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여행자 #15

"사막의 인간"

by 깨닫는마음씨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신비다.


상황으로만 보면 불가능해보이는 그 일들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쳐놓은 무수한 경계의 철조망들과, 자기를 포장하기 위해 세워둔 그 모든 위선과 거짓말들의 벽을 넘어 한 인간이 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은, 아마도 우주의 창세 이래 우리가 지금 우리 자신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그 확률과도 유사할 것이다.


오늘날 다 자기가 특별한 힙스터인 척하고, 자기만의 놀라운 재능과 개성을 가진 척하며, 그러면서도 프로필에는 꼭 자신의 MBTI 유형을 써놓곤 하는, 이 고도로 유치한 시대에서는 특히나 인간에 대한 이해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가 인간에 대해 알고 있다는 착각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자신의 조악한 다름의 가치를 주장하며 선포하고 있는 이들은, 자신이 자신에 대해 좀 알고 있다는 이 착각의 태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 태도가 그대로 타인에 대한 태도가 된다. 자신을 그렇게 '뻔히' 알고 있다고 간주하는 만큼, 타인에 대해서도 뻔해지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오며 겪은 빈약한 몇몇의 경험들이 이 태도를 지지해주는 근거가 된다. 실은 경험부족이면서, 자기의 세계가 특별하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보니, 흡사 자신이 삶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한 것처럼 자기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짓의 권위로 이제 쉽사리 타인들을 재단하거나, 인생스승이라도 된 양 훈수질을 시작한다.


자기가 일국의 왕이라도 된 것처럼 쉬이 행세할 수 있는 자영업자들에게서 자주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한데, 오늘날 쁘띠 백X원이 그리도 많아진 이유일 것이다. 자화자찬의 바이럴을 통해 조금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싶으면, 저마다 자신이 얼마나 시스템을 잘 짜고 독창적인 브랜딩능력이 있는지를 뽐내기에 바쁘며, 결국에는 컨설팅이라는 이름의 도사연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게임의 시스템을 파악해서 성장에 효율적인 테크 트리를 탄 뒤, 그러한 자신의 성공에 도취된 고인물이 이제 뉴비에게 그 성공을 자랑하며 뉴비도 자신과 똑같이 성장시켜주겠다고 하는 모습과도 유사하다. 멀린 놀이, 간달프 놀이이며, 평강공주 놀이이자, 신사임당 놀이다. 결국에는 자신이 다른 이를 제일 잘 양육하는 부모처럼 행위하려고 하는 막장의 소꿉놀이다.


이것이 막장인 이유는, 여기에 위치한 인간은 더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삶을 게임 같은 것으로 간주해서 모든 것이 다 모범적인 정답처럼 정해진 메뉴얼을 따라 행위해왔으며, 이제는 다른 이에게도 그 메뉴얼을 열심히 전수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게임으로 쳐도 이미 한참을 불감증의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뻔하고, 실은 암담하게 지루하다.


지루하니까 남들에게 부모놀이, 스승놀이, 컨설턴트놀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하지 않으면 지루함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래 자신의 인생이 막혔을 때, 남을 키운다고 하는 일에 그리도 열중한다.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또 실은 지루한 자신에게 도파민을 공급하기 위해 하고 있을 뿐이면서, 마치 남을 위한 순수한 진심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이에 따라 가식적인 연극도 자주 펼쳐진다.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아냐며, 정말로 네가 잘 되기만을 바라고 있다며. 자기가 말하고는 자기가 눈물지으며 도취되는 이러한 연극에 빠지는 이유도 물론 그 인생이 심대하게 지루해서다.


이 일은 왜 막장인가?


여기에는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실종되었다.


메뉴얼[각본; 성공신화의 내러티브]에 따르는 역할만 있을 뿐, 인간은 이 게임 속에는 없다. 자신도 인간이 아니고, 남들도 인간이 아니다. 그저 언제라도 대체될 배역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는 아무리 끈끈하고 의리있으며 속정깊은 관계의 양상을 연출한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돈이라고 하는 성공의 기준이 그들을 갈라놓을 것이다. 이 성공신화의 게임에서는 성공에 대한 징표가 없다면 게임이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래 이것이 게임의 규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인물들은 자신의 성공이 휘청거려 주변에서 사람들이 떠나가게 될 때 갑자기 휴머니즘의 대변자가 되기 일쑤다. 자신은 진심을 다해 인간적으로 사람들을 대했는데 결국에는 돈만 밝히며 자기를 이용하려 했다는 둥, 세상이 원래 다 이렇게 씁쓸한 것이냐는 둥, 혼자 또 특별한 비극의 주인공이 된 영화를 찍는다. 그러면서 최종의 대사를 발화한다.


