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필요해"
친구를 사귀는 일에 있어 우리 대부분이 어려움을 경험한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자신은 그렇지 않고 사람과 쉽게 친해질 줄 안다고 말하는 이들일수록 유독 풍요 속의 빈곤을 경험하는 것은 왜일까. 아무리 주변에 우호적인 관계가 많다 하더라도 참된 의미로서의 친구라는 것은 부재하는 것만 같다.
우리가 그것을 친구라고 오해하거나, 또는 친구를 대체하기 위해 소비하고 있던 여러 관계의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은 어린 시절의 동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발달의 시간을 공유한 것이다.
또 동창이나 동기라는 것이 있다. 이는 동일한 공동체, 곧 공간을 공유한 것이다.
동료라는 개념도 있다. 이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역할을 분담하는 구조를 공유하는 것이다.
동지라는 개념은 동료와 유사한 듯하면서 조금 다르다. 이 관계양식의 핵심은 동일한 이념의 공유다. 그리고 그 이념의 공유로 말미암아 역할의 경계까지도 넘어서는 어떤 유대감의 획득을 핵심적인 가치로 둔다.
동반자? 이것은 상기한 개념들을 다 포함하면서, 이것 하나만 얻으면 친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다 얻는다고 가정된 만능열쇠 같은 것이다. 곧, 유니콘과 유사한 환상의 소재다.
꼭 이러한 이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날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무수한 활동들은 실은 친구를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집행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만큼 친구를 사귀고 싶은 갈망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며, 동시에 바로 그러한 까닭에 우리가 결국 친구를 사귀지 못하게 되는 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를테면, 오늘날 유행하는 대표적인 콘텐츠의 하나로 멘토링이나 컨설팅의 경우를 유효하게 살펴볼 수 있다.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하는 이들이 왜 다른 이들의 멘토나 컨설턴트가 되어 성을 내고 그 속을 썩혀가면서까지도 그러한 활동에 과도하게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일까? 절박한 목마름은 컨설팅을 받는 이가 아니라 오히려 컨설팅을 하는 그 주체에게서 더욱 감지된다. 컨설팅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커다란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이것은 아마도 친구에의 필요일 것이다. 너무나 친구를 사귀고 싶다. 바쁘게 살아 경제적 여유도 생겼으니 이제는 친교라는 것도 나누어보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사귀는지를 모르겠다. 그래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상대에게 유용한 인물이 되면, 상대를 도울 수 있는 힘과 자원을 갖추면, 또 상대에게 선한 영향력으로 행사될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면, 친구라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 때문에 스승, 선생, 요가지도자, 컨설턴트, 상담사, 변호사, 셰프, 요식업전문가, 심리학강사 등의 모습으로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자신이 상대를 위해 무척 도움이 되는 전문적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으니, 자신과 친구가 되어달라며.
이처럼 결국 사람들 앞에 돈자랑을 하는 이는 돈으로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며, 지식자랑, 몸자랑을 하는 이들도 각기 그 소재들로 친구를 획득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입장은 정확하게 마트의 매대에 올려진 상품이 되고, 우리가 친구로 삼으려 했던 그 대상은 소비자가 된다. 편의점에 진열되어 있는 칸초가 어느 날 손님에게 말을 거는 상황과 같다. 자기가 옆에 있는 홈런볼이나 초코송이보다 더 맛있게 잘해줄테니 자신과 친구가 되어달라며.
어떤 때는 상품이 소비자를 호되게 꾸짖기도 할 것이다. 진정한 것을 알아보는 눈을 아직 못갖추었다며, 옆에 있는 다른 깡통햄들보다 자기가 돼지고기 함량이 95%로 가장 우수한데, 왜 푼돈을 아끼려고 진정한 상품을 선택하지 않냐면서, 또 그런 가짜들로 요리를 하면 먹는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면서 아주 역정을 낼 것이다. 그런 식으로 햄 고를 거면 다 때려치라고.
그리고 시무룩하게 풀이 죽어있는 소비자에게 이 진정한 깡통햄은 이제 슬며시 다가가 약을 발라주며 말을 건넨다. 그러니 자신을 친구로 삼으면 이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완벽히 해결될 것이라고.
친구가 너무나 고픈데, 어떻게 사귀어야 할지를 몰라 나오게 되는 이 모든 몸짓은 그래서 무척이나 촌스럽고 투박하다.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이 많고 사회적 권위도 있는 자기 생각대로 다 되어야 한다며 실은 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는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 만약 그러한 방식으로 부하와, 제자와, 내담자와, 유사자녀와, 꼬붕을 얻는 일에는 성공했다고 한들, 그는 과연 그 상황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상대들은 그를 그저, 그가 보이고자 하던 모습 그대로, 상사와, 스승과, 상담자와, 유사부모와, 오야붕으로 보기만 할 뿐인데, 그는 자신이 친구를 얻은 것이라고 정말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으며,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멘토링이니 컨설팅이니 강연이니 개인방송이니 하는 것들을 도무지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혹시라도 오늘은 인생의 참된 동반자를 영화처럼 만날 수 있을까 늘 나이트클럽을 찾는 중독의 상태와도 같다.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기대하기에, 결핍의 갈증만 더욱 심해지며, 그 갈증으로 인한 중독행위만 한층 더 강해지는 부정적 피드백에 빠져드는 것이다.
