치적 실존주의'라니! 이런 것은 표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래서 이 전통들은 통째로 망했다. 망하면서 물귀신처럼 실존주의라는 이름을 같이 끌고 들어갔고,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 있다. 사람들이 '실존주의'라는 이름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무겁고 비극적이며 괜히 힘들게 살아야 하는 어떤 일을 요구할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 이유다.
그러나 본류의 실존주의, 우리가 이것을 '심리적 실존주의' 내지 '종교적 실존주의'라고 명명해본다면, 이는 절대로 인간이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는 일에 일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의 짐이 더 내려놓아지는 방향성을 안내한다.
신들의 세력이라고 하는 것의 더 실제적인 이름은 바로 '운명'이다. 이 운명도 무겁지만,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은 더욱 큰 무거움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유다. 더는 인간에게 주어진 메뉴얼 같은 운명이 없을 때, 인간은 이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아주 어려운 책무를 떠맡게 된 것이다.
정치적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인 사르트르는 특히 이 자유의 문제에 무척이나 겁을 먹었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자유의 두려움을 과장하며 "인간에게 자유는 (형벌처럼) 선고되었다."라고까지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제 주체적인 선택으로 흡사 신을 대신해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결단의 임무가 있음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무엇을 했는가? 사회주의로 피신했다. 연대와 참여라고 하는 관계의 힘을 강조하며, 자유에 대한 책임을 일종의 공동책임으로 분산하려고 했다. 본인이 한 말이 본인도 감당하기가 불가능한 무척이나 무거운 짐이었던 까닭이리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마르크스 수령동지 만세!"를 외치며 끝이 났으며, 잠시 번화가에 걸려있던 <실존주의>라는 간판도 철거되어야 했다.
그러나 본류의 원조맛집은 늘 있던 숲길의 초입에서 항상 그렇듯이 그 맛을 사랑하는 단골손님들과 함께 명맥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최고의 맛을 제공하는 주방장도 예로부터 변하지 않았다. 원조 [실존주의]에서는 존재가 요리한다. 인간이 떠맡아야 할 무거운 책무는 없다. 존재 그 자체가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에게 맡기면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핵심인 것이다.
운명이라고 하는 무겁고 갑갑한 신들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한 인간이 결국 처하게 된 상황은, 인간이 이제 자기 자신을 신적인 책무로 떠맡아야 한다는 무겁고 갑갑한 그 '운명'이었다. 비합리적언 언어를 합리적 언어로 바꾸려는 일이 그저 똑같은 주술의 일이었듯이, 신의 운명을 인간의 자유로 바꾸려는 이 일 또한 동일한 운명에의 속박일 뿐이었던 것이다. 신이라는 이름을 단지 인간으로 바꾸기만 했을 뿐, 그 운명의 구조는 변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틸리히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용어를 빌려 '신 위의 신(God above God)'이라는 표현을 말하게 된 것이다. 탈신화화의 목적은 낡은 신들의 억압으로부터 분명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신들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 혼자 덩그라니 놓아두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결국 자기 자신을 신적인 우상으로 만들고야 만다. '자기우상화'라고 하는, 신들을 우상화하는 것보다 더 심한 형태의 우상화가 출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결국 자기우상화된 주체가 자신을 근거짓기 위해 활용하는 이념도 우상이 되고, 그가 속한 동질성의 집단도 우상이 되며, 이 모든 것을 구조적으로 지속하려는 기계장치인 정치라는 것도 우상이 된다. 이처럼 우상이었던 신을 죽인 후에, 인간은 오히려 더 많은 신적 세력으로서의 우상을 출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을 '우상의 시대'라고 말하면 어느 때보다 분명하다. 범람하는 아이돌 문화에서부터, 개인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해 누구나 자기를 우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시대다. 쉽게 말해, 신들이 너무 많은 시대다. 신들을 다 추방한 후에 그 자리에 무수한 인간들이 대신 앉아 다양한 신들이 된 현실이다.
틸리히의 '신 위의 신'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신처럼 행세하게 된 우상들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기획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낡은 신들도, 또 새로운 우상들도, 다시금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인간의 자리로. 인간 그 자신에게로.
'신 위의 신'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존재 그 자체'다. 단순하게, 어떠한 신적 세력들보다 존재 그 자체가 더 위대하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는, 존재 그 자체는 어떠한 신적 세력들에 대해서라도 초월해 있다는 그 의미다.
즉, 이것은 문자주의적으로 신보다 더 위대한 '신 위의 신'으로서의 진짜 신이 되거나, 그것을 추앙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인간의 실존적 현실 속에서, 존재 그 자체가 무엇보다 가장 우선하고 있음을 묘사하기 위한 상징이다. 우선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다. 틸리히는 말한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영원한 근거이자 힘이라고. 말하자면, 존재의 거룩한 뿌리다.
