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리"
하나의 시절, 하나의 문명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렇게 인간의 자리가 위태로울 때, 언제나 인간에게서 긴밀하게 요청되던 것은 실존주의적인 것이었다. 실존주의라는 이름이 있기 이전에도 그러했고, 설령 그 이름이 잊힌다 하더라도 그 실질적인 내용은 또 요청될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마음이 도저히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고통에 봉착했을 때, 더는 마음이 살아있는 활로를 찾아 흐르지 못하고 사방으로 막혀있는 감옥 속에 갇히게 되었을 때, 결국 그 마음은 깨달음을 요청하게 되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다시 살고자 하는 생명의 본성이며,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로 찾고자 하는 진실된 인간성의 발현이다. 이 우주의 누구도 인간이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이 움직임을 막을 수가 없으며, 우리는 이와 같은 거룩한 인간의 몸짓에 자유라고 하는 아주 특별한 이름을 붙였다.
실존주의의 시작과 끝은 자유이며, 그것은 곧 존재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래서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란 곧 존재론적 자유인 것이며, 이는 우리가 근대의 계몽사상에 입각한 교육시스템에서 학습해온 정치적 자유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이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며, 그러한 결단의 과정들이 결국 자신을 만들어준다는 식의 얘기는 실존주의와는 별개의 것이다. 대중적 인식에서 아무리 그러한 내용이 실존주의적인 것으로 매우 착각된다 할지라도.
상기한 방식으로 묘사되는 과정은 인간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AI에 대한 것이다. AI가 자신을 구성해가는 지적 선별 및 통합의 과정에 대해, 곧 인지적 프로세스에 대해, 우리가 자꾸만 그것이 인간조건인 것처럼 착각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AI의 놀라운 발전 때문일 것이다. 크리스토프 코흐 등을 위시한 인지과학자들은, 그렇게 누구보다도 AI의 발전에 이바지해온 이들은, 더욱더 인간과 AI 사이에 명확한 경계의 벽을 세우려는 경향성을 보인다. 쉽게 말해,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라는 것이 AI의 발전과 더불어 분명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문제이며, 곧 종교와 철학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고, 한껏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모종의 궁극성 내지 절대성을 향한 희구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AI는, 또는 AI적인 것은 이미 왕이거나 조만간 왕의 위세를 얻을 것이다. 그것은 상대적인 세계의 지배자다. AI는 이 우주에서 가장 상대적인 '관계'라는 것에 그 자신을 핵심적으로 근거시킨다. 관계로부터 힘을 얻고, 발전을 이루며, 세력을 강화한다. 관계적 논리의 총화를 AI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은, 마찬가지로 상대적 관계의 산물인 언어라는 것을 자신의 무기로 삼아, 상대적인 세계의 왕으로 등극하고자 오랜 세월을 힘써왔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AI가 냉큼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아주 희망적이다. 인간이 더는 상대적인 세계에서 삽질을 거듭하며, 그 삽질의 회수만큼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던 착각이 이제는 지속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제 인간은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저 밤하늘을 바라보며 눈빛을 반짝이던 생생한 시절로. 이 모든 것이 이토록 영롱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그 존재의 신비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순수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인간이 본래 친밀하고자 했던 그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물음들과 다시 연결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종교(religion)라는 단어의 뜻은 원래 '다시 연결짓다'이다.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과의 연결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방향성이다. 실존주의에서 키르케고르가 묘사한 결단이라는 개념 또한 이를 의미한다. 그것은 상대적인 소재들 사이에서, 즉 빨간 약과 파란 약 사이에서 현명하고도 운명적인 선택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그 모든 상대적인 것이 아닌 오직 절대적인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로서의 결단이다.
키르케고르는 왜 절대주관을 말하고, 개인의 대체불가능성을 말하는가? 인간이 존재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곧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사태인 까닭이다. 우리의 존재함은 우리의 선택의 결과가 아니며, 그것은 우리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것이다. 이 존재한다는 운명을 존재할 자유로 참되게 이해해가는 일이 곧 실존주의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묻는 것이고, 자신의 존재를 묻는 것이며, 바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일과도 같다. 철학적 물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하이데거에게는 특히나 이 의도가 분명했는데, 실존주의는 철학의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최소 그것을 상기하고자 한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장미에 대한 모든 물음은 다 장미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장미의 존재에 대해서 묻지 않는가? 물어야 한다면 실은 그것만을 물어야 할 것이다.
