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천성 성숙장애"
지금 이 시대가 너무나 유치한 시대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 50년 전의 과거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둘 다 인간이 그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고 있던 원시시대보다도 유치하다.
인간의 존재론적 성숙도를 평정하는 기준은 지성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지성에 근거해 구성되는 윤리도 아니고, 시민의식이나 정치적 경향성 따위는 가장 아니다.
자신에게 펼쳐지는 삶을 자신이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오직 그 책임성의 문제가 인간의 성숙도를 결정한다. 실존주의자들은 다 이 얘기를 하지만, 니체에게는 이 사실이 한층 더 분명했다. 그는 당대에도 자국의 독일인들이 얼마나 유치한지를 폭로하고자 했다. 누구나 다 세련된 문화인인 척, 교양있는 척, 윤리적인 척, 시민의식이 투철한 척하지만, 실은 다 남이 만든 시스템 속에서 남의 말만을 따라 사는 까닭에,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스스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미성숙한 아동의 상태에 불과함을 니체는 말하려 했던 것이다.
위버멘쉬[초극인]의 개념은 그래서 태어났다. 그것은 시스템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그 중심에서 자기가 이세계로 간 어떤 유능하고 잘난 초월자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가 주인공이고 나머지는 엑스트라인 양 간주하는 유치한 아동들에게 붙이라고 만들어진 이름은 아니다. 정확히 그 반대다. 바로 그렇게 미성숙하게 살고 있는 그 막장인간의 상태를 초극하자고 제안된 개념이다. 곧, 인간을 막장으로 퇴행시키곤 하는 시스템을 초극하려는 이가 위버멘쉬다.
시스템이 인간을 유치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신이 현재 그렇게 미성숙한 상태인 줄도 모르게 만드는 것이 시스템이다. 인간에게 병을 주며 그 병을 숨기기까지 한다. 그러면 병이 나을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그러니 시스템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병을 갖고 있는 것이다. 정신병의 출현이다.
인간의 정신은 왜 이토록 쇠약해졌는가! 쇠약해졌기에 결국 병이 들고 말았다! 이러한 식으로 말한다면, 늘 니체가 말했던 방식의 그 향기가 조금 스민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범람하는 유치함은 분명 병이라는 것이다. 아직 그것을 호명하는 이름이 없을 뿐이다.
<후천성 성숙장애>
대충 이런 이름이면 직관적이다. '발달'과 '성숙'의 개념은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발달은 외적으로 펼쳐지는 방향성으로 곧잘 드러나고, 성숙은 내적으로 깊어지는 방향성을 갖는다. 그러니 우리가 인간의 존재론적 완성도 내지 온전성을 말하고자 할 때 적용되는 지표는 발달이 아닌 성숙이다.
발달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도 장애이지만, 성숙이 가로막히는 것 또한 엄연한 장애다. 병은 거기에 지금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장애가 있음을 알리는 것이며, 그 알림에 따라 자신이 병들어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자각해야 우리는 건강을 회복할수 있다. 그런 즉, 다시 강조하지만, 이 시대를 지배하는 유치함은 분명한 병이며, 그것은 회복을 요하는 것이다.
병의 원인은 명백하다. 거의 모든 인간이 당연하다는 듯이 의존하고 있는 시스템이 인간의 유치함을 발병시킨 원인이다.
시스템의 본질적인 이름은 바로 '관계'다. 관계에 의존하면서 살고 있는 동안, 인간에게 있어 유치함의 발병은 필연이다.
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은 마치 엄마 말만 잘 듣고 있으면 모든 일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다 잘 풀릴 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는 정신적 유아의 상태와도 같다. 이러한 정신적 유아가 유치하지 않기란 오히려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은 관계만능설에 대한 믿음은 일종의 신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구체적인 이름은 공정성의 신화다.
