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여행자 #17

"눈과 손 사이에서"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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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이제는 우리의 밖에서 원자폭탄이 터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원자폭탄으로 길거리를 걸어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도 도저히 자신 안에 있는 화의 압력을 견딜 수가 없어서다. 그러니 가상의 적이라도 만들어 어딘가로 토해내야만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상황이 이러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챈 장사꾼들은 갈라치기와 분열의 사업을 시작했다. 음모론으로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서로를 싸우게 만드는 콘텐츠를 만들면 기가 막히게 장사가 잘 될 것이라는 그들의 사업적 판단은 분명 선견지명이었다. 오늘날 정치라는 것이 실은 콘텐츠 장사인 이유다.


무기상인들은 전쟁이 끝나지 않는 현실을 좋아할 것이다. 이러한 음모론의 장사꾼들 또한 그러하다. 인간의 화가 사라지지 않는 현실을 그들은 원하며, 계속해서 시비거리를 발굴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땔감을 공급한다.


사회정치적 권력은 인류사의 어느 순간에도 성(性)이라는 것을 억압한 적이 없이 오히려 그것을 담론화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조장해왔다는 푸코의 통찰은 아주 훌륭한데, 그것은 화의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사람들이 여러 이야기[담론]들로 분열되어 대립하고 투쟁하는 동안, 그 모든 운동에너지는 권력의 중추를 향해 수렴되어 그 지속을 위해 아주 유용하게 축적되어가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권력에 집착하던 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면 남들을 계속 '가상의 이야기'로 싸우게 만들면 된다는 사실을. 아주 일상적인 사례로, 가정 내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고 싶은 엄마가 그 자녀들에게 아빠를 적으로 삼는 이야기를 계속 보급하고자 하는 그 일과도 같다. 그렇게 아빠와 자녀들이 대립하는 동안, 엄마는 그 둘을 중재하고 통합하는 가장 선한 권력자가 되는 일에 성공한다. 남성 권위자에 대한 적개심을 자동반응처럼 드러내며 자기 엄마를 천사로 기억하는 이들의 많은 경우는, 이러한 가스라이팅의 결과로 종종 밝혀지곤 한다.


요는 이와 같은 방식이 화로 가득한 지금의 시대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악재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화내야 할 때 화내지 못해서 힘든 것이 아니라, 화가 너무 많아서 힘들다. 이미 불길이 한참 성대한 곳에 더욱 기름을 들이부으니, 화는 쉽사리 사그라들 줄을 모른다.


화, 우리는 어떻든 그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을 지배하는 화의 양상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화는 눈과 손 사이에서 일어난다.


눈은 높은 것을 본다. 오늘날에는 더 많은 높은 것들이 눈에 자주 들어온다. 눈은 그렇게 높이 있는 것들에 아주 익숙해지고 또 길들여졌다. 결국 자기가 보고 있는 그 높은 것들이 자기가 응당 살아야 할 자리라고 간주하게 된다. 이런 높은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알아볼 수 있는 자신의 눈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손은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다. 자신이 눈으로 보고 있는 높은 것들을 직접 만들지도 못할 뿐더러, 거기에 이를 수 있는 사다리나 동아줄조차 만들지를 못한다. 그래서 손이 늘 짚고 있는 것은 가장 낮은 위치에 존재하는 흙이다. 높은 것들에 도달하지 못하는 좌절감에 자신이 짚고 있는 이 미천한 땅바닥이 영원한 자신의 운명일 것만 같다. 결국 이런 형편없는 최악의 운명에밖에 닿지 못하는 자신의 손이 저주스럽다.


바로 이 눈과 손의 커다란 괴리감 속에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 화다. 오늘날 대표적인 화의 양상이다.


이를 아주 통속적으로, 능력은 없으면서 눈만 높아져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일은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여전히 능력주의의 신화만을 지지하게 될 뿐이다. 능력주의란 결국 무엇인가?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자신의 손으로 이루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눈의 당위성에 대한 도전도 없으며, 손의 의의에 대한 다른 방향성의 탐구도 없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눈과 손이 어떤 방식으로 남용되고 또 오용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눈에 대해서다. 우리는 어떤 것을 볼 때,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고 있는 주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마치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능동적인 선택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우리가 보고 있던 그 높은 것들은, 일종의 광고였다. 즉, 조작된 꿈이었다.


우리는 가상의 꿈을 보고 있었던 것일뿐만 아니라, 그 꿈 자체도 특정한 의도에 봉사하는 조작으로 점철된 꿈이었던 것이다. 의도라고 한다면 분명하다. 상품의 구매다. 어떠한 가상의 이야기를 꿈상품으로 만들어 이득을 얻게 되는 장사꾼들이 있었을 것이고, 우리의 눈은 그 장사꾼들이 끝없이 우리 앞에 들이대는 그림에 착취되었던 것이다. 실은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보기를 원하는대로 우리는 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에 따라 또 손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가?


삽질만을 거듭했다. 장사꾼들이 우리에게 제공한 그 가상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며, 수직의 절벽을 억지로 기어올라가고자 우리의 손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손톱은 다 뽑히고, 손가락은 너덜너덜해져, 우리 자신의 코를 파기에도 더는 여의치 않아진 어떤 퇴락한 물체만이 오히려 짐덩이처럼 우리에게 남겨졌으며, 그로 인한 무능력감도 더욱 심화되었을 것이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못난 존재라는.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쉽사리 믿기 어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그 높은 것들이 정말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냐고, 우리는 반문하고 싶어한다.