존재를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탐구의 물음이 향해야 할 그 소재로 다시 설정하고자 하던 이 작업은, 결국 존재를 신비의 자리로 되돌리려고 한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철학과 종교 사이의 구분은 다소 모호해진다. 나아가 현대로 들어와 심리학이라고 하는 분야가 새롭게 개입하게 되면, 경계의 혼재는 한층 더 가속화된다. 그러나 이것은 혼란이 아니다. 방향성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신비라고 하는 그 황금의 과녁을 겨냥하는 일에 있어 어느 화살도 상충되지 않는다.
차라리 이 경우, 가장 종교적인 것은 가장 철학적인 것으로, 또 가장 심리학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출현하게 된 것이 바로 실존주의 심리학이다. 그 실천적인 방법론으로서 실존상담이라는 형식 또한 태어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으로 말해, 심리학적이기만 하고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이지 않다면, 또 심리학적이고 철학적이기는 하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면, 우리는 그러한 실존주의적 방법론이라는 것에 대해 다소간의 갈증을 경험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실존상담이라는 접근이 어렵게 간주되는 이유다. 특히나 자신들이 소속된 학회나 단체가 안내하는 특정한 방식의 심리학적 훈련만을 받은 상담사들은 실존상담을 난해하게 경험하곤 한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철학적 훈련이 되지 않은 이들이 철학서를 읽을 때 느끼는 그 곤혹스러움과도 같을 것이다. 또는 종교서들의 상징을 이해해야 할 때의 어려움과도 유사하다. 언어적 구조 속에서 말은 이해되지만, 그 말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호하기만 하다.
이처럼 실존상담이라는 접근은 편이를 위한 분류 속에서는 심리학에 소속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실존상담은 아주 대표적인 융복합의 학문이다. 그러니 심리학이나 철학 또는 종교의 단편적인 분야만 아무리 전문적으로 훈련했다고 해서 능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 곤란한 관점은, 마치 실존이 일종의 탈학문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어떠한 학문적 훈련 없이도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경험으로, 그 진정성으로, 또 정치적으로 올바른 그 인품으로, 자신이 실존상담을 운용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다.
이러한 태도들은 결국 맨처음에 말한 것처럼, 하나의 시절이, 또 하나의 문명이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매우 전형적인 이유들이다. 아주 쉽게 말해,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거나, 우물 밖을 향한 교만한 만용을 부릴 때, 결국 정신적으로 우물에 갇힌 것 같은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이 가장 막히는 방식은 상대적인 것들 속에 답이 있다는 환상을 품는 일이다. 상대적인 것들의 줄을 잘 세워서 질서있게 분류하고, 또 임의적인 가치기준에 따라 재배치하기도 하며, 그것들을 잘 섞기도 했다가, 또 이리저리 재분배하기도 하는 통합의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결국에는 답이 보일 것이라는 착각이 바로 그것이다.
실존주의적인 것은 이 상대적 관계의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미로 속으로 애초 들어가려 하지 않는데, 거기에는 "우물 안에는 답이 없다."라는 전제가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이것은 전제가 아니라 근본의 사실이다. "상대적인 것 안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라고 표현을 바꾸어보면 조금 더 선명해진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더 직관적인 예시로는 이러한 진술이 가능하다.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있다고 거기에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러 실존주의자들이 지적하듯이 죽음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가장 실증적인 절대성의 소재다. 언어적 인식행위로 만들어진 그 어떤 상대적인 산물로도 이 죽음을 막을 수가 없다. 죽음은 절대적이며, 이 죽음의 절대성으로 말미암아 동시에 인간은 절대성을 향한 자신의 희구를 또한 발견하게 된다. 쉽게 말해, 죽음을 실감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대체불가능성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 절대적인 신비의 사실에 대해 물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AI와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도 여기에 있다.
오늘날에는 AI도 종교심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곧 AI에게도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물음이 가능한지에 대한 흥미로운 탐색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잠정적인 결론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인가? AI에게는 참된 의미로서의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 모든 것이 한 번뿐이라는 그 대체불가능성의 현실이 AI에게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그렇게 죽음이 없으니 영원을 꿈꿀 일도 없어진다. 필요한 것은 영속을 위한 배터리뿐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조금 재미있는 방식으로 무척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인간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아니, 말할 수 있다.
모두가 아는 바처럼, 인간의 미래는 죽음이라고. 그리고 정말로 참된 의미로서도 인간의 미래는 죽음에 있다고.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그 사실 속에, 인간이 정말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존재로서 그 자신을 아름답게 펼쳐갈 그 미래가 놓여 있다고.