우리가 갖는 대표적인 환상의 내용은 관계라는 것은 공정해야 하고, 곧 시스템이라는 것은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 성립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관계는 기능적으로 파편화된 역할을 기반으로 성립되며, 시스템 또한 그러하다. 나아가 더 많은 이를 향해 작동하는 관계 및 시스템이 되려면 이 파편화는 더욱 심화된다. 개인은 고유성을 잃고 부분적인 파편으로 환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최소의 교집합에 따른 호혜가 더 많은 이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스템은 애초 개인을 돌보지 않는다. 개인이 경험하는 부당함은 시스템이 특별하게 개인 각각의 사정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한 시스템은 의도될 수도 없고, 실현될 수도 없다. 이처럼 시스템이 성립되기 위해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요소는 공정성이다. 공정한 시스템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것이다.
시스템에 공정함이라는 것이 담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는, 시스템이 그 안에 있는 인간을 피상적으로 표준화시키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한 표준적 역할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시스템이 자기에게 부당한 상황을 경험하지 않게 해주리라고 기대되는 것이다. 착한 아이 역할을 잘 수행하기만 하면 엄마가 늘 사랑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그리고 바로 이 표준화에의 압박 자체가 이미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불공정한 폭력이다.
관계 및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의존인지도 모른 채 매몰되어 있는 이들은, 시스템의 이러한 성질을 띠게 된다. 그 자신도 동일한 폭력성을 드러낸다. 시스템과 관계의 논리에 길들여진 자신의 인식틀을 불변의 정답이라고 가정하며, 자신의 인식을 초월해있는 것들을 자꾸만 자기의 조악한 틀 속에 집어넣으려는 폭력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게 폭력인 줄 자각하지를 못한다. 자기는 대단히 선량하고 올바르게 살고 있는 줄 안다.
나아가, 더욱더 관계 및 시스템에 침전되어 일종의 고인물이 되어 있는 이들은, 이제 자기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에게까지 스승질, 선생질, 훈계질 등을 시작하게 된다. 자신은 흡사 시스템 학급의 반장 같은 충실한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있으니, 남들도 시스템의 노예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기에게 익숙한 그 노예화의 방법론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그게 마치 남들을 위한 선의의 일인 것처럼 착각하며.
이것이 바로 유치함이라는 병의 실제적인 증세다.
우물처럼 작은 시스템의 스펙트럼으로 하늘과 같은 인간의 깊이를 멋대로 재단하고 환원하려 드는 이 일은, 미성숙한 아동이 유치원에서 배운 지식으로 오히려 성숙한 이를 가르치려고 하는 몹시나 조악하고 유치한 그 일 자체에 다름아니다.
이 시대에 이 <후천성 성숙장애>의 모습은 얼마나 많이 창궐하고 있는가?
다들 유튜브 유치원과 인스타 보육원에서 뭔가를 배운다. 고기를 수비드로 조리해야 좋고, 약배전으로 로스팅한 원두가 좋은 원두고, 몰트위스키가 늘 블렌디드위스키보다 좋은 술이라는 둥, 조금만 해당분야의 전문성을 갖고 있는 이들이 들으면 가당치도 않고 터무니없는 얘기들을 자랑처럼 늘어놓는다.
나아가 그러한 수준낮은 지식을 갖고 있는 자신을 대단한 전문지식의 소유자라고 착각하기도 하며, 심지어 이를테면 위스키바에 가서 블렌디드위스키를 추천받으면 자신이 무슨 다 알고 있는 도사라도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카발란 같은 싱글몰트를 달라고 말하곤 한다. 어떤 연예인이 카발란을 추천하는 쇼츠를 본 뒤에 주문하는 것이면서, 자기가 무슨 위스키 전문가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리는 것은 대체 왜인가.
예전에는 무식하니 용감하다는 말이라도 쓸 수 있었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이제는 자기가 대단한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행패를 부린다. 그러나 그 지식의 수준이란 이미 수천만 명이 알고 있는 너무나 진부하고 평범한 내용에 불과하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살고 있으니, 자기가 인터넷으로 얻은 정보가 특별함의 소재처럼 착각되는 것뿐이다.
