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라고 하는 말"
이런 글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세상 모든 말은 다 자신에게 들리라고 하는 말이다. 행위도 말이다. 세상 모든 행위도 자신에게 들리라고 하는 말이다.
남들에게 늘 "병신, 병신."이라고 말하며 사는 이가 있다. 그는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실은 자기 자신을 병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존재가 거부당한 어떤 아픔의 존재방식이 분명 거기에 있다. 그 존재방식을 알아보고 만나고자 그는 계속 "병신, 병신."이라고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병신인 자신을, 그 아픔을 정말로 이해하고 싶어서.
남들에게 늘 거칠고 무식하게 행위하는 이가 있다. 무례할 정도로 자기 기준을 강요하며, 하나의 장면을 꼭 자기가 제압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을 늘 그렇게 폭력적으로 대하며 사는 이다. 어쩌면 그 거친 방식은 그가 긴 시간 동안 그의 양육자나 사회적 애착대상에게서 받아온 그 방식일 수도 있다. 그는 그가 대해진 그 폭력적 방식대로 이제 남들을 대하고 있다. 그의 내면에 바로 그러한 폭력성이, 그리고 그 폭력성에 의해 깊이 상처받은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계속 그 행위를 반복한다. 자신에게 그 사실이 만나질 때까지.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똑같다. 자신이 듣기 위해서다. 자신에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다.
말은 흩어진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는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버린다. 그래서 글을 쓴다. 글이라는 그물로 어떻게든 말의 형상을 모아보려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대부분의 말들은 그물 사이로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나 글로 남은 말들을 통해서나마 우리는 자신에게 대체 어떤 말이 들려지고 있던 것인지를 가늠해보곤 하는 것이다.
심리상담에서는 상담자의 도움을 받아, 함께 그 말을 잡아보려는 활동을 한다. 캐치볼을 하듯이 말을 주고 받는 가운데, 내담자 자신에게 어떤 말이 계속 들리고 있었는지의 그 형상은 한층 분명해진다. 상담이 성공적으로 종료될 때란 이런 때다. 내담자가 그의 내면에 있던 말을 분명하게 듣게 되고 마주하게 된 그 순간, 상담은 그 임무를 다한다.
'내 안에 이런 것이 있었구나.'
제대로 자신에게 들리게 된 말이란 반드시 '이런 것'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이런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눈물.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 자신에게 간절히 들리기를 바라던 그 모든 말은 다 눈물이 된다.
우리를 울게 하는 말, 바로 그런 말들만이 매순간 우리를 계속 찾아와 우리 자신에게 들리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인간의 모든 표현양식에는 다 이 눈물이 담겨 있다.
인간의 삶은 통째로 다 인간의 눈물이 빚어낸 것이다.
비가 내려와 새싹을 키우고 꽃을 피우듯이, 인간이 그 자신의 삶에서 풍요의 행복을 꽃피울 수 있게 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오직 눈물 덕분이다.
자신을 울릴 수 있다면, 그의 인생은 성공적이다.
자신의 삶이 괜찮은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이처럼 명백하다. 이 사실을 이해한 이는 이제 외적인 평가나 가상현실의 신기루에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
어떤 이가 쓰는 글이 먼저 그 자신을 울리면서 글로 나오게 되었다면, 그런 글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글을 쓴 이는 충만하다. 남들이 그 글을 어떻게 평할지, 대외적으로 그 글이 얼마나 많은 인기와 권위를 얻을 수 있을지 등은 이제 그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자신을 울리는 글을 쓴 것만으로, 그렇게 자신이 들어야 할 그 내면의 말을 듣게 된 것만으로 그는 위대하고도 온전한 완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글뿐이겠는가?
우리의 모든 삶이, 그 모든 표현양식이 이러한 완성의 감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에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압도적인 행복과 감사로 늘 넘쳐날 것이다.
자신을 울린다는 표현은 여러 형태로 바꾸어 묘사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을 가르치고, 스스로 자신을 키우며, 스스로 자신을 배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완전하게 동일한 의미로 또 다음의 표현을 갖는다. 스스로 자신에게 배우고, 스스로 자신에게 돌보아지며, 스스로 자신에게 인정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행위의 주체와 객체가 따로 없다. 그래서 다만 스스로일 뿐이다. 행위 자체도 그 운동이 분리되지 않는다. 행하는 것과 행해지는 것이 스스로 동일하다.
그래서 말하는 일은 듣는 일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듣기 위해 말하며, 말하기 위해 듣는다.
자신이, 자신을.
이 모든 것이 다 자신이 자신에게 하던 일이다, 이 감각으로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을 한번 되돌아보자.
그때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게 될, 이제 막 활짝 열린 의식의 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떤 섬광 같은 것이 바로 신비다.
신비로의 여행길, 그것은 자신의 말을 들으러 떠나는 여행.
떠나는 것은 동시에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우리 자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온다. 우리가 밖으로 내보낸 말들이, 우리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이정표가 되어, 이제 문을 두드린다. 문이 활짝 열리고, 아주 반갑고 따듯하게 쏟아져 나오는 빛이 있으니, 그것을 신비라고 하리라.
내가 돌아왔다.
눈물은 그 그리움만큼 준비되어 있던 것. 내 자신의 모든 삶은 나를 그리워하던 눈물이었던 것. 그래서 펼쳐졌던 것. 인간이 펼쳐낸 그 모든 표현양식은 전부 다 나를 부르고 있던 노래들. 나에게 들리라고 하던 간절한 말들.
그래서 내가 돌아온 것이다.
영원한 그 신비의 이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