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종교심리학인가?"
"왜 종교심리학인가?"
시작을 여는 질문으로서 이는 언제나 가장 적절한 형식입니다. '왜?'라는 질문을 발화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갖는 가장 위대한 특성이며, 역으로 이 질문을 통해 인간은 언제나 그 자신의 현황을 넘어선 더 고귀한 지평으로 도약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왜?'라는 질문은 두 가지의 구체적인 요소를 그 안에 함축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각기 '지금'과 '여기'입니다. 이 두 요소가 '왜?'를 정말로 '왜?'답게 만들어주며,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왜?'가 효용있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어느 종교전통에서나 '왜?'라는 질문은 그래서 가장 신성한 질문의 형식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왜?'는 그 자체로 종교적 생명을 담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며, 인간이 처한 지금 여기에 응답하고자 하는 종교적 방법론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될 때, 거기에는 종교가 자행해온 인간억압의 폭력성이 지적되곤 합니다. 그러한 종교는 '왜?'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왜?'를 잃은 종교는 강박적인 당위로만 전락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역기능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종교가 윤리나 정치로 추락하는 것도 이 '왜?'를 잃어서입니다.
더 크게 말해보자면, '왜?'를 묻는 인간은 그 자체로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모 렐리기우스, 곧 '종교적 인간'의 출현입니다. 인간은 '왜?'를 물음으로써 자신이 처한 한계들을 극복하고 문화적 풍요들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오늘날의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은 인간이 종교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로, 종교란 실은 인간 삶의 정수입니다. 인간이 가진 종교적인 특성이 아니었더라면, 인간이 인간으로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종교성이 세상을 만들었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정통적인 비유이자, 또 종교성이 왜 창조성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지에 대한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표현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아주 근사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인간 주위에 만들어져 인간이 행복한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종교성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반대로, 인간이 갈수록 고되고 늘 스스로가 비루하게 경험되는 고통의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종교성은 상실되거나 망각된 중입니다.
인간의 지금 여기가 종교성을 잃었다는 이 표현을, 인간의 종교성이 지금 여기를 잃었다는 표현으로 다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상황입니다.
'왜?'를 묻는다는 것은, 이미 그 안에 함축된 '지금'과 '여기'를 함께 묻는 일입니다. 그러니 지금과 여기를 잃은 후에 묻게 되는 '왜?'는 이미 가장 신성한 질문으로서의 그 힘과 온전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질문이 응답되어야 할 방향성을 잃은 것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왜?'는 인간을 위해 쓰이지 않습니다. 추상적인 퍼즐을 풀어내고 그로 인한 도파민의 이득을 챙기려 하는, 일종의 생각놀음 내지 생각노름으로 변질됩니다. 인간을 구원해야 할 가장 신성한 질문이 오히려 인간을 착취외 억압의 감옥에 가두는 폭력적 질문으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생각노름에 사로잡혀 우리 자신이 일종의 정신적 빚쟁이처럼 살고 있는 모습은 만연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자기우상화의 현실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자기의 생각을 신적인 우상처럼 섬기고 있는 현실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지금'과 '여기'를 잃은 종교성은 이처럼 반드시 자기우상화의 현실로 우리를 이끕니다. 정확히는, 이끈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자기우상화란 표류하고 방황한 끝에 도달하게 되는 배들의 무덤과도 같습니다. 생명의 종말이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끝자리입니다.
또 자기우상화된 이들끼리는 서로 모여 누가 최고의 우상인지를 견줍니다. 정치적 지도자나, 미디어의 무당, 대중적 광대 등이 대개 이 우상 중의 우상의 지위에 등극하곤 합니다. 그렇게 외적으로 실체화된 우상의 언행과 더욱 동일시되어 이 자기우상화된 이들은 스스로의 믿음체계를 더욱 강화하게 됩니다. 컬트종교의 성립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를 컬트현상이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사회의 중심적 권력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시대,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이름입니다.
우상의 시대는 인간이 '지금'과 '여기'를 가장 크게 상실해있기에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지금'과 '여기'를 잃었다는 것은, 그 자신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지금 여기'가 의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실존입니다. 그 자신 자체입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지금 여기의) '현존재'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자신의 자신됨을 자각하고 사는 인간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지칭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과 '여기'를 잃은 <우상의 시대>란 곧 인간이 스스로를 잃은 <자기상실의 시대>입니다.
종교적 인간이 하늘을 향해 드높이 '왜?'를 외쳤을 때, 거기에는 '지금'과 '여기'에 놓여있는 자기 자신의 존재성을 바로 알고 싶다는, 또 바로 찾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종교적 전통에서 '왜?'라는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자주 변주되곤 합니다. 이것을 실존적 물음이라고도 부릅니다. 추상적인 자신에 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과 '여기'의 구체적인 실존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물음은 정당한 종교적 물음으로 드러나게 되며, 자기 자신을 위해 온전하게 쓰일 수 있게 됩니다.