그러니 인간은 운명이라고 하는 낡은 신들로부터 벗어난 후에, 더는 홀로 떨어진 외딴섬이나 우주의 먼지 같은 상황에 처할 이유가 없다. 그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가 스스로의 근거를 창조해서 이제 자신이 뿌리를 갖게 된 것처럼 고된 연극을 해야할 필요가 전혀 없다.
다만 존재 그 자체를 향하면 된다. 처음부터 그러했다는 것을 이해하면 되고, 또한 이것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보장하는 그 영원한 뿌리라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인간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말미암아, 오직 그것에만 의거함으로써, 이제 모든 운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탈신화화의 참된 의미다.
바로 온전한 자유의 의미다.
인간이 신들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운명의 창조자로 간주하여, 인간들끼리 힘을 모으고 연대하면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던 그 일은, 실은 자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아니 더 강대한 운명에 의해 인간 스스로가 사로잡히게 된 일에 불과했을 뿐이다.
신이 없으면 이제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었으며, 존재에 맡겨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운명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이 자유로워진다는 그 모든 일의 진상이다.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이해해보자.
신도, 인간도, 아니다.
다만 존재다. 존재 그 자체다.
신이 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존재가 한다.
이것이 원조맛집, 그 본류의 실존주의다.
그렇다면 존재는 무엇을 하는가?
바로 인간을 한다. 이를 가리켜 존재가 인간을 산다, 라고 묘사한다. 존재가 인간을 살아, 인간은 인간이 되며, 인간도 그 자신의 존재를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흡사 둘이자 하나인 어떤 아름다운 연애의 묘사 같은 것이다.
"당신의 마지막에 당신은 반드시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과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고 생각한 그 모든 일은, 실은 오직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서만 있었던 모든 일임을."
이렇게 전한 마더 테레사는 참으로 옳다.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틸리히가 그러했듯이 '존재 그 자체'라는 표현으로 다시 표현하면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 있던 그 의미다.
아니 그렇다면 실존주의란 것이 그저 기독교 신앙을 단지 철학적 표현들로만 바꾸어서 전도하려는 그 목적으로 성립된 것인가, 라고 묻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탈신화화되지 않은 사유다.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존재 그 자체'로 묘사하는 것은 은밀하게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숨겨서 특정한 구조에 인간이 포섭되도록 하려는 그 목적이 결코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존재다. 인간의 실존이다. 실존주의는 신본주의도 아니고, 인본주의도 아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오직 존재주의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를 눈치채고, 존재를 향해 다가갈 수 있도록 임의적인 언어를 발화한다. 특정한 구조에 인간을 복속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구조라도 초월해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고, 존재로 말미암은 자유를 자신의 것으로 다시 찾을 수 있게끔 도우려는 것이다.
자유, 우리가 존재로만 정향되는 이유는 바로 이 자유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자유는 존재의 본성이며, 존재가 인간을 산다는 것은 자유를 펼쳐간다는 것이다. 곧,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이며, 그것이 존재가 사랑으로 드러나는 방식이다.
우리에게 자유가 그토록 절실했다는 것은, 곧 우리가 존재를 그만큼이나 그리워했다는 뜻이다. 우리 자신을 가장 우리 자신답게 해주며, 마침내는 그렇게 온전하고도 온전한 사랑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인간 역시도 사랑한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과 존재의 사랑노래이며, 그 노래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온우주에 울려퍼진다.
지금 이러한 묘사는 늘 실존주의가 신비주의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지점인데, 만약 신비주의라는 표현이 주술적이고 오컬트적인 어떤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부당한 혐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표현이 표현 그대로 가장 근원적인 어떤 미지성, 곧 존재의 신비에 대한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면 실존주의 자신은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실존주의는 신비주의라고.
탈신화화의 의의도 그러하다. 그것은 신화가 담고 있는 존재의 신비에 대한 상징성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자주의적으로 소비됨으로서 신화가 미지를 개방해주는 상징의 힘을 잃었기에, 우상화된 언어들을 타작함으로써 그것을 본래의 자리로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주술과 신비는 달라도 완전히 다른 것이며, 그 방향성은 정반대다.
주술은 언어다. 언어로 다 통제하려는 것이다. 반면, 신비는 언어 너머다. 언어가 결코 닿지 못하는 것이다.
주술성을 날리고 신비성을 회복한다면, 그것은 탈신화화의 일이다. 실존주의가 대표적으로 이 일을 해왔다. 이 일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원조맛집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이 실존주의의 일은 유효하다. 아니 유효한 정도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절실하다.
돌아보자.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얼마나 주술이 지배하고 있는가.
