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여행자 #2

"인간의 손님"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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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당이나 저염식 같은 것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정말 노골적으로 맛있는 생선굽는 냄새가 골목에 퍼진다. 어느 저녁식탁을 위해 준비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면 바랐을 것이다. 소금간이 잘 배어있는 씨알 좋은 굴비구이와, 살짝 진 쌀밥과, 들기름을 발라 구운 김과, 적명란을 가득 넣은 계란찜과, 또 달래와 감자가 많이 들어간 된장찌개를. 반찬투정용으로 두세 조각의 스팸도 곁들여진다면 이제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내 영혼은 치유되었다.


사실을 말하건대 나는 몹시 지쳐있다.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 생각하며 귀를 틀어막고 있는 이들에게 정말로 질려버렸다. 말해도 말해도 들어가지 않는 얘기들과, 그로 인해 결코 돌아오지 않고 허공으로 흩어져만 가는 에너지의 낭비에 한참이나 지쳐있다. 듣지 않을 것이라면 애초 묻지를 말아다오. 어떻게 하면 나처럼 살 수 있는지를 나에게 물어놓고, 있는 그대로의 것을 정직하게 다 얘기하면, 그 앞에서 마치 엄마의 부당한 받아쓰기 과제에 대해 반항하는 아이 같은 고집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은 왜인가?


자신이 가장 똑똑한 인식의 주체이고, 이 세상의 주인공이며, 모든 올바른 정답을 그 머릿속에 이미 다 갖고 있는 자라면, 부디 그렇게 살아라. 또 미디어의 선동가나 광대들을 인생을 이끌어주는 스승처럼 섬기고 있다면, 부디 잘 섬겨라. 자신이 그렇게 잘 살면 될 일이지 왜 묻고 있는가? 아니 물음을 빙자하여 자신이 믿던 가르침과 남의 삶 사이에 왜 시비를 붙이려고 하는가?


갑갑하다. 자기 머릿속이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을 하루하루 접해가며 너무나 갑갑해 견딜 수가 없다.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보다 심하다. 돌로 가득찬 독에 마음을 붓는 일은, 그야말로 독이다. 나날이 소진된다.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까지 내몰려간다. 자살? 그 정도일까? 이 세계 자체를 아예 무로 돌리고 싶다. 리셋만이 갈급하다.


그러다가 나는 알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신비를 상실해있는 인간의 상태라는 것을.


신비를 잃은 인간은 자신이 귀한 줄 모르게 되며, 결국 다른 이의 귀함도 모르게 된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 혼자 잘났다고 고집하며 떼만 쓰게 된다. 또는 카메라 앞에서 조명과 보정효과를 통해 거짓의 귀함을 조작해내려고 획책하기도 한다.


신비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이 물음에 정확히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곳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단, 카메라가 비치지 않는 곳에서.


카메라는 통제의 시선이다. 카메라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면,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어떤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생각이 많고, 특히 자기 생각에 늘 빠져있는 이는, 이 카메라의 검열을 받고 있는 상태와도 같다. 자기가 어떤 사람이어야 할지, 어떤 선택 및 결정을 해야 현명하게 보일지 등을 늘 고민해야 하는 것은 뇌 속에 카메라를 달고 다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들의 생활은 머릿속 대본에 따라서 연기를 하는 삶과 같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뇌 속 카메라와, 그 카메라로 잡힌 화면이 송출될 가상의 관객이 늘 동반하고 있다.


우리는 프로이트식의 초자아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아다. 자신을 카메라에 비친 배우처럼 행위하려는 이것이 자아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이다. 자아는 연출가이자, 각본가이며, 동시에 배우다. 뇌 속 카메라와 연루된 총체를 자아라고 말한다면 정확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통제의 총체다.


자아를 '나'라고 말하며 그에 탐닉해있음으로써, 우리는 신비를 잃게 되었다. 통제하는 카메라의 빛 아래서는 신비는 실종되고 만다. 환호하며 갈채를 보내는 모든 것이 그 옆에 다 있다 하더라도 신비만은 없기에, 인간의 운명은 쓸쓸하다.


그러다가 인간은 알게 되고 마는 것이다.


어느 저녁의 골목길에 찾아온 생선구이의 냄새와 함께, 지친 몸을 기대고 있던 교회벽의 뒤편에서 새어나오는 찬송소리를 통해, 또 알 수 없는 설움과 울적함에 무작정 집을 나서 걷다가 문득 올려다보게 된 달빛 속에서, 인간은 결국 신비를 만나고야 마는 것이다. 그 자신이 한결같이 간절히도 원했던 것이 신비라는 그 사실을 결국에는 알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인간이 이 모든 고집스러운 연극에 너무나도 질리고 지쳐, 무척이나 외롭고, 서러우며, 세상에서 진실로 혼자라고 경험할 때, 그럼으로써 그 모든 카메라의 의도가 완전히 기각된 그 속에서, 그럴 때만이 인간을 기억하고, 인간을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니, 인간은 그 손님을 알아보고 귀하게 맞이한다. 이제 신비가 인간의 문을 조용히 두드리고 있음이라.


인간은 진실로 혼자일 때만이 진실로 그 자신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울상을 짓는다면, 무수한 카메라의 프레임들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이 카메라에 비치면 이런 사람 같고, 저 카메라에 비치면 저런 사람 같다. 자아들이 이루는 관계라는 것이 다 이러하다. 그것은 서로가 더욱 서로를 망각하도록, 그럼으로써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을 망각하게끔 만들어진 미로 같은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잃은 이, 그것이야말로 가장 통제하기 쉬운 조건을 달성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신비는 잃지 않는다.


인간이 신비를 잃었을지라도, 신비만은 인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신비의 여행길이란, 인간이 신비를 향해 떠난 그 길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신비가 인간을 찾아 떠난 그 길이다.


카메라가 비추는 어떤 영광과 찬사가 없는 곳에서도, 신비는 묵묵히 인간을 찾아 여행하고 있었다. 그 길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왜인가?


인간이 목놓아 신비를 찾아 부르고 있었기에.


인간의 그 울음소리를 신비는 분명 들었기에.


이것은 인간이 신비를 찾아, 또 신비가 인간을 찾아 떠난 여행길. 인간이 간다고 말할 때, 신비쪽에서는 오는 것이다. 인간이 그 자신 안에 갑갑하게 갇혀 있는 그 밖으로 나서고자 할 때, 신비쪽에서는 인간을 향해 들어오는 것이다.


인간의 손님이.


이제야 인간을 찾았다며, 문을 두드린다.


레비나스는 환대를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도 그의 표현이 무척이나 좋다.


우리가 신비를 여행한다는 것은, 곧 신비를 환대한다는 것.


돌이켜보면 금방이라도 알 수 있다.


우리가 먼저 그렇게 우리를 여행하던 신비로부터 환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느 저녁길의 생선구이 냄새로, 나그네의 지친 어깨에 내려앉는 찬송가 소리로, 저 환한 달빛으로, 우리는 모든 곳에서 실은 환대되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손님이, 신비가, 언제라도 인간을 먼저 청하고 있었다.


우리가 조금 지쳐있고 쓸쓸하게 된 것은 이 사실을 위해서일 것이다. 신비가 우리를 가장 귀한 것으로 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는 오붓하게 혼자인 것이며, 나지막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제 문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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