반복. 우리는 반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혹자는 반복하다보면 차이가 만들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바위에 계속 계란을 던지다보면 언젠가는 바위가 깨질 것이라는 말과 똑같은 것이다.
같은 곳만을 계속 반복해서 돌고 있다보면 우리는 엄청나게 외롭고 쓸쓸해질 것이다. 그래서 이 길을 같이 걸어줄 친구를 소망하게 된 것이겠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의 오해가 있다. 첫 번째는, 친구는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기능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이 반복의 상황이 애초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망의 형태만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친구의 정의다.
친구란 무엇인가?
같은 길을 걷는 자다.
동료처럼 동일한 목적을 향해 역할을 분담해 걷는다는 의미도 아니고, 동지처럼 동일한 이념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하나의 길을 남다른 유대의식으로 함께 걷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를테면, 동쪽에 있던 누군가가 저 샛별의 반짝임을 보고 걷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서쪽에 있던 다른 누군가도 그 자신의 위치에서 샛별의 빛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면, 그들은 친구다. 심지어 그들이 서로 완전히 다른 시공간에 속한다 하더라도 그 꽃의 향기가 그리워 꽃을 향해 여행하고 있다면, 그들은 친구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니체와 하이데거를 친구로 경험하고,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를 친구로 경험한다. 그 친구들의 책을 읽으며 그들은 친구의 정보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보았던 그 별빛을 친구의 눈동자 속에서도 함께 발견하는 것이며, 자신이 저 깊은 밤하늘 아래 울었던 순간 자신의 친구도 울고 있었다는 그 공통의 시선을 만나는 것이다.
다시 표현해보자.
동감자(同感者)라고.
친구란 동무도, 동창도, 동기도, 동료도, 동지도, 또 동반자도 아니다.
친구는 동감자다. 그것이 같은 길을 걷는다는 의미다. 길이란 흐르는 것. 동감은 같이 그 느낌이 흐르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같이 느낌이 흐르는 그 자리가 곧 길이 된다. 그러한 길 위에서 우리는 우리가 결코 혼자이지 않음을 이해한다. 그리고 또한 자신이 가는 그 길에 대한 신뢰도 한층 더 깊어진다.
길을 가야만, 그 길을 같이 가는 친구도 발견될 수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친구를 만나는 일이 그토록 어려웠던 이유는 우리가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품매대 위에서 이리저리 진열위치를 바꾸어갈 뿐인 반복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복이 결핍을 낳으며, 결핍은 다시금 반복을 정당화한다. 그렇게 길은 끊어졌던 것이다. 반대로, 반복을 끊는다면 이제 그것이 길이다. 붓다와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이 어떻게 반복을 끊고 길로 다시 나서는가의 이 문제를 대표적으로 다루어왔다. 누구보다도 인류가 겪는 어려움에 동감하고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곧, 그들은 인류의 친구가 되고자 했다.
우리 자신이 반복 속에서 둔감해져 있을 때, 같은 길을 가는 이가 그 동감된 느낌을 깨워줌으로써 우리가 반복에서 벗어나는 일을 도와준다면, 그는 분명한 우리의 친구일 것이다. 귀하디 귀한 참된 친구다.
참된 친구는 우리와 다른 어느 것도 공유할 필요가 없다. 성격이나 여타의 다른 조건들이 우리와 같거나 또는 다르다는 이유로 그는 우리의 친구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공유하는 참된 것은 이 길뿐이다. 같은 길을 걷고 있기에 그는 친구다.
그것은 말하자면, 신비로의 여행길.
우리가 길을 간다는 것은, 느낌이 흐른다는 것이며, 모든 느낌은 언제나 반드시 '나'를 향해 흐른다. 그 궁극의 신비를 향해.
우리가 우리 자신임을 잊게 만드는 그 모든 반복의 망각에서 벗어나, 내가 내 자신이 되어가는 길로 나서고, 그가 또한 그 자신이 되어가는 길로 나설 때, 그 길은 실은 같은 길. 우리는 신비를 향해 흐르는 이 길을 함께 가고 있는 신비의 친구다. 친구가 있어 이 길이 한층 더 든든하고 그 발걸음이 경쾌하다. 경쾌하니 세 줄도 아닌 한 줄 요약이다.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이만이 그 자신이 되고자 하는 참된 친구를 만나게 된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친구를 만나고 싶어 이 삶의 여행을 떠나왔던 것인지 모른다. 함께 '나'라는 것을 향하고 있는 그 동감을 누리고자, 또 서로를 끝내 그것으로 알아보며 감동하고자. 우리에게는 그런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