한국의 주술은 대표적으로 무속의 형태를 갖는다. 오늘날 무속을 소재로 한 콘텐츠는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사회 전반에 걸쳐 무속의 냄새가 골목골목마다 가득하다. 심지어 정치판은 아예 무속판이다. 각각의 정당과 정치인들의 뒤에는 그들을 수호하는 무당들이 자리잡고 앉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오늘날의 무당들은 손에 방울 대신 마이크를 들고, 작두 대신에 미디어의 전파를 탄다.
무속과 정치가 야합한 것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주 오래된 습성이다. 고대의 제정일치 사회가 또 다시 재현되고 있는 것뿐이다. 무당이 가장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주체가 되어 있는 그 상태가. 그러면 그러한 주체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는가?
정욕처럼 주술을 흩뿌린다.
주술에 더 많은 인간이 종속되게 만든다.
이것은 '나쁜 언어'에서 '좋은 언어'로의 교체를 주장하는 목소리로 이루어진다. 곧, '나쁜 신들'에서 '좋은 신들'로의 전환을 이루라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이다. 더 노골적으로는, 이러한 전환은 한민족이 맞이해야 할 '위대한 운명'이라고까지 말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쁜 신들'을 '좋은 신들'로 교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찾아와야 할 이 운명도 '나쁜 신들'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없어지게 된다며, 그 사악한 흉계를 막기 위해 열심히 힘을 합해 더 커다란 선의의 집단을 이루어 위대한 운명을 수호하는 임무를 한국인 모두가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이 주술적 음모론이 구성되는 방식이다.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
아주 전형적인 신들의 전쟁에 대한 묘사다. 그 현대판으로는 마블의 어벤져스가 있다. 이 우주에는 '좋은 신들'과 '나쁜 신들'이 존재하고, 각각의 추종자들도 존재하며, 그 두 세력이 늘 끝없이 사투를 벌인다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이다. 이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운명처럼 인간에게 작용하고 있으며, 인간은 그 속에서 '좋은 신들'을 지지하는 '좋은 운명'과 '나쁜 신들'을 지지하는 '나쁜 운명'을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 '좋은 신들'의 '좋은 운명'에 대한 그 '선택'이 온전한 '자유'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말해질 것이다.
앞에서 길게 묘사한 것처럼, 결국에는 영구하게 인간을 운명 속에 붙들어매고 있으면서, 거기에 자유라는 이름을 붙여 기만하기까지 하는 현실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실존주의는 분명 니체가 그러했듯이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와 같은 유치하면서도 억압적인 형이상학 구조에 대한 반동이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형이상학적 구조를 자기가 언어로 문예창작한 뒤, 이것이 이면에 감추어진 위대한 운명적 진리라며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또 이를 통해 자기의 권력을 증진시키는 것이, 원래 주술의 목적이다. 음모론이라는 것이 다 이러한 것이 아니던가. 모든 음모론에는 반드시 유치한 형이상학적 전제가 있다. 음모론의 주체가 쓴 소설이.
그런데 소설은 분명 소설이 쓰이는 계기가 되는 소재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음모론적 형이상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거기에는 그 기원이 있다. 차라리 니체와 프로이트라면, 그 모든 형이상학적 소설들은 다 부모와의 관계경험으로부터 왔다고 말할지 모른다. 우리는 여기에 동의한다.
'신들의 전쟁'이란 결국 무엇인가? 엄마와 아빠의 싸움이다. 부모가 대립하고 갈등할 때, 아이는 운명의 기로에 놓인다. 어느 쪽을 '좋은 신'으로 삼을지에 대한 그 선택이 그 자신의 운명을 좋거나 나쁘게 결정지을 것만 같다. 이러한 아동의 두려운 감상이 소화되지 않은 채로 지속될 때, 이것이 형이상학의 소재가 된다. 실은 자신이 반목하는 부모 사이에서 힘들었을 뿐이면서, 마치 이 우주 전체가 거대한 신들의 전쟁터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주술적 음모론의 소설을 쓰는 주체는 아직 그 자신이 심리적으로 미발달된 것이다. 몸은 컸고, 언어능력은 발달했을지 몰라도, 그가 하나의 개인으로서 충분히 성숙된 것은 아니다. 두 가지의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나쁜 신을 거세하고 좋은 신을 선택해야 자신의 운명이 좋아질 것이라는 그 생각이, 여전히 신[부모]에게 의존해야만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는 그의 유아적인 성질을 드러내고 있는 까닭이며, 두 번째는 더욱 핵심적으로, 인간은 존재를 향해야만 비로소 인간으로 성숙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무속은 흡사 아동을 어르고 달래는 기제로 오히려 인간의 미발달의 상황을 더욱 지속하려고 한다. 그 의도가 그대로 무속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된다. 쉽게 말해, 다 아이들의 세상이고, 무속의 주체 자신만이 '좋은 신들'의 대리인으로 선택된 어떤 위대한 엄마인 것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인간은 무속의 구조 속에서 퇴행될 수밖에는 없다. 더욱더 유치해지고 미발달된 성질을 드러내게 되는 퇴행이 이 경우 인간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우리는 지금 하나의 전통문화로서의 무속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운명이라고 하는 거짓의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주술도구로 남용되고 있는 무속의 용법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경계의 오류다. 문화라고 하는 상대적인 것이 그 경계를 침범해 절대적인 것으로 그 위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이 경계의 오류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 바로 우상화다.
