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미노제와 노이로제"
누미노제(numinose)는 루돌프 오토가 제안한 용어로, 인간이 인간을 초월한 것을 만났을 때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느낌들을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쉽게 말해, 종교적 느낌입니다.
"종교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종교적 느낌이다."라고 종교현상을 정의함으로써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심리학의 길을 열었습니다. 외적인 의례나 제식, 숭배행위, 신화적 교훈, 정치적 영향력 등에 대한 탐구가 아닌, 오직 인간의 내적 현상으로서 종교를 이해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무신론적 입장 내지 무종교적 입장과는 다릅니다. 종교현상이라는 것이 고작해야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작용일 뿐이다, 라는 그 뉘앙스의 반대편을 종교심리학은 지향합니다. 인간이 통상적으로는 닿을 수 없는 어떤 초월적 지평을 인간의 내적 작용을 통해 접촉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하는, 오히려 인간존재의 내면성을 거대한 신비로 보고자 하는 입장입니다.
때문에 종교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내적작용, 곧 심리작용이 어떻게 종교적 차원을 드러내게 되는가를 다루는 동시에, 또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함께 다룹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이로제(neurose)라는 표현을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이해하게 됩니다. 누미노제만큼이나 노이로제 또한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용어입니다. 보다 쉽게, 우리는 이제 '신경증'이라고 씁니다. 다양한 성격장애들이 이에 해당되며, 대개 심리상담의 주제가 되곤 하는 증상들을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종교심리학적 이해 속에서는 흥미롭게도 이 누미노제와 노이로제를 역설적 관계성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종교적 인간이란 곧 신경증적 인간이기도 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술한 제임스는 그의 대표작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이러한 양상을 아주 잘 묘사한 바 있습니다. 유사하게 『중독과 은혜』를 쓴 제랄드 메이는 중독에 대한 취약성이 곧 종교적 감수성의 정도와 비례한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습니다. 결국 이들에게 공통적인 이해는 이러합니다.
누미노제의 좌절이 노이로제를 만든다는 것.
누미노제가 부재한 곳에 대신 노이로제가 있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미노제를 향한 더욱 강한 의도가 좌절되었을 때 그것이 노이로제가 됩니다. 그래서 역설입니다.
오늘날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실존상담자 중의 한 명인 커크 슈나이더는, 중독에 빠져 있던 이들이 얼마나 영적이고 종교적인 인물로서 그 자신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가를 그의 상담연구를 통해 상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슈나이더의 입장에서 그 전환의 핵심으로 제안되는 것은 바로 경외감(awe)입니다. 누미노제를 지칭하는 슈나이더의 표현입니다. 개인이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뻔하게 보는 화석화된 입장에서 벗어나, 이 모든 것을 자기보다 큰 것으로 감동하며 보게 되는 경외감을 회복했을 때, 그 개인의 존재성 또한 회복된다고 슈나이더는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노이로제적인 것에는 이미 누미노제적인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이해입니다. 누미노제를 경험하게 해주는 대상이 따로 있고, 노이로제를 경험하게 해주는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대상적 사고'를 벗어나는 것이 곧 노이로제로부터 누미노제로 전환되게 해주는 핵심입니다.
대상적 사고를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로 관심을 전환한다는 의미입니다. 노이로제의 출현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 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억압입니다. 그 결과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다양한 증상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해보면 좋습니다.
누미노제는 '자신의 느낌을 스스로 더욱 경험하려는 개방성' 속에 드러납니다. 반면, 노이로제는 '자신의 느낌을 스스로는 최대한 경험하지 않으려는 억압성'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그래서 노이로제를 호소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대상적 인물 내지 사물에 더욱 관심을 갖습니다. 그 대상들을 통해서만 자신이 '좋은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기 자신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이기에 그런 좋은 느낌들을 스스로 느끼는 일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오직 대상을 통해서만 그 느낌들은 가까스로 허용될 수 있기에, 이제 대상에 대한 집착은 심대해집니다. 좋은 모든 경험은 대상만이 제공해주는 것이기에, 그러한 대상을 놓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모든 중독의 실제입니다.
자신에게 좋은 느낌은 더욱 느끼고 싶으나, 즉 종교적 느낌에 대한 지향은 분명하나, 그것을 대상을 통해서만 경험해야 한다고 정해놓았기에 좌절은 필연입니다. 개인 스스로 충분히 그 느낌을 느낄 수 있는 현실이 원천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까닭에, 아무리 대상을 소비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만족스럽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늘 대상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며, 또 그 대상을 적으로 삼게도 되지만, 그럼에도 대상을 벗어날 수는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집니다.