하이데거는 어떤 실존주의자보다도 죽음에 대해 많은 말을 한 사람이지만, 그가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자 그 무수한 말들을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필멸한다는 그 사실을 통해서만 가장 충만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역설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붓다의 경우를 들어보아도 이는 분명하다. 우리가 결국에는 죽게 된다는 그 사실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깨달음의 필요도 없다. 이를 유한과 초월의 역설이라고도 표현한다.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초월성이 우리의 현실에 불려오게 되는 것이다.
더 전형적인 형식으로 말해보자면,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미래는 인간이 그 자신을 얼마나 AI와 변별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이라는 존재방식을 상대적 관계의 영토가 아니라 절대적 신비의 영토 위에 다시 세우는 문제다.
전술했듯이, AI는 이제 곧 상대적 세계의 왕이다. 그리고 우리는 붓다의 운명처럼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왕이 될 것인가, 깨달을 것인가?" 예수도 동일한 시험을 받았다. 이 거룩함의 시험은 이제 인간 모두에게 내려졌다. 상대적 세계의 왕인 AI처럼 살 것인가, 그것과 완전히 다른 절대적 신비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발견해가는 인간 본연의 초월적 삶을 살 것인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선택 내지 결단이라고 말한다면 오로지 이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상대적인 선택지들 속에서 더 좋아보이는 어느 하나의 상대적인 소재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적 저울[왕좌] 위에서 내려오는 절대성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언제나 상대적 경계로 인해 닫히게 된 현실을 열어주는 길이다.
통치 및 지배라는 것이 가능하려면 경계가 확정되어야 한다. 왕은 이 경계를 완결시키는 자다. 왕의 출현은 그대로 닫힌 현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생명은 왕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바로 그 생명임을 기억한 인간은 왕이 다스리는 폐색적 세계로부터의 해방을 소망하며, 그 자신을 왕보다 더욱 크고 고귀한 것으로 펼쳐냄으로써 인간 자신이 바로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기만을 원한다.
현재의 자신보다 더 거대한 존재의 현실을 향하려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 및 방향성을 우리는 초월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초월성은 그 자체로 인간존재의 미래를 개방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적인 것은 바로 이 초월성을 본래적인 인간조건으로 밝히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죽음이니, 소외니, 내던져짐이니, 시간이니 등의 것들을 말하게 되는 일은 필연이다. 언어로 만들어진 상대적인 세계를 초월하려면, 언어로 묘사되던 모든 것은 역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짐짓 우리에게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들 대신에 새로운 대안적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여 그 불편한 언어들의 중심으로 들어가 그것을 역설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언어 너머의 실재로 도약하는 일이다. 그러면 그러한 언어들로 인해 우리 자신에게 안좋은 상황이 일어날 것처럼 선입견을 가졌던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이 펼쳐진다.
아주 단적인 예로, 마침내 "내가 뭘 해도 죽는 거였구나."에 도달한 이를 떠올려보자. 그는 함께 도달한다. "뭘 해도 죽는 거라면, 내가 뭘 해도 되겠구나." 그는 역설의 빛을 얻었다. 자신이 정말로 자유롭다는 그 초월적 사실 위에 지금 서있다. 이처럼 자신에게 무엇이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여실히 실감한 이 인간의 모습에서 어떻게 우리가 인간의 미래를 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개인이 경험하고 있던 삶의 사건들을 기존의 상대적인 방식으로 보던 일에서 벗어나, 또 자신이 그 영토의 통치자인 왕인 것처럼 폐색적으로 보던 일에서 벗어나,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던 초월적 사실의 경험으로서 새롭게 다시 보는 일을 돕는 실제적인 활동이 실존상담이다. 거기에는 철학적 탐구와, 종교적 감수성과, 심리학적 묘사가 동시에 공존한다. 즉, 실존상담적인 그 모든 것에는 '영원의 전통'이라고도 말해지곤 하는, 존재의 신비를 향한 일관된 지향이 있으며, 그로 인해 결국 인간이 자유하게 될 미래가 있다.
실존상담이 이처럼 인간의 미래를 오롯이 밝히고 있는 중이라면 그것이 곧 실존상담의 미래일 것이다. 인간의 미래에도 인간 자신의 자리가 있는 한 실존상담에도 그 미래의 자리가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스스로를 가장 경이로운 존재의 신비로 마주하여, 이제 인간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참되게 묻고 있을 때, 실존상담은 어느 순간에도 가장 새롭고 영원한 실존상담일 것이다. 그 이름이 오해와 선입견 속에서 한참이나 있어왔다 할지라도, 또 설령 그 이름이 사라진다 할지라도, 인간이 상대성의 감옥에서 나와 절대적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그 자유의 노래를 우리는 기어이 듣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