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온전함을 향해"
느낌은 존재의 기척이다.
그래서 자고로 존재를 알고자 하는 이는 느낌을 따라 존재로 향하는 길을 걷고자 했다.
아마도 인간의 여정을 조금 힘겹게 만든 것은, 또 많이 돌아가며 인간으로 하여금 상처투성이가 되게 만든 것은 지성에 의해 존재를 포착하고자 하던 그 착각된 태도였을 것이다. 지성은 단지 느낌의 부가기능일 뿐인데, 오히려 지성을 느낌보다 앞세우며 길을 확보하고자 한 시도는 오류일 수밖에는 없었다.
지성이 필요한 때는 길을 내는 데 있어서 실천적이고 효용적인 방법론을 모색할 때다. 지성 자체가 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니다. 저 먼 호수에 있는 물을 이 산등성이로 끌어올려 쓸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라는 번뜩이는 느낌이 있어야 수로로의 가능성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로부터 영감, 직감, 직관, 창조성이라고 부르거나, 또 경우에 따라서는 계시, 신탁, 예지라고 부르던 것은 다 이 느낌에 대한 얘기다. 존재가 스스로의 길을 펼쳐내고자 하는 그 태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느낌을 따라, 또는 느낌을 향해, 또는 느낌으로 움직이면 우리는 반드시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존재와 일치하여 존재의 일에 동참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실존이라는 용어로 묘사되는 상황은 바로 이 존재의 작용 앞에 서있는 인간의 상태 내지 그 방향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에서부터 이러한 인간의 입장은 매우 정확하게 묘사되었으며, 하이데거는 이것이 존재를 향한 인간의 여정임을 분명히 했다. 아마도 니체는 이 총체의 묘사에 기여할 것이다. 베르쟈예프는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묘사하는 일에 있어 그 확장 또는 키르케고르로의 복귀를 시도했으며, 마르셀도 다른 한편에서 동일한 지점을 상기하고자 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존재의 탐구자'로서의 인간의 본래적 입장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초심자에게는 아주 유용하지만, 이 '존재의 탐구자'에 대한 묘사를 심화하는 일에 있어서는 실존주의를 결국 배신하고야 만다. 그는 존재를 탐구하는 일보다는 존재를 유희하는 일에 더 관심이 컸다.
이를테면, 사르트르가 이해되는 방식 또는 오해되는 방식 속에서, 인간은 흡사 본질이 정해져 있지 않은 빈 그릇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니 개인은 임의적으로 자신의 본질을 결정할 수 있다는 식이고, 과거에는 '나쁜 본질'이었을지라도 그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본질'을 자기 안에 대신 채워넣을 수 있다는 식이다. 장발장 같은 인물상은 대개 이러한 이해를 지지하는 사례로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존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실존주의가 극복하고자 한 그 모습이다. 소위 말해, 근대적 정신이라는 것.
상기한 '나쁜 본질'과 '좋은 본질'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보편적 이성에 의해서다. 윤리와 선, 공동체의 안위를 위한 보편적 이성의 계몽과 훈련을 통해 개인은 점차 '나쁜 본질'을 비워내고 '좋은 본질'을 갖게 된다고 믿어진다. 이렇게 사르트르를 이해로든 오해로든 끝까지 따라간 그 결과는 결국 우리를 헤겔의 앞으로 다시 데려간다. 실존주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키르케고르가 그토록 극복하고자 했던 그 근대정신의 핵심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키르케고르의 방식으로 이해하자면, 인간이 윤리의 문턱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유희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윤리야말로 가장 유희할 수 있는 놀이터이기에.
키르케고르는 실존을 세 단계로 묘사하며, 각기 유희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을 말한다. 앞의 두 단계는 실은 거의 동일한 것이다. 혼자만의 놀이터인가, 공동체의 놀이터인가라는 그 무대의 크기에 대한 변별만이 있을 뿐이다. 이 두 단계를 지배하는 목소리는 공통적이다. 그것은 "나는 할 수 있다."이다. 나아가서는 "내가 해야만 한다."이다.