"이제 좀 알겠다. 많이 배웠네. 인간 다 뻔한 거구나."


알기는 뭘 아나.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른다.


그 시작부터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인간에 대한 착각의 정답을 갖고 들어가, 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도 뻔한 동어반복의 현실일 뿐이다. 자기는 남들보다 좀 나은 이런 사람이고, 남들은 자기보다 좀 못한 그런 사람이다. 이 자폐적 정답만이 이 게임 속 현실의 알파와 오메가다.


인간이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것은, 어디에도 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또 사회계급적으로 그 위치를 바꾼다고 해서 어딘가로 간 것이 아니다. 오대양 칠대륙을 다 돌아도 자신이 자신의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면, 늘 똑같은 제자리에 불과하다.


자신이 특별한 주인공이라고 간주하는 믿음은 실은 인간이 두렵기 때문에 생겨났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불가해해서 두려웠기 때문에, 인간을 일부러 추상적인 개념이자 피상적인 유형론으로 바꾸어놓은 뒤, 즉 게임 속 NPC인 것처럼 취급한 뒤, 그것과 변별되는 주체적 인물로서 자신을 변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안전할 것이라 믿으며.


이 삶을 게임처럼 인식하려 한 이유도 동일하다. 실은 삶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서 두려웠기에, 삶이 마치 게임이고 그에 대한 성공적 메뉴얼이 있는 것 같은 가상현실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두려움을 해소하려 한 것이다.


그렇게 두려움에 싸여 애써 인간을 무시하면서 살아온 자신의 삶이 뻔한 것이지, 인간의 삶이 뻔한 것이 아니다.


두려워서 특별함을 추구하던 이 습성은 실은 아주 전형적인 유아의 것이다. 자기가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또는 공동체 내의 다른 유아들보다 특별한 개체로 양육자에게 인식되어야만 성공적인 생존이 담보될 수 있다고 믿던, 진실로 미숙했던 시절의 유산이다. 이 유산을 보물인 줄 알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추구하고 있다면, 우리의 정신상태는 늘 동일한 아동기에 머물게 되는 셈이다. 뻔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지루하지 않기가 오히려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이 유아적 태도는 다시 한 번 도파민의 기제를 발달시키게 되는데 그것은 곧 경쟁에의 의지다. 다른 유아들과 경쟁하던 그 태도가, 지루함을 느끼면서도 게임을 붙잡고 있는 상태와 똑같이, 다만 짧은 승리의 쾌감을 위해 경쟁의 의지를 지속하려는 태도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정직하게는 더는 이것은 생존의 문제도 아니다. 지루함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미 생존의 문제는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저 지루하니 시비를 걸고 싸우려 하는 것이다.


몸만 큰 유아적 정신의 대표적인 특징이 이러하다. 엄마가 돌봐주지 않으면 자기 혼자 뭘 할 수 없는 모습처럼, 지루함에 대해서도 혼자서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남들이 자기에게 제자가 되어주거나 또는 싸움상대가 되어주어야만 자신의 지루함을 비로소 처리할 수 있게 되는 무척이나 의존적인 상태를 드러낸다.


그래서 이것이 막장이라는 것이다.


온갖 유려한 사회적 용어로 포장한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발화되는 모든 표현은 본질적으로 "응애응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의 이 사회에는 피로감이 넘쳐나는 것이다. 뭘 해도 만족하지 않고 끝없이 울기만 하는 정신적 영유아들을 상대해야 하는 고초가 도처에 만연해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미성숙의 주체들은 오히려 자신을 성숙한 현자라고 간주하며, 다른 미숙한 아이들을 자기가 돌보고 있는 입장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짙다. 이 착각의 파훼는 쉽다. 누가 의존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하면 된다. 다른 이들을 미숙한 아동으로 보며 그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결코 그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실은 그가 의존하고 있는 아동이다.


