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을 바라보는 자"
누구에게나 심연이 있다. 보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 실은 아주 많이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을 때면 심연의 풍경들이 우리에게로 흘러들어온다. 그러면 우리는 서둘러 일상의 번잡함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거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에 우리의 의식을 돌리려고 애쓰곤 한다.
심연이 불편하게 경험되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림들이 반복적으로 떠올라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심연은 이처럼 곧잘 우리 자신이 거부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어떤 심상으로 다가오곤 한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자신에게 그러한 심상들이 자꾸만 찾아오는 것일까.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이 감각이 핵심이다. 심연은 이해가 가지 않기에, 곧 우리의 앎 너머에 있기에 심연이다.
우리가 앎의 인식작용으로 만들어낸 총체를 세계라고 부른다. 그래서 세계는 아무리 커도 그 세계를 만들어낸 개인의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개인마다 자신의 세계가 있으며, 개인의 크기가 곧 세계의 크기다.
그리고 심연은 언제나 그러한 세계 밖에 있으며, 필연적으로 세계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이 인식으로 만들어낸 세계를 안전한 항구적 울타리처럼 간주하던 시절에는 그래서 세계 밖의 심연은 종종 인지를 초월한 위협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코즈믹 호러는 심연에 대한 이 두려움을 묘사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더 가깝게는 프로이트가 주장한 무의식에 대한 반응이 이와 같을 것이다. 무의식은 분명 심연의 성질을 갖는다. 그것은 개인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개인에게로 침투해들어와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수의 이들은 무의식을 두려움의 소재로 여기곤 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시소 위에서 추락하지 않도록 현실적 균형을 잡으며 살아야 함을 주장했고, 융은 아예 무의식의 영토를 정복하여 개인을 무의식의 왕으로 앉히려 했다. 다 두려움이 만들어낸 방향성이다.
우리는 조금 다른 뱡향성을 얘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먼저 세계라고 하는 것의 허구성을 파악함으로써 시작된다. 실존주의자들은 이 방식에 아주 능숙했다. 보편적 진리와 같은 세계개념을 그들은 먼저 붕괴시켰다. 세계라는 것은 그저 가상의 안전을 위해 개인이 인식으로 만들어낸 임의적인 발명품일 뿐이다. 그렇게 개인이 세계라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 이전에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모르고 우리가 던져진 삶, 불가해한 이 삶이.
실존주의자들에게 삶이라는 것이 심연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는 것을 눈치채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들이 세계를 무너뜨리고자 한 이유도 분명해진다. 실존주의자들은 스스로 만든 감옥[세계]에 갇혀 있던 이들이 감옥의 벽을 부수고 나와 더 거대한 자신의 삶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세계의 특성이 임의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한때의 인식이 세계라고 하는 고정불변의 틀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 이는 성립 자체로 오류를 내포한다. 항시 변화하며 흐르는 인간의 삶에서는 언제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기 때문이다.
과거의 인식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현재의 경험을 그 낡은 기준에 끼워맞추려 하는 일은 나아가 현재에 대한 폭력이 된다. 고통이 있는 것은 폭력이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자신의 세계를 고정불변의 것처럼 지속하려는 이가 늘 스스로에게 폭력을 저지르게 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그러니 그것이 원래 임의적인 성질의 것이라는 차원에서도 그러하고, 결국에는 폭력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차원에서는 더욱이나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붕괴될 운명이다.
우리에게 심연이 자꾸만 감지된다는 것은, 세계가 이미 우리에게 몹시 괴로운 감옥이 되었다는 뜻이며, 동시에 우리가 이제 그 감옥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낡고 유아적인 감옥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이만이 심연을 경험한다. 심연이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감옥 밖을 자유로이 꿈꾸던 우리의 소망으로 심연은 불려온 것이다.
심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던 그 심상의 풍경은 세계 밖의 풍경, 세계가 있기 이전에 먼저 우리의 것이었던 삶의 풍경이다. 원래 우리의 터전이었던 그곳의 풍경이다.
그러니 심연을 맞이한 우리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원래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자신다움'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개인이 이 본래적인 자기성을 회복한 모습을 가리킨다. 심연이 일관되게 가리키고 있던 그 모습이다. 이처럼 심연의 임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서 현인들은 얘기하곤 했다. 어떤 이를 정말로 이해하려면, 그에게서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측면, 곧 그의 심연에 다가가야 한다고. 그의 심연에 접촉했으면, 그가 정말로 누구인지 그 참된 모습에 접촉한 것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쉬이 이해되는 측면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은 것을, 또 가장 핵심적인 것을 말해준다.
"나는 늘 왜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걸까?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남들처럼 하려면 할 수 있으면서, 왜 이 지랄 중인지 나도 나를 정말 이해못하겠다."
이것은 지금 굴복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시사한다.
그는 지금 참되게 그 자신이고 싶은 것이며,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이 일에 어떤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용기있는 이들을 위하여, 이들이 가져야 할 유용한 탐구의 자세를 안내한 바 있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여, 심연도 그대를 들여다보고 있음이라."
도무지 자신에게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세간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 부정적인 판단을 이루고 있다면, 세계의 모범적 기준을 들이대고 있다면, 그 모든 평가를 다 철수시키고 그저 응시만 하는 것이다. 억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심연이라는 사실만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돌연히 심연의 시선이 경험된다.
심연을 바라보고 있던 자신을, 심연이 바라보고 있던 그 시선이.
그리고 그러한 심연의 시선을 빌려 이제 개인은 그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그 전까지의 자신의 인식을 한참이나 초월해있는 심연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방식으로.
마침내 세계는 초월되었다. 개인의 면모는 초월한 것 그 자신으로 드러날 것이다. 심연의 시선이 반드시 그 현실을 개방해낸다. 그가 얼마든지 그렇게 살아도 되는 그 자신의 온전한 현실을. 아무도 그 삶의 궤적을 막지 않는다. 그 자신이 세계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막고 있었기에, 외적으로도 장애는 경험되었던 것이다. 고집스럽고 유치한 우리가 언제나 우리 자신의 감옥이었을 따름이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 자신이 있다는 것, 그것도 우리의 인식 및 세계 밖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미지의 우리 자신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놀랍고 경이로운 위상의 본래적인 우리 자신이라는 것. 이 사실을 향해 움직여가는 것이 곧 신비로의 여행이다. 우리의 심연은 일상적으로도 아주 확연하게 드러나있는 그 여행처다. 자신이 가장 거부하고 부정하던 그 심연의 그림이 실은 가장 자신다운 현실로 우리를 이끌어준다는 이 역설은 신비로운 사실이다. 요컨대 심연의 신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