더욱 쉽게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종교성이란, 인간 그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들이 생겨나도록 촉진할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그것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지금'과 '여기'에 놓여있는 바로 이 자신을 위한 방향성을 갖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그 종교성의 힘을 지금의 이 자신이라는 황금의 목표를 향해 정향시키는 가늠쇠의 역할을 합니다. 또 그렇게 발견하게 된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에 이제는 안착하겠다는 닻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가장 핵심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늘 관심하며 다가가려는 사랑의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구체적 인간을 늘 사랑받는 존재의 위상으로 회복하고 바로 알리는 일, 이것이 종교의 참된 목적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참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가 내포하는 인간구원의 의미입니다. 보편적 인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구체적 인간만 있을 뿐이며, 종교란 반드시 그 구체적 인간을 구해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모든 이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하는 것이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바로 그 개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적인 것입니다.
'지금'과 '여기'를 잃지 않은 종교성은 이처럼 '지금'과 '여기'에 속한 우리 자신의 가장 든든한 '우리편'으로 기능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우리를 내친다 하더라도, 종교성만은 그러한 우리 자신을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켜냅니다. 우리 자신을 부정하려는 어떠한 억압 속에서도,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현실을 펼쳐내고자 움직이는 것이 곧 종교성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찾으려는 존재의 본성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종교성의 또 다른 이름일 것입니다.
"왜 종교심리학인가?"라는 질문은 이 지점에서 이제 새로운 빛으로 우리에게 돌입해옵니다.
오늘날, 그것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추상적인 욕망의 내러티브들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의 범람 속에서, '지금'과 '여기'를 잃어, 결국 자기 자신을 잃게 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으로 종교심리학입니다.
그냥 '종교학'이 아니라 '종교심리학'인 이유도 한층 분명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외부의 객관적 소재가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내적 경험입니다. 그렇게 종교현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심리학입니다.
조금 더 풀어 말하자면 이러합니다. 인간의 경험을 근본적으로 마음의 경험으로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심리학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인간이 그 자신의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의 마음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마음으로 사는 존재이며, 곧 마음을 사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심리학적 이해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마음, 또는 가장 본래적인 마음의 특성은 종교성이라고 말한다면, 이제 종교심리학이 됩니다. 종교적 마음을 인간경험의 핵심으로 탐구하고자 함으로써, 종교심리학은 그 자신만의 영토를 가진 학문의 전통으로 성립되었습니다.
모든 마음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이다, 라는 이 말은 그렇다면 종교심리학적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말은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마음현상들에는 우리 자신의 존재성을 온전하게 회복할 수 있는 방향성이 담겨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 삶의 경험입니다. 마음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삶의 경험이기에, 마음은 곧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다 종교적인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 자체가 종교성의 표현입니다.
"모든 것은 정치다."라는 통속적인 말보다 "모든 것은 종교다."라는 말은 더 심원한 울림을 갖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온전함을 바로 찾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의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는 우리의 모든 경험은 '남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의 존재성을 귀하게 다시 찾는가의 그 문제와 필연적으로 연루된, 바로 '나의 일'인 것입니다.
'나의 일'이라는 것은 어떤 민족적 사명이라든가 보편적 이념을 따라 실천해야 할 무겁고 복잡한 일들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 '나의 일'이란 언제나 하나입니다.
마음을 사는 것이 바로 나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만 하면 됩니다. 아니 더욱 정확하게는, 우리는 실은 그 일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지금'과 '여기'에서만 출현하는 것이며, 마음을 산다는 것은 그렇게 '지금'과 '여기'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을 살 수 있게 되며,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기적적으로 다시 찾게 됩니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것들을 가슴으로 깊이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란, 그렇다면 그 자체로 가장 종교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형식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적으로도 종교적 기능을 충만하게 다합니다. 우리가 섬세히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며, 우리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처한 상황들에 창조적으로 응답하게 되는 일들이, 바로 이러한 일상 속에서는 늘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항시 우리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소망하는 일종의 종교적 기도 속에 위치하게 되는 현실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떠올려보면, 인간의 모든 전통 속에서 인간 개별자에게 이토록 전적인 관심을 갖는 전통은 종교가 유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니, 윤리니, 역사니 하는 전통들은 다 보편적 인간을 겨냥합니다. 아무리 공정하고 수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해도 결국에는 공리주의입니다. 다수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진심으로 가장 소수 중의 소수인 인간 개인이라는 것에 전념합니다. 우리 자신 하나를 구원하지 못하면 이 모든 우주가 다 의미없다고 말합니다.
종교를 통해 이처럼,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그동안 보잘 것 없게만 생각되어 왔던 소재는 돌연히 우주 전체만큼의 위상으로 다시 드러납니다. '우주의 이 모든 위대한 일들이 다 내 자신을 반드시 가장 귀한 것으로 지켜내고 살려내겠다고 일어난 일이구나!'라고 경험하게 된 이가 있다면, 그것은 아주 정확한 종교적 감수성입니다.
인간성의 회복이란 언제나 우리 자신의 회복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일만을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회복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온전히 회복하게 되고, 또 인간이라는 것의 온전한 위상을 회복하게 되는 그 하나의 일을 돕고자 만들어진 전통이, 다시 한 번, 종교심리학입니다.
"왜 종교심리학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또 우리가 마음껏 우리 자신일 수 있는 그 일상을, 너무나 많이 잃어온 이 존재상실의 시대에, 이것이 진심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