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서가 너무 많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하는 일들이 있다.
인간의 삶을 이용하기 위해 하는 일들이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언제나 이 '이해'와 '이용'의 두 범주 중 하나일 것이다.
마르틴 부버에게 이는 '나-너 관계'와 '나-그것 관계'로 묘사되며, 에리히 프롬에게서는 '존재양식'과 '소유양식'으로 말해진다. 하이데거에게는 '동사적인 것'과 '명사적인 것'의 구분이 그러하고, 실존주의 심리학자들에게는 '모험'과 '화석화'의 작용이 그러하다.
이 고전적인 구분들을 더욱 쉽게 표현하자면, 이해란 '설명서 없이 마주하는 방식'이며, 이용이란 '모든 것을 설명서로 대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실은 이용의 방식 또한 이미 이해를 전제해야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치챌 수 있다. 어떠한 이해가 먼저 출현해 있었기에 그 이해에 따른 설명서라는 것도 만들어질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해'와 '이용'은 정당한 대조군이 아닐 것이다. '이용'은 그저 '이해'의 하위분과다. 그러나 '이용'이 '이해'의 하위분과이기를 거부하고 맞먹으려 들 때, 나아가 오히려 '이해'보다 상위의 작용인 척할 때 문제는 생겨난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설명서도 잘 안 읽으려는 경향성으로 일어난다. 설명서라도 잘 읽는다면 이해를 할 수 있을텐데, 그런 최소한의 과정도 없이 그냥 이용만 하려는 것이다.
더 심화된 저항은, 즉 '이용'이 '이해'보다 우위에 서려는 운동은, 설명서를 불변의 진리처럼 권력화하려는 모습으로 곧잘 드러나곤 한다.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분명 고정된 설명서가 있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이해란 계속 탐구되며, 그만큼 계속 변화되어가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인간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인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러니 설명서란 언제나 아주 임의적인 것일 수밖에 없으며, 늘 교체될 채비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얻어낸 자신의 이득을 지속하려는 이들은 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부하고자 한다. 그들은 설명서를 억지로 고정된 것으로 만든다. 설명서의 진리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제 그 설명서를 불변의 진리처럼 남용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모조리 거기에 다 끼워맞추어 판정하려고 든다.
이미 그 설명서가 쓰였을 당시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한참이나 깊고 커졌을 것이다. 그렇게 더 깊고 크게 드러나있는 것을, 더 얕고 작은 것 안에 강제로 꾸겨넣으려고 하는 모종의 압력이, 설명서를 진리화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는 작동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을 잘 알려진 표현으로 억압의 폭력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억압의 고통을 발생시키는 설명서들이 너무나 많다. 지나치게 많다. 그 설명서들은 저마다 자기를 진리화해, 인간에게 어떻게 하면 똑똑하고 착하게 사는지 그 길을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길로 따지면 교통신호와 표지판이 너무 많은 것이며, 운전으로 치면 자기들을 F1 드라이버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우리가 운전하는 차의 좌석을 꽉 채운 채 저마다 진정한 운전법을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장기판에 훈수꾼들이 웨이팅까지 걸어가며 대기 중이고, 미디어에서는 몇 초마다 바뀌는 얼굴들이 다들 자기가 알려주는 길로 가야 성공할 수 있다며 우리를 미혹한다.
우리의 피로감은 그 때문일 것이다. 설명서가 너무 많아서 몹시 피곤하다. 어쩌면 설명서를 잘 읽지 않게 된 이유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방향성을 철저히 봉쇄한 채, 다만 인간을 이용하려고만 드는 그 설명서들의 광적인 의지에 지쳐 우리는 최소한의 이해를 위한 시간마저 포기했던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설명서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설명서의 내용은 다 똑같다. 그래서 우리를 몹시 질리게 한다.
이를테면, 왼쪽으로 가라고 되어 있는 설명서를 따라가면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착하게 살아." 또 오른쪽으로 가라고 되어 있는 설명서를 따라갔더니 그 끝에서 우리는 이러한 말을 발견한다. "착하게 살아."
저마다 다 다양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 모든 설명서는 이처럼 다 하나의 내용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설명서들의 실제적인 하나의 이름은 무엇이었겠는가?
윤리.
이 이름이 지금의 시대를 지배한다.
