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여행자 #1

"나를 기쁘게 하는 것"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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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여행자』. 서점에 이런 제목의 책이 놓여 있다면 나는 반드시 한번 들추어볼 것이다.


그 안에 타로카드 그림이나, 룬 문자나, 마크툽 같은 문구가 보이기보다는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 같은 장제목이나, "존재가 인간을 모험한다."와 같은 본문의 내용이 보인다면 무척 반가울 것이다.


그렇다고 철학서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차라리 철학서들의 표현이 더 신비적이라는 것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노골적인 오컬트의 소재들보다 오히려 철학서들이 신비에 관해 더욱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철학서를 읽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철학서들은 신비의 문 앞으로 데려간 뒤, 그 문턱에서 지나치게 긴 사변들로 종종 우리를 지치게 한다. 언어로 견고하게 엮은 구명줄을 몸의 일부처럼 단단히 체결한 후에야 그 문 너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어떤 과잉의 조짐도 있다.


대체로 철학자들에게서 가장 멋들어지는 부분은 그들의 주장이다. 주장하고 있을 때는 그들은 시인이다. 신비의 빛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다. 그 빛의 율동을 따라 주장과 주장 사이를 건너뛰면서 읽으면 철학서는 시집처럼 읽힌다. 하지만 이렇게 읽으면 안된다. 이것은 마치 감각이 좋은 과외선생님이 풀어주는 문제의 해법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일. 감동이 끝나면 나는 여전히 문앞에 서있을 뿐이며, 내 자신의 여행은 아직 시작된 적도 없다. 차근차근 밟아가야만 할 것이다.


철학서와 시집 사이에는 원래 종교서가 있었다. 요즘에는 잘 없다. 종교서는 모든 주제를 다 종교공동체에 대한 강조로 수렴시키는 영업책자나, 사회변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고 선동하는 정치백서나, 아니면 수행의 기술적 메뉴얼 같은 것으로 변질된지 오래다. 더 재미없게는 윤리강령으로의 몰락이다.


종교가 그 내부에서부터 신비성을 상실했을 때, 종교는 윤리로 전락한다. 그렇게 출현한 윤리는 가장 교조적이고 억압적인 형태의 윤리다. 그 목적도 분명한데, 그것은 신비의 말살이다. 종교가 종교인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비에 대한 열등감이 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이 공공연한 신비의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러한 만큼 종교의 향유자들이 신비를 경험하지 못할 때 그것은 더욱 커다란 열등감이 된다. 그러니 차라리 신비를 부정해버리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가 가진 양가적 측면이다. 종교는 보다 직접적으로 신비에 대한 지향을 표면화하면서도, 그 표면화의 양적 확대로 인해 동시에 신비성을 잃어가게 된다. 이것은 모험과 통제라는 두 기제로 다시 묘사할 수 있다.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로의 모험길을 개방하지만, 동시에 이제 그렇게 조금 더 접근가능한 형상으로 드러난 길에 대한 통제욕에도 똑같이 개방되는 것이다.


통제라고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분명 신비의 가장 큰 방해물이다.


인간이 신비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된 것은 더욱더 통제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문명을 발전시켜온 까닭이다. 이제는 누가 밖에서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다. 개인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통제해나간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빅 브라더이며, 이것이 문명을 이루는 그 핵심인 '관계'라는 구조의 힘이다.


심지어 이 관계의 기제는 신비에까지도 적용되려는 의지를 보이기까지 한다. 신비의 소재와 관계맺음으로써 어떤 초상적이며 마법적인 통제력을 얻을 수 있다는 발상, 곧 오컬트의 출현이다. 통제욕으로 가장 오염된 신비의 실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오컬트적인 것은 실은 신비와 가장 멀리 위치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비란 무엇인가?


시적인 것이기도 하고, 철학적인 것이기도 하며, 종교적인 것이기도 하겠지만, 실은 그들 중 어느 것도 아닌 것. 또 마찬가지로 물리학적이기도, 화학적이기도, 생리학적이기도 하겠지만, 그 어느 것도 아닌 것.


그러나 어느 것도 아닌 언어게임의 추상으로 숨어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의 눈앞에 가장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왜 이 모든 것인가에 대한 어떤 절대적 사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이 삶이란 대체 무엇인가? 왜 존재하고 있는가?


바로 이 물음들로써만 펼쳐지고 또 대답되어 가는 그 어떤 실재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격렬하게 흔들어놓고, 감격시키며, 또 끝없이 설레게 만든다면, 그렇게 우리의 인생 자체를 통째로 바꾸어 놓는다면, 우리는 여기에 신비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더 쉽게 말해보자.


내가 완전히 모르는 것이 있다. 그렇게 나를 완전히 새롭게 다시 알게 하는 것이 있다. 그동안 몰랐던 최신의 지식정보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내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이해를 완전히 다르게 드러내고 있는, 차라리 조금 미친 얘기다. 마치 껍질이 깨지듯, 장막이 걷히듯, 갑자기 확 트인 전망을 개방하는 그 일이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끌림을 우리가 주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신비다.


신비가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거울이라서다.


신비를 통해 볼 때야 인간은 자신을 바로 보게 된다.


인간 그 자신이 얼마나 매혹적인 존재인지를 그때서야 알게 된다.


평생을 빚진 자처럼 살다가도 문득 신비에 자신을 비추어보게 된 인간은 그 자신을 빛인 자로서 다시 찾는다. 그 빛이 그립고도 그리워 계속 빛에 끌려간다. 자꾸 보고 싶고, 또 보고 싶다.


인간 그 자신의 얼굴이 그처럼 매일 보고 싶은 반가운 얼굴이 되어 환하게 빛을 더해간다면,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신비다.


또 말해보자.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었으며,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었던,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비로소 깨닫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신비다.


신비를 향해 여행하는 이는 신비를 닮아간다.


나를 향해 여행하고자 하는 이만이 나로 무르익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서도, 시집도, 종교서도 아닐 것이지만, 그것들처럼 나를 향하고자 하던 기록이다. 그러나 이제 '나'라는 표현은 가급적 쓰지 않으려 한다. "당당한 나를 외쳐봐." "나만의 특별한 개성을 만드는 법." "나를 찾는 심층심리학의 탐구" "본캐인 나, 부캐인 나." "하나뿐인 소중한 나를 끌어안으며," 등등, 이제는 너무 지친다. 이 시대에 '나'는 더는 신비의 이름이 아닌 피로감의 이름이다.


차라리 그런 얘기들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신비를 잃게 되었는지, 또 신비를 향한 우리의 여행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어떤 것들인지에 대해 말하다보면, 철학서와 시집과 종교서 사이의 어느 긴요한 틈새에 안착하게 될 것이다.


되도록 짧게 쓸 수 있을까. 신비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신비롭게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숙제가 아니라 소망이며, 모든 여행은 소망에서 시작된다. 신비의 페이지를 한번 들추어보고자 하는 그 맑고 아름다운 소망으로부터. 그렇게 우주는 펼쳐졌던 것이며, 우리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얻었다. 거기에는 소망이 있었던 것이다. 신비로운 것이 스스로를 알고자 하던. 이것이 최초의 신비다.


……이런 말들이 그 안에 쓰여있었다면 나는 몹시 기뻤을 것이다.


나를 진정으로 기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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