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여행자 #16

"벽 앞에서"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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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를 여행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벽에 가로막힌다. 이것은 고전적으로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불려왔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욥이나 요나의 삽화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위협하는 것 같은 어떤 장애나 위기가 출현해 이에 대처하고자 더 성실하게 열심히 해보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상황은 더욱 나빠지기만 하는 것 같은 경험이 이에 해당된다. 이런 경험 속에 빠지면 정말 미치도록 죽을 맛이다. 온 우주가 자신을 억까하는 것만 같고, 어떻게든 자신의 파멸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만이 악귀들처럼 사방에 들끓고 있는 것 같다.


이 과정은 신비의 여행자들에게는 반드시 경험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배워야 할 무척 중요한 사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이 상태 속으로 들어가야만 실감할 수 있으며, 정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 핵심은 이러할 것이다.


그냥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다 무(無)가 되었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화도 내고, 저항하며, 악과 깡으로 버텨보기도 했겠지만, 이제는 다 의미없다. 그냥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싶다.


너무나 지쳐버린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지친 것일까?


자신과 싸우느라.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소중하던 것들이 무너져내리고 잃어져가는 속에서, 그것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증오했고 나약함을 혐오했다. 그 빛나던 원형을 잃고 허망한 먼지처럼 사라져가는 것들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비참한 한심함을.


그래서 끝내 자신이 먼지처럼 사라지려 한 것이다.


이 자기비난이 낳은 자기투쟁의 결과는 결국 자기포기다.


거대한 장벽 앞에서 지독히도 절망하게 된 그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의 장벽이 아니다.


"내가 지켜내야 한다."


이 말이 우리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장벽이 된 것이다.


이 말에 지배되고 있는 이는 실제로 꽉 막힌 벽과 같다. 주변의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완벽한 불통이다. 시야도 좁아지고,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 늘 비효율적인 노력만을 한다. 애쓰고 또 애쓰지만 결과는 처참하다. 그렇게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까닭에 그 성질은 늘 예민해서 누구에게든 화낼 준비만을 하고 사는 사람 같으며, 늘 주위를 위태로운 긴장상태로 몰아간다.


붓다는 이러한 장벽의 상태에 대해 말한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상태가 이러했다. 잘 알려진 겨자씨의 예화다. 어미는 세상을 다 돌아다니며 죽은 아이를 살리기를 원했고, 결국 붓다 앞에 도착한다. 붓다는 그녀에게 겨자씨 하나를 가져오면 그녀의 아이를 살려줄 수 있다고 말했고, 그러나 그 겨자씨는 죽음과 상실을 경험하지 않은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전보다 더 열심히 세상 모든 곳을 돌아다니며 겨자씨를 청했지만 결국 구할 수가 없었다. 죽음과 상실을 경험하지 않은 곳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붓다에게로 다시 돌아온 그녀는 아마도 이해했을 것이다.


죽음과 상실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의 무능력 때문도 아니었고, 그녀의 무책임 때문도 아니었으며, 그녀의 부족함 때문도 아니었고, 그녀의 나약함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운명이 그런 것이었을 뿐이라고 피상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에 달려있지 않은 삶의 작용들에 대해, 우리 자신을 비난하고, 저주하며, 증오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그녀의 아이보다 지금 더 가엾은 존재다.


이 우주에서 가장 지독하게 부정된 존재, 그녀가 지금 그러했을 것이다.


빅터 프랭클이라면 그가 진행했던 유사한 상담의 경우처럼, 그녀에게 물었을 수도 있다.


"당신이 만약 당신의 아이라면, 자신의 엄마가 스스로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며 가장 가혹하게 저주하고 있는 그 모습을 어떻게 보게 될까요?"


우리는 붓다만큼 자비롭지도, 프랭클만큼 현명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더 단순하게 물어보자.


이미 잃어서 아픈 그 가슴에 매질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장벽 앞에서, 영혼의 어두운 밤 속에서 배워야 했던 것은 이런 것이리라.


라인홀드 니버도 자신의 배움을 기도문에 담았다. 잘 알려진 그 기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소서."


삶이라고 하는 신비의 여행을 떠난 이들은 누구나, 결국에는 정직하게 아파하는 법에 관해 배워간다. 그 아픔이 마침내 가르쳐준다.


자신이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던 그것이 지켜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가장 지켜져야 할 것은, 자신이 지키지 못했다며 가슴아파하는 지금의 이 인간이다.


가장 용서받게 될 이 또한, 아파할 줄 아는 가슴을 가진 바로 이 인간이다.


"밟아라. 밟히는 나보다 밟는 네 마음이 가장 아플텐데."


우리는 『침묵』에서 이 소리를 듣는다.


지독히도 인간을 괴롭히던 장벽이 허물어지는 소리를 우리가 들었다면, 그것은 그의 눈물이 한 일이다. 거기에는 자비와 관용, 용서와 화해, 이해와 사랑의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다. 오롯하게 스스로를 향한.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 전부를 향한 것.


오늘도 또 자신이 잘못했다며, 자신이 다 망친 것이라며, 지켜내지 못했다고, 구하지 못했다고, 거대한 칠흑의 장벽을 주위로 둘러친 채 자기 안의 지옥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우리의 보편적 운명을 향한 것이다.


허물어지라고.


인간을 향한 가장 지독한 저주들아, 녹아내리라고.


삶이라고 하는 신비의 여행을 떠난 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벽을 만나, 이렇게 눈물로 흘렀던 것이다.


그것은 좌절이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벽을 허무는 신비의 방법이기에.


무(無)가 아니다. 인간의 눈물이 있기에 우주는 살아있는 것이다. 생생(生生)하게 다시 살려진다. 먼지로부터 숨을 얻어 생명이 된다. 무기물의 벽을 넘어 살아있는 것이 된다.


인간은 잃어졌는가? 아니다. 여기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우리 자신으로서.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때, 우리가 잃었다고 생각한 것들 또한 우리 안에 함께 존재한다. 장벽에 막혀버린 그것을 우리가 눈물로 흐르게 해 우리의 가슴속으로 구해왔기 때문에.


다시 만나야 신비고, 늘 함께해야 신비다. 벽을 넘어.


그래서 우리는 아픔 속에서도 또 살아가는 것이다. 신비의 여행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서, 그것이 되어, 그것과 함께. 내가 웃을 때, 내 안의 그것이 함께 웃는다. 그 웃음을 또 보고 싶어서, 그 웃음 앞에서 우리는 삶이라고 하는 신비를 계속 여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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