유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면 그 핵심은 자신의 힘을 즐기는 것이다. 축구공이나, 게임기 같은 대상적 소재들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힘을 쓰는 일을 즐겨한다. 자신이 얼마나 힘이 있는 인물인가를 실감하는 그 일이 주요한 유희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윤리는 최고의 유희적 대상물이 된다. 윤리의 근간은 자기통제이며, 자기가 자기를 통제하려는 그 힘이야말로 인간이 집행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출현이며, 윤리는 다분히 권력적인 것이다. 권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들의 입에서 하나같이 다 윤리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는 이유다.
키르케고르가 묘사한 유희적 실존이나 윤리적 실존은 다 이처럼 인간이 권력에 도취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이러한 인간상은 자신의 도덕성과 선함의 의지에 취해 있다. 그 윤리적 힘으로 버텨내고 또 버텨내어 결국에는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권력자였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곧 이 의지가 행사되는 표현이다. 쉽게 말해,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자신의 윤리적 힘으로 자신이 해트트릭을 해 이겼다는 것이며, 공동체인 팀도 이기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발장이며, 아주 전형적인 근대적 인간상에 대한 묘사다.
그리고 키르케고르는 이처럼 근대의 보편적 이성에 대한 추구가 낳은 인간의 윤리적 자아도취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는 일을 촉구했다. 소위 말해, 꿈깨고 자신의 몸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유한자인 자신의 상황으로.
키르케고르가 말한 종교적 실존은 윤리적 실존이 포기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인간이 윤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일부러 위악적으로 나쁜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 자신이 가장 높은 척하는 그 자아도취의 옥좌로부터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윤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권력을 포기한다는 것이며, 이로써 인간은 탐구자의 입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인간 앞에 드러나있는 존재를 향해서만 간곡한 그 입장으로. 이것이 키르케고르에게서 잘 알려진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표현의 의미다.
이 탐구자의 태도가 종교적 실존으로 불리는 것은, 특정종교의 교리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여기에서 '종교적'이라는 말의 뜻은 '인간이 자신보다 거대한 것을 향해 있다'는 그 의미다. 존재라는 것이 무엇보다 그러하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즐겨 사용한 그리스도교적 표현으로서의 '신'이라는 단어를 '존재'라고 옮겨적으면 하이데거의 기획이 된다. 나중에 이것은 틸리히에게서 '존재 그 자체'라는 표현으로 드러나게 되며, 또 많은 시간을 거쳐 오늘날 우리에게는 '몸 그 자체'라든가 '느낌 그 자체'라는 이해로까지 연결된다. 그들이 실존주의의 계승자들은 아니었지만, 이 시대에 탁월하게 발전해있는 분야인 인지과학 및 신경생리학의 연구자들을 통해 이러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가능해질 수 있었다.
또 다른 줄기로 부연해보면, 종교심리학의 연구에서 종교의 실증적인 핵심으로 정의되는 것은 바로 '느낌'이다. 종교생활이란 종교체험을 위한 것이며, 그것은 느낌으로 접근되는 존재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에서 지향하는 것은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순수하게 자신에게 경험되는 느낌을 체험할 수 있는가의 그 문제다. 다양한 종교들의 수행론은 대개 우리가 사회적 가치, 윤리, 언어 등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느낌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분명하다.
우리가 실존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은 결국 느낌이며, 실존은 느낌 그 자체다. 느낌 그 자체로 드러나있는 존재 그 자체의 감각이다.
'느낌 그 자체'라는 표현을 '있는 그대로의 느낌'이라고 이해하면, 우리가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는 한층 더 선명해진다. 놀랍게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생각하는 대로 느끼려 한다. 생각에 느낌을 끼워맞추려는 것이다. 그러니 느낌의 순수성은 늘 오염된다.