설명서들의 광기가 지배하는 시대, 즉 윤리에 미친 시대 속에 우리는 놓여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며 이용하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 윤리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뭘 그렇게 하라는 게 많은지, 또 하지 말라는 게 많은지, 이 시대에 윤리를 통해 인간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강도는 인류가 경험해온 그 어느 시대보다도 드세다. 그만큼 인간을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논병아리 새끼처럼 취급하는 인식도 짙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자화상이 거의 텔레토비처럼 그려지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심지어는 개인들 자신이 스스로를 향한 이 억압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까지 한다. 매일 방구석에서 유튜브나 남의 SNS를 보다가 결국 자신의 능력부족을 비난하고 신세를 한탄하며 써내게 되는 것은 또 하나의 설명서다. 자신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그 무수한 설명서들의 사태에 더해, 이제는 자기가 자기를 압박하는 설명서를 친히 집필하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억압하는 설명서의 제작에 능한 이들을 요즘은 작가라고 부르는 풍조도 생긴 듯 싶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중세의 고문관들도 인간의 신체를 억압해 무슨 전위예술처럼 기괴한 형상의 사물로 뒤바꾸어놓던 '작품활동'을 했으니, 그 후계자들이 자신들을 작가라고 자임하는 일쯤이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진심으로 피해야 할 인물들은 MMPI에서 반사회성 수치가 높은 이들이 아니라, 윤리를 주장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들이 윤리를 주장하는 태도를 보면, 거의 자신이 신이다. 최소 신의 대행자다. 진리화된 윤리를 절대적인 권위로 삼아, 타인을 심판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으며, 심지어 그것을 자신의 정당한 권리 내지 보편적 정의의 실현이라고 간주하며 정서적으로 도취되기까지 한다. 도파민을 위한 '윤리마약'인 셈이다. 이와 같은 모습이 우리가 익히 말해오던 사이코패스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보들레르는, 악마 최고의 계략은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이 계략은 승승장구 중이다. 우리는 윤리의 빛으로 악마를 물리쳤다고 생각하며, 윤리가 있는 곳에 악마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렇게 그 자신이 윤리로 둔갑하고자 한 악마의 계략은 정말 천재적이었다.
악은 실재하는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 신학적인 토론이나 철학적인 논증보다는, 심리학적 실용을 가져올 것이다. 인간이 정신적으로 병들도록 가해지는 억압이 있다면, 그 억압이 바로 실제적인 악이다.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며 단지 이용만 하려는 의도가 인간에 대한 억압을 낳는다. 악이 된다.
오늘날 악은 "착하게 살아."라는 하나의 윤리적 말씀으로 선포되며, 이를 위한 무수한 행동원칙들을 담은 설명서들로 조직화된다. 그 설명서들은 인간을 탐구하는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탐구의 길을 가장 차단한다.
인간이라는 신비로 향하는 길을 가장 막는 것을 악이라고 다시 정의한다면, 이 정의 또한 고전적이면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그러니 신비로 향하는 길은, 그 길을 가로막는 악을 넘어서 가는 길이고, 곧 윤리를 넘어서 가는 길이다. 선악의 초월, 이것이 또한 신비를 정의하던 고전적이면서도 여전히 유효한 방식이다.
이 세상에 선악을 초월해,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닌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를테면, 장미는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고양이는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은행나무는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우리가 그것들을 우리의 이득에 따라 '이용'하려고 획책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판정을 내릴 수 없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대답은 판정을 초월한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장미는 그냥 장미 자신이고, 고양이는 그냥 고양이 자신이며, 은행나무도 그냥 은행나무 자신이다.
이 세상에 선악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어떤 악으로도 상하지 않고, 어떤 윤리로도 억압될 수 없는 것. 그것들보다 한참을 높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 자신이다.
인간은 설명서에 따라 인간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에 대한 그 모든 설명서를 초월해 존재하며, 설명서 없이도 인간으로 존재한다. 더욱 인간이다.
이처럼 인간이 인간에 관해 쓰인 그 무수한 설명서들보다 한참을 앞서, 설명서들과 아무 상관없이, 이미 인간 그 자신으로 먼저 존재한다는 그 존재의 사실을 실존주의자들은 신비라고 불렀다.
설명서가 있어야 우리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길을 잃고 그 자리에 붙박힌 화석처럼 굳어지게 하려는 악마의 계략에 빠진 중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리가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며, 그러한 인간의 상황과 그 심정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자리가 즉시 환한 길로서 드러나게 된다.
언제나 인간이 인간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그 탐구의 의도가 곧 길인 것이며, 이것이 신비로의 여행길이다. 그 많은 설명서들보다 한참을 먼저,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그 참된 길을 신비가 이미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