아니다. 그것은 이미 실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도 그렇게나 잘 보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놀라운 사기가 있다. 가상의 이야기인데 어떻게 실제가 될 수 있었는가?


우리의 손이 이룬 그 무수한 삽질이 에너지를 낳아, 그 가상의 이야기를 실제로 전환시켜준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가상의 이야기가 이제 실제처럼 된 그 높은 것들의 낙원 위에서 장사꾼들은 행복해하는 중이다.


결국 그 이야기들 자체가 처음부터 진짜였던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낚여 삽질을 시작한 우리의 힘을 통해 그 장사꾼들이 정말로 그런 현실에서 살게 되는 기적을 우리가 이루어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눈과 손이 남용되고 또 오용되어온 그 방식이다.


오늘날 우리의 화가 심대했던 이유도 많은 부분 이에 기인할 것이다. 우리의 눈과 손 사이의 거리를 더욱 벌려서, 장사꾼들 자신을 위한 양분으로 쓰고자 했던 그 악질적 의도에 우리가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지독하게 착취되어 왔기에, 우리는 화가 많이 났던 것이다.


차라리 눈을 감고, 이 손으로 코나 후비는 것이 나았을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나았다.


손은 사실 코를 후비는 일에 특화된 기관이다. 얼마나 부드럽게 코 안을 훑으며 막힌 데를 시원하게 뚫어주는가. 비단 코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손을 써서 이루어낸 일들의 공통점을 떠올려보자.


막힌 모든 현실을 뚫어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손이 갖고 있던 거룩한 힘이다.


곧, 손은 소통의 기관이다. 불통의 현실을 소통의 현실로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기관. 비유적으로 우리는 '손을 잡는다'고도 표현하고, '손이 닿는다'고도 표현한다. 감동이란 무엇인가? (손이) 터치된 것이다. 막힌 벽을 뚫고 손이 닿아서 우리는 감동받는다. 감동은 소통의 결과다.


그러나 손이 눈에 종속되어 있을 때, 눈의 도구가 되어있기만 할 때, 거기에서는 오히려 불통의 현실만 생겨난다. 답은 정해져있다. 열심히 삽질만 하면 된다. 이러한 일방적인 폭력성이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먼저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손을 지배하고 있던 눈도 우리 자신의 필요 내지 소망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장사꾼들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그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이야기를 따르고 있던, 즉 남의 명령을 따르고 있던 눈의 명령에 우리의 손은 착취되고 있던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살아가는 이 일이 그렇게도 우리에게 봉쇄되어 있어, 결국 우리는 그치지 않는 화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눈과 손은 애초 우열이 있는 주종의 관계가 아니다. 그 둘은 동시에 함께 움직인다. 눈과 손이 일치할 때 생겨나는 것이 창조다. 실현이라고도 말한다. 또 이렇게 사는 이를 가리켜, 그 자신으로 사는 이, 또는 자신의 삶을 사는 이라고도 말한다.


눈은 크고 좋은 것들을 보고 있는데, 손은 그것들을 얻지 못해 무능력감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남의 삶을 대신 살고 있다. 남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착취 속에 몰아넣고 있는 중이다.


선(禪)에서는 눈과 손이 일치한 현실에 대해 자주 묘사한다. 그것은 우리가 매순간 완성을 이루는 일상의 신비다. 이를테면, 자신이 목이 마르다는 사실을 본 이가 있다. 그리고 바로 손으로 냇물을 떠서 들이킨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지체도 장애도 없다. 그러니 결핍과 불만도 없다. 그 순간 가장 온전하게 완성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현실이 즉시 창조된 것이며 실현된 것이다.


우리의 손에는 언제나 직접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지금 이 순간 이룰 수 있는 힘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온전함의 신비를 지지하는 사실이다. 확인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으며, 모두가 알 수 있다. 이 일치성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과 손을 점점 더 신뢰하게 될 것이며, 자신이 무능력하고 못난 존재라는 착각은 더는 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필요할 때 우리에게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한 자신이 뿌듯해질 것이다.


우리 자신을 정말로 가능한 존재로 이해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결국 우리의 화의 문제와 연관될 것이다. 원자폭탄은 원자폭탄 정도가 있어야 이 모든 것이 해결가능하다는 망상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실제적인 우리의 필요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코를 파는 정도의, 막힌 것을 소통하려는 자연스러운 의도만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저 높은 것들을 향해 앙망하던 그 모든 몸짓을 멈추고, 그저 막혀서 답답한 자신의 코를 손으로 후비고 있으면, 자신의 우주가 바뀐다고 하는 일은 신비다. 농담같겠지만 신비란 원래 가장 위대한 농담이다. 우리는 결코 닿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에서, 적어도 우리 자신만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하는 일이 가능한 그 현실에 닿을 수 있는 존재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인간의 손이 이 모습으로 만들어진 그 의미의 회복이며, 이제 우리의 손에 본래의 기능이 다시 돌아왔다.


얼마나 많은 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신비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신비다. 우리의 눈도, 우리의 손도, 우리 자신에게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신비의 기관이며, 소통을 위해 기능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진정 좋은 현실을 향해 계속해서 흐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주 작은 흐름이라도 회복된다면, 결국에는 막힌 것이 다 뚫릴 것이다. 코를 후벼본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 이렇게 시원하게 숨을 쉬며 살아도 된다니, 그것은 태초의 인간이 경험한 감동이었고, 인간의 손이 열어간 신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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