자기가 대단히 평범한 정보의 창구에서 얻어낸 그 흔한 정보지식을 왜 남들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주 쉽게 말해서, 정말로 눈앞의 인간을 안보고 있기 때문에 이 일들은 생겨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미성숙이다. 끝내 우리가 유치함의 병에 걸리는 이유다. 눈앞의 인간을 보지 않으니, 그 인간의 역량과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자기 혼자만 잘났다고 착각하는 이 모습은, 엄마에게 의존해 있는 아동의 상태와 전적으로 동일하다. 관계 및 시스템에 매몰되어 있으면 우리는 결국 이러한 자폐적 아동의 모습이 된다.
관계는 무엇보다 상대적인 것이다. 상대적인 역할로 구성되는 것이 관계다. 그러니 관계 속에서는 우리는 인간을 NPC 같은 상대로만 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대상적 도구일 뿐이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순간, 곧 신비의 순간이란, 인간을 만나게 되었을 때며, 그 인간을 정말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다.
'상대'를 '절대'로 바꾸는 것이 그래서 신비의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관계'를 '실존'으로 바꾸는 것이다.
눈앞의 인간을 그 자신만의 아주 고유한 삶을 가진, 절대적으로 실존하는 존재로 보게 된다면, 그것은 신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숙이다. 인간은 인간을 '상대'가 아닌 '절대'로 볼 수 있게 됨에 따라 성숙해지는 것이다.
모든 시스템은 상대적이며, 모든 관계는 상대적이다. 시스템 및 관계를 초극한다는 것은 이 상대성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존재의 절대성을 포착한다는 것이며, 그 절대성의 지평을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병든 막장인간의 상태가 극복되며, 우리는 건강성을 회복한다. 표현 그대로, 인간성의 회복이다.
관계 및 시스템에 의해 파편적 역할로 전락되어, 구차하고 비루한 도구[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이, 그 인간성 소외의 현실로부터 돌아온 것이다. 자신은 수준낮은 그 모든 표준적 기준의 어떤 양상도 초월해있는 인간이라고. 규정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며, 가장 온전한 존재라고. 자신은 바로 그렇게 대체불가능한 온전성의 존재로서, 곧 자기 자신으로서 살다 죽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이것이 책임성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삶과 죽음을 오롯하게 스스로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도 의존하지 않으며,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 그 운명을.
모든 인간에게는 그를 위한 단 하나의 운명만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자신이 되어야 할 운명이다. 다른 말로는 이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운명과 자유가 실은 같은 것인 이유다.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이, 곧 실존하는 이, 니체라면 당연히 이것을 가장 성숙한 인간, 위버멘쉬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의 도달했다.
자기 자신으로 살지 않을 때 우리는 병에 걸리며 유치해진다. 그러면서 남들도 그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끔 그 병을 전염시키려고 하게 된다.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성공하는지, 관계의 주인공이 되는 법은 무엇인지 등을 설파하는 스승질, 선생질, 도사질을 통해, 이 시대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실은 자기의 병을 남들에게 옮기고자 그 역할들을 그렇게도 열렬히 수행하고 있는지.
<후천성 성숙장애>는 분명한 전염병이다.
계란후라이 하나를 부쳐놓고 엄마에게 칭찬받기를 앙망하는 아이의 모습처럼, 별 것 아닌 것들로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 양 거들먹거리고, 나아가 남들에게 계란후라이 만드는 법을 훈수두고 있다면, 심지어 "아아, 이것은 계란후라이라는 것이다."라며 마치 자기 빼고는 다 계란후라이라는 수준높은 것을 처음 먹어보는 사람들처럼 대하고 있다면, 이것이 그 전형적인 증세다.
<선천성 신비성향>의 인간은 원래 가만 놓아두어도 신비를 지향하게 되어 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된 아주 큰 이유가 바로 이 유치함의 질병 때문이라는 사실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두어도 성숙해져가게 될 인간이, 스스로를 자폐적 행동양식 속에 결박한 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어떻게든 미성숙한 아동으로 남고자 하는 그 일을 원래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자신이 자신에게 자행하는 일들은 자신만이 멈출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선택이다.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태도가 그대로 타인에 대한 태도가 되며,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신비일 것인가, 유치할 것인가, 적어도 이것이 선택이라는 것만 이해하더라도 우리는 벌써 성숙함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