우리가 흔히 감정(정서; emotion)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순수한 느낌이 환원되거나 편향된 결과다. 쉽게 말해, 느낌이 지성의 통제를 거치게 된 후에 만들어진 것이 감정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장발장은 공동체를 위해서도 윤리적으로 사니까 좋은 인물이다.'라는 지성적 판단이 이제 다음의 감정을 만들어내고 견인한다. '어머, 장발장 너무 불쌍해. 자베르 경감 못된 놈.' 그리고 이 감정적 에너지를 연료삼아 장발장의 신격화와 자베르의 악마화를 현실로 실현하려는 행위들은 추동되며 가속된다. 분열과 대립의 현실, 곧 정치화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로 공고히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이처럼 언제나 정치적이다. 편향된다는 것은 지지하는 편이 있다는 것이며, 감정은 자신이 지지하는 편을 향해 맹목적으로 움직인다. 왜? 그렇게 움직이라고 거의 세뇌의 차원에서 지성이 명령했기 때문이다. 자동매크로와도 같다. 그러니 감정을 따라 살면 우리는 늘 갈등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분열과 대립으로 삶이 더 힘들어진다. 당위적이고 불가피한 명령에 따라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전쟁터에서 늘 싸워야 하는 병사의 입장이 정확하게 이러할 것이다.
느낌 그 자체,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느낌의 성질은 이 대립과 분열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다. 실존주의의 특성과도 같다. 정치적인 방향성을 지향한 실존주의는 몰락했고, 자신의 근원이 종교성을 향한 지향, 곧 존재에의 탐구였음을 기억하고 있던 실존주의만이 그 생명력을 지속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생명력이 정말로 어떻게 가장 건강한 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는지를 그 자체로 증거했다.
현대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심리학자 중 하나인 슈나이더는 인간의 건강성을 '경외감'이라고 하는 것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짓는다. 경외감은 루돌프 오토가 묘사한 것처럼, 인간 자신을 넘어서 있는 것을 향해 인간이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고 순수하게 경험하는 근원적 느낌이다. 오토는 이를 곧 종교적 느낌이라고 말한다. 이 순수한 근원적 느낌으로부터 종교라고 하는 것은 시작되었다고.
슈나이더는 이를 받아, 현대의 심리치료에서도 내담자들이 그 자신의 건강성을 가장 확보하게 되는 경우는, 내담자로부터 이 경외감이 회복되었을 때라고 강조한다. 곧, 내담자들이 자신의 생각과 그 생각이 만들어낸 감정에 빠져 고통받고 있을 때, 순수한 근원의 느낌이 그것들로부터 내담자를 치유해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경외감은 치유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인간을 이끈다. 슈나이더는 경외감에 근거한 실존상담을 통해 개인들의 인생이 전적으로 변화된 무수한 사례들을 소개하며, 그들은 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영감이 넘치며 자유로운 생기로 아름답게 창조해가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보고한다.
흔히 심리치료의 격언으로 "존재 그 자체가 치유한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우리는 이제 이를 다시 표현해 "느낌 그 자체가 치유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다시 알려져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할 것은 분명 이 '느낌'이다.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것이며, 곧 종교적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초월해있는 것과 인간이 지금 마주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 실제적 감각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느낌이란 인간과 존재의 만남을 의미한다. 존재의 탐구자로서 존재를 만나고자 하는 인간과, 그러한 인간을 만나고자 적극적으로 자신을 개방하고 있는 존재와의, 드디어 성사된 그 위대한 만남이 느낌이라고 하는 실재로 지금 우리에게 드러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느낌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 정도의 신성한 의미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느껴본다면, 인간의 실존은 매순간이 이러한 경외의 순간들이다. 순수한 근원적 느낌이라는 것은 근원과 연결되어 있기에 경험되는 감각이다. 그러나 그러한 근원적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이 실존의 상황이, 모든 방식으로 이미 존재 그 자체라고 하는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곧, 우리가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초월적인 것이고, 이미 종교적인 것이며, 그렇게 우리는 결코 이 우주에서 소외된 먼지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존재와 그 길을 함께하는 존재의 탐구자로서, 또 반대로 말해 언제나 우리가 가는 길에 존재가 함께하는 존재의 동반자로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순수한 느낌이 바로 그렇다는 사실을 알려온다. 인간이여, 그대는 참으로 온전하다고. 실존은 이 온전한 느낌 그 자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