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억합니다"
곱고 아름다운 마음이 있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고, 영상도 만드는 인간의 마음.
기억하려고 하는 마음.
설령 그것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하더라도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계속 살아있게 하고픈 마음. 자신이 좋아했던 그 모든 것의 영원을 꿈꾸는 마음.
자신이 열심히 힘을 내어 기억하지 못하면 그것들이 영영 사라질까봐, 더 잘 그려야 하고, 더 잘 써야 한다고, 조바심도 내고 속상하기도 했던 마음.
이것은 아주 곱고 아름답지만 아직 신비가 되지 못했다.
신비는 내가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글의 주인공이 말을 걸어온다. 자신의 상처와 눈물을 정성스러운 문장들로 보듬어준 바로 나를 기억한다고.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사진 속 달님이 말을 걸어온다. 그 맑은 눈을 반짝이며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울 것으로 자신을 바라봐준 바로 나를 기억한다고. 결코 잊을 수 없을 거라고.
그림 속 아기고양이가 말을 걸어온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작고 희미한 자신을 단 한 호흡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굳게 지켜주고 있던 바로 나를 기억한다고.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고.
돌연히 내 자신이 살아온 그 모든 풍경이 떠올려진다. 잊을 수 없는 것들. 기쁘고 반가운 것들. 결국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했던 것들.
그리고 그렇게 알려지던 모든 풍경 속에는 바로 나도 있었다. 언제나 나도 있었다. 잊히지 말아야 하고, 늘 영원하기를 바랐던 그것들 중에는 반드시 내가 있었다.
풍경 속의 모든 것을 바라보던 그 시선에 의해 나 역시도 똑같이 바라봐지고 있던 것이다. 그것은 풍경 속의 소중했던 모든 것이 나에게 전하던 시선. 가장 잊히지 말라고, 너무나 소중하다고, 그 모든 것이 그렇게 나를 기억해주고 있던 것이다.
기억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억의 신비다.
우리 자신이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순간은, 실은 기억되고 있던 순간이다.
이에 대한 재미있는 실증적 예가 있다. 우리는 왜 꿈을 3인칭으로 꾸는가? 우리 자신이 1인칭 저장매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도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기억되고 싶어서, 그리도 열심히 기억하려는 척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직하게는 기억되는 일이야말로 감동이다.
주인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떠난 반려동물이 마중을 나온다는 그 애기를 우리는 왜 그렇게 좋아하는가? 거기에는 우리 자신이 기억되고 있었다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잊히지 않고 기억되고 싶어서, 우리는 SNS의 이웃들도 늘리고, 튀는 옷도 입고, 몸매 관리도 하고, 인플루언서가 되고, 방송을 하며, 일확천금도 꿈꾼다. 또 잊히지 않고 기억되고 싶어서, 혐오도 하고, 증오도 하고, 편가르기와 마녀사냥도 한다. 가장 매몰차게 대한 우리의 적이야말로 가장 우리를 기억해줄 것 같아서.
그러나 신비는 말을 건네온다.
그것은 당신의 삶 속에서 당신이 사랑했던 것들에게 하던 말이 아니라, 당신의 삶 속에서 당신을 사랑했던 것들이 하던 말이다.
"당신을 기억합니다."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영원히 기억하고 싶을 만큼.
이것은 당신이 정녕 어떤 존재인가를 알리고 있던 기억의 신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