이 정신적 유아의 상태에서 볼 때 결국 세상에는 크게 두 유형밖에는 없다. 양육자이거나, 피양육자다. 특별한 개성과 재능을 가진 이일수록 더 유능한 양육자의 입장을 얻게 된다고 가정되며, 나머지는 무능력한 피양육자다. 이렇게 인간에게 적용될 가장 저질스러운 기준이 출현한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또 능력이 있어 성공했거나 능력이 없어 실패했거나.


그렇다면 대체 여기에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인간은 없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실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부재한 인간을 찾으러 나선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라는 표현을 우리는 조금 수정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먼저 신비다.


이것은 인간을 이해하고자, 처음으로 인간을 발견하러 나선 길. 신비로의 여행길의 초입이다. 우리가 이 여행을 시도하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다. 유아적 정신 속에서 늘 뱅뱅 도는 제자리걸음만을 반복해왔다. 그렇게 자폐적인 미로 속에는 인간이 정말로 부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우리는 정말 많은 시간을 써야 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이제 최초의 인간이 출현할 자리는 확정되어 있다.


인간이 없던 곳에 최초의 인간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제일 처음 만나게 될 인간의 모습은 반드시 우리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인간으로서 발견하게 되고, 그러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가게 된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신비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중이다.


말하건대, 우리는 지금 사막으로 나선 와중이다. 메뉴얼에 기재될 아무런 가치도 없기에, 메뉴얼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 영토 바깥으로.


사막에도 반드시 인간이 있다. 인간을 발견하고자 사막을 향했던 우리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부재하던 사막이기에 오히려 인간이 발견되던 역설은 이렇게 성립된다.


유아적 정신이 두려워한 인간은 바로 이 사막의 인간이다.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생긴다면 자기의 인생은 막장이 될 것이라고 유아적 정신은 두려워했으며, 그 두려움을 봉쇄한 결과 실제적인 막장에 이르렀다. 끔찍하도록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정신적 사막의 현실에, 가장 피하려 한 것에 가장 정확히 도착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는 사막 같은 곳에는 인간이 있으면 안된다며, 사막에 인간이 있는 현실을 두려워했고, 그 결과로 인간이 없는 사막에 떨어지게 되었다. 가도가도 변하지 않는 황량한 풍경 속에서 영원한 지루함만을 그의 운명으로 삼았다.


결국 그가 두려워한 것은, 요람의 바깥에서 자신의 다리로 걷는 인간, 바로 자신의 가능성이다.


이 우주의 창세 이래로, 직립보행을 하는 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출현할 수 있었던 그 기적의 가능성. 자신이 이미 그런 엄청난 가능성의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자 했다. 요람의 왕으로 남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고 열렬하게 신앙하고 있던 까닭일 것이다. 참된 사실이 가상의 믿음에 의해 밀려났다. 인간은 우리로부터 어떻게 실종되었는가에 대한 또 다른 대답이다.


그러나 언제나 또 사막으로 나서는 인간도 있었다.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 사막을 건너려는 인간 그 자신의 모습이.


인간의 실증적인 역사는 인간이 인간을 찾아 사막을 횡단하던 그 몸짓의 총체다.


인간이 사막으로 나선 것은 반드시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에 대한 신뢰였고, 신뢰의 근거는 바로 그렇게 사막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던 자기 자신의 면모였다. 깜깜한 밤중에 빛을 찾아 등불을 들고 걷는 그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가 만나고자 했던 그 어둠 속의 빛인 일과도 같을 것이다.


사막의 인간은, 인간을 가장 그리워하던 인간. 가장 발견하고 싶어하던 인간. 그 사실이 그를 무엇보다 인간이며, 가장 인간으로 드러나게 한다. 인간은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그 의도 속에서 인간이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신비를 향할 때야 드러나는 신비의 존재방식이다.


우리를 서로에게서 가로막고 있는 벽 너머에는 사막이 있다. 거기에는 사막의 인간이 있다. 벌써 나가 있다. 우리를 서로에게서 이해되도록 하는 그 신비의 일을 모험하기 위해, 그는 사막의 인간인 것이며, 곧 우리 자신인 것이다. 그렇게 사막에서도 인간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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