실존주의적 작업인 탈신화화는 현재 인간을 억압하는 우상이 되어 있는 그것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며, 오늘날 한국사회의 경우 우리는 이제 이러한 용어를 새로이 제안해볼 수 있다.
'탈무속화(deshamanization)'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지금 한국의 현실을 가장 뒤덮고 있는 우상의 그림자로부터, 저 넓은 하늘을 인간에게 다시 개방하려는 의도를 담은 표현이다. 탈신화화의 한국형 버전, K-탈신화화라고 말해볼까. 그러나 그렇게 실제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K라는 접두어는 대체로 주술을 시동하는 첫 음절이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에서 가능할 수 있는 실존주의는 왜 탈무속화를 향하려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우리는 지금껏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영원한 울림으로 대답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주겠다는 그 모든 운명의 세력들로부터, 낡은 신들로부터, 또 새로운 우상들로부터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당해왔고, 몹시 피폐해져있다.
나쁜 신을 좋은 신으로 바꾸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끓는 솥에서 나와 프라이팬으로 튀겨지기 위해 들어가는 일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다. 다음에는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산 넘어서 산이 아니라, 운명 넘어서 운명이다.
그렇게 지난한 운명의 골짜기를, 해병대처럼 함께 어깨동무를 한 채 진한 동지애로 빠져나온 그 끝에야 겨우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 자유라고 대체 누가 말하던가?
그가 바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최악의 거짓말쟁이, 최흉의 사기꾼이다.
실존주의는 자유에 관해 완전히 다르게 말한다. 자유는 존재의 본성이며, 우리가 본래 가진 것이다. 힘겹게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힘겹게 하고 있던 것을 그만 하면 그 즉시 우리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즉, 스스로에게 주술을 거는 일을 멈추면, 우리는 바로 자유롭다.
역사는 목적을 갖고 있다느니, 운명에 따라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이라느니, 그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한다느니, 이런 것들이 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술을 거는 방식이다. 곧, 스스로를 저주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더 무거운 짐으로서의 어떤 신성한 과업을 부여받아 살아가야 한다는 그 사고방식이다.
진실로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의 주관자는 오직 존재일 것이다. 자유만큼이나 운명에 대해서도 존재가 유일한 주관자다. 물론 존재를 어떠한 실체처럼 '-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자유와 운명이 함께 귀속되는 그 자리는 어떻든 존재다.
차라리 이처럼 운명을 주관하는 것이 존재라고 본다면, 이 경우에도 우리의 어깨는 가벼워진다. 존재가 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는 무엇을 하는가? 계속 말해왔다. 존재는 인간을 모험하며, 곧 인간을 산다. 조악하게 비유하자면, 자신이 살아야 할 집을 일부러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이도 있는가? 악의적으로 힘든 일로만 가득하게 만드는 이도 있는가?
거짓된 신들, 거짓의 우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곧 그것들이 만든 거짓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말과도 같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른 무엇이 아닌 오직 존재가 주관하는 참된 운명 속에 놓이는 것이다. 거짓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자유라고 할 때, 이 지점에서 존재를 향한 자유와 운명은 같은 말이 된다. 존재에게로 참된 자유는 존재에게로 참된 운명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누리라고 존재로부터 허락받은 그 현실이다.
탈신화화, 또는 탈무속화는 주술을 깨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존재에게로 향해져야 할 것이 다른 것으로 향하고 있던 그 방향성을 되돌리는 것이다. 회복하는 것이다.
무속의 주술은 신과 인간 사이를 중개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의 권위를 빌어 그 매개자가 인간에게 대신 위력을 행사한다.
실존주의는 그 억압의 구조를 끊는다. 신도 인간도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는 그 모든 것이, 다 존재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있도록 안내한다. 신도 인간도 아닌, 존재 자체를 향한, 그 신비를 향한 방향성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우리가 가장 온전하게 자유로우라고 존재로부터 운명지어진 그 길이.
이것은 사르트르가 비명을 내지른 것처럼 더는 두려운 현실이 아니다.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혼자 우주의 고아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가 우리의 운명이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존재한다. 우리의 존재 그 자체야말로 우리의 자유 그 자체였던 것이며, 그렇게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던 것은 그 시작부터 우리에게 있었던 셈이다. 신도 인간도 아니어서, 그 존재의 현실만이 선명하다. 우리는 더욱 존재하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