떠올려보면, 이것이 우리가 관계 속에서 거의 매일 경험하게 되는 양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계라는 것이 가장 강력한 중독의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상대를 실은 종교적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기대하고 원망하기를 반복합니다. 관계만 있으면 자신에게 가장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신앙하기도 하며, 반대로 관계 때문에 자신이 지옥에 떨어졌다며 저주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관계라는 것은 우리에게 거대한 하나의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욱 믿을 수 없게 되고 잃어가게 된 것도 관계중독에 빠져있을 때 생겨난 결과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임의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동안 고통스러운 증상의 발현 또한 필연일 것입니다. 괜히 심리상담의 90% 이상의 주제가 관계에 대한 문제인 것이 아닙니다.
아주 쉽게 말해보자면, 누미노제와 노이로제를 가르는 것은 그 경험자의 태도입니다.
동일한 하나의 경험 속에서, 그것이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느낌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스스로의 느낌에 관심을 갖는 이는 누미노제로의 길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며, 반면 그 경험을 제공했다고 믿어지는 대상에만 관심을 갖는 이는 노이로제를 발현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상황은 보다 희망적일 수 있습니다.
노이로제에 빠진 이가 그 태도만 전환한다면 그것은 다시 누미노제를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이로제는 분명 누미노제를 향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노이로제 속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느낌이 어떠한 것이며, 또 그 느낌을 스스로 경험하는 일을 가로막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도 아주 선명하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대상 없이도 자신이 그 느낌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그 가능성에 자기 자신을 개방한다면, 이것이 누미노제를 향한 참된 종교적 태도로의 전환입니다.
참된 종교적 태도란, 곧 종교심리학의 이해 속에서는, 우리가 참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게 되는 그 태도를 의미합니다. 누미노제의 경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느낌들의 향연입니다. 스스로에게 경험되는 느낌들에 자기 자신을 더욱 개방해볼수록, 우리는 더 분명한 우리 자신이 되어갑니다. 그러한 자신이 아주 생기있으며, 힘차고, 아름답게 실감됩니다. 온전함의 의미가 정말로 무엇인지를 세포의 차원에서부터 알게 됩니다. 자신이 이 우주에서 가장 온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더는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누미노제의 경험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되는지는 다시 한 번 강조될 수 있습니다.
종교적 느낌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핵심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의 사실적인 온전성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로 그러한 존재라고 알게 된다면, 더는 대상에 의존해야 할 일들이 사라집니다. 대상에 대한 의존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못나고 부족한 존재로 착각하던 시절의 잔재입니다. 일종의 악습관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와 같은 잘못된 자기이해를 넘어서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정말로 괜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바로 찾기를 원합니다. 누미노제도 노이로제도 이 소망에 의해 빚어진 일입니다. 동일한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또 다른 대상에 의해 가능하다고 오해해서 노이로제에 빠지게 된 것이며, 그렇지 않고 스스로 그 일이 가능하다고 자기 자신을 신뢰해본 이는 누미노제의 경험에 눈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한 이에게는, 이제 이러한 종교심리학적 선언이 무척이나 의미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도 (자신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을 경험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우리의 일상은 매순간이 기회입니다. 우리가 노이로제에 빠져 괴로워하는 그 순간에도 기회는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기회로 잘 살려질 수도 있습니다. 제임스는 분명 이러한 사실에 착안합니다. 신경증을 통해 자기 자신의 종교적 전환을 이루는 일이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음을 그는 역설한 바 있습니다.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핵심은 우리 자신을 향한 관심입니다. 그 관심의 시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노이로제는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해 관심을 갖지 않으면 더는 안될 상황으로 자연스럽게 인간을 몰아갑니다. 가장 큰 위기 속에서도 가장 큰 기회를 창출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묘한 작용만 보더라도, 우리의 일상이 늘 어떠한 종교적 힘 속에 있다는 사실은 한층 분명해집니다. 그 자체가 누미노제의 경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위대한 기회를 활용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대상이 아니라, 그동안 너무나 방치되어온, 그렇게 소외되어온 우리 자신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그 변화는 분명 우리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이고, 정당한 우리 자신의 것이 맞다고 종교심리학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