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무게"
우리가 방 안에 편히 누워있는 상황을 잠시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몸 위로 무엇인가가 올라옵니다. 자기랑 놀자고 우리의 배 위에 냉큼 드러누워버린 고양이일 수도 있고, 아빠를 찾아 방긋방긋 웃으며 기어올라온 세 살된 작은 딸아이일 수도 있을 것이며, 우리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잠시 쉬고 싶은 우리의 연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순간 그들의 존재를 가득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 존재들이 얼마나 귀한 것들인지도 생생하게 체감됩니다.
그들의 무게가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것에는 무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무게를 직접 우리의 몸으로 달아보려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
흡사 이 모든 것을 만든 창조주가 인간의 몸이 되어 이 세계에 왔다는 비유처럼. 만약 그랬다면 창조주도 자신이 만든 것의 무게를 직접 그 몸으로 달아보려고 왔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자신이 만든 것들이 얼마나 기쁘고 소중한 것들인지를 하나하나 그 몸에 달아가며, 그렇게 확인하고 실감하며 지냈던 하루하루는 이 유구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도 창조주에게 결코 잊지 못할 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되어 누렸던 그 일상들은 창조주의 자랑, 또 영원한 행복이 되었던 최고의 순간들. 그래서 인간이 최고라고, 이 우주의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창조주는 노래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이 실은 이와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검증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신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심리학입니다.
이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 그 고유한 무게로 이 몸에 경험되고 있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무게입니다. 이를테면, 슬픈 마음은 우리의 머릿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횡경막을 압박해오는 가슴의 무게로 실립니다. 이와 같이, 모든 마음은 반드시 우리의 신체로 경험되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존재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지금 존재한다고 알리고 있는 존재현상입니다.
마음의 소망은 단 하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고자 하는 의도가 곧 마음입니다. 마음이 존재하고픈 그 소망에 따라 확연히 존재하게 되는 그 일을 우리는 창조라고 부릅니다. 떠올려보면 이는 분명합니다. 우리 내면에 있던 어떤 마음이 외부로 구현되어 그 존재를 더 선명히 드러내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창조의 일로 경험합니다.
쉽게 말해, 이러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자신이 존재하기를, 곧 창조되기를 꿈꾸던 것이 있었고, 그것은 그 소망대로 존재하게[창조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란 이러한 순간입니다. 어떠한 마음의 무게를 이 몸으로 느끼는 순간, 거기에는 지금 존재하게 된 것이, 곧 창조된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몸이 있다는 것은, 이러한 창조의 일을 우리가 이미 허락했다는 뜻입니다. 하얀 캔버스에 그림들이 그려지듯이, 우리의 몸은 무한한 창조의 터입니다. 이 몸에서 다양한 존재현상들이 꽃피어나서 그것들을 누리고자 우리는 이 몸으로 사는 인간입니다.
이는 또한 단지 창조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이 몸으로 우리가 창조한 것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창조한 것에 이미 참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직접 살고자 그 안으로 들어가는 어떤 창조주의 모습과도 같이, 우리 모두는 그러한 참여 속에 있습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기쁘고 소중한 것인지를 하나하나 이 몸에 달아보며, 그 무게를 생생하게 느끼며, 우리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존재의 축제를 거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우리에게는 실은 기쁨의 무게가 아니었을지요. 우리가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 하루하루의 일상이 어쩌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가장 소중한 것들의 무게로 내려앉던 무척이나 귀한 순간들은 아니었을지요. 그렇게 잠시 떠올려볼 수 있다면, 우리는 종교심리학적 현실 위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그 현실 위에 내려앉은 분명 기쁨의 무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