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알고 있는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
심리학은 대표적인 <의심의 학문>입니다. 또 그 결과로서의 <전복의 학문>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
이 말만큼 심리학이 무엇인지를 잘 함축해주는 표현은 없습니다. 심리학은 가장 당연하다고 믿어온 것들을 의심하며, 결국에는 그 당연성을 전복시킵니다.
프로이트라면 이를 의식에 대한 무의식의 전복이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우리는 거의 누구나 자신이 의식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주권과 통제력을 갖고 있다고 간주하지만, 또 그럴듯한 언술들로 모든 것을 마치 바둑판의 기보를 들여다보듯이 다 파악하고 있는 척도 해보지만, 프로이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니,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실은 전적으로 무의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을 뿐이면서, 역으로 자신은 의식있는 사람이기에 이 모든 것을 운영하고 있는 주체라고 믿는 그 환상을 프로이트는 한낮의 태양 아래 노출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면 전복이 일어납니다. 개인의 세상이 바뀝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의 권위가 무너지고, 인간은 새로운 현실과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획득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을 '변화'라고 부를 것이며, 다양한 심리학적 실천론들은 이를 목표로 합니다.
모든 심리학의 전통이 무의식이라는 특정한 개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우세하게 지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개념을 구성함으로써 프로이트가 대체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는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무의식'이라는 표현을 '모름'으로, '의식'이라는 표현을 '앎'이라는 단어로 바꾸어주면 이해는 매우 손쉽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의식있는 척하지만 실은 무의식에 지배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문장은 이제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는 척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떠오른다면 그것은 적절한 상기입니다. 무지의 자각. 유일한 참된 앎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그 앎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이해는 분명 심리학적인 의의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과 일치하여, 개인이 자신의 무의식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현실의 적응이 힘들어지고 고통스럽게 된다는 프로이트의 말은, 아주 쉽게는 우리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이 괴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한 사회에 고통이 증가하고 있다면 분명합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이들이 많아서입니다. 아는 척하고 있으면 정말로 알 기회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장님이 다 보는 척하며 밤길을 걷고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한 이가 다른 통행인과 부딪히게 되면 그것은 그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는 다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는 제대로 보지[알지] 못한 다른 대상들을 늘 탓하게 되며, 책임을 전가하고, 죄를 부여하며,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합니다.
아는 척하는 이들은 이처럼 가장 불건강한 정신상태를 갖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일종의 <앎의 무오성>의 신화를 믿으며, 그 신화로 무장해 있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은 당연하게 틀릴리가 없고, 반드시 작동해야 한다는 내용의. 만약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작동을 막고 있는 모종의 사악한 적폐세력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단어 뜻 그대로의 적폐(오랫동안 쌓인 폐단)는 오직 그 자신일 뿐입니다. 신화가 너무 오래 묵었습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기의 앎은 옳고, 순수하며, 정의롭다는 이 무오성의 신화는 아동들의 특징입니다. 그 심리적 상태가 미숙한 아동인 채로 너무나 오랫동안 묵어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뭘 좀 아는 성숙한 인물인 것처럼, 즉 균형잡힌 어른인 것처럼 스스로를 착각합니다. 자기가 정말로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이 문장을 만나게 됩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
실은 이 표현은 심리학적인 의의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적인 의의까지 포괄합니다.
이를테면, 당연하게 규정된 것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관습이 개인에게 내사된 것을 소위 자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자아는 자기 안의 부모이자, 공동체이며, 사회구조입니다. 분명 이와 같은 임의적 구성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아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 이유는 자아를 자기 자신으로 삼는 동안에는 온갖 당연한 것들에 대한 어떤 통제력을 얻게 되는 것 같아서입니다. 쉽게 말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불안하고 두려울 때, 자아를 자신으로 삼는 일은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권위자가 되는 앎의 이득을 주는 것 같습니다.
모르는데 아는 척하는 악습관은 여기에서 비롯합니다. 자아로 살 때 우리는 반드시 다소간에 이 악습관을 보유하게 됩니다. 자아 자신이 아는 척하는 그 원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왜 만들어졌는지, 우리는 왜 존재하는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등과 같이, 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신비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우주와 인간존재를 다 아는 것처럼 임의적인 정답을 꾸며내어 만들어진 것이 사회적 관습이라는 것이며, 자아는 그 자녀입니다. 나쁜 버릇이 세습된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영적인 전통들에서는 이러한 자아의 작용을 포착하도록 돕습니다. <위대한 의심>의 방편입니다. 당연하게 자아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자아라고 하는 것의 내적 작용이 정말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관찰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자아의 경계를 확인하게도 되고, 동시에 자아 너머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지지하는 이들은 이를 무의식에의 탐험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또는 궁극의식이니 의식의 전체성이니 등과 같은 표현들도 쓰곤 합니다. 핵심은 동일합니다. 가장 아는 척하는 자아 너머에서 발견되는 것, 그것은 순수한 모름의 영토이며, 곧 우리가 정말로 알 수 있는 배움의 터입니다.
이러한 참된 앎의 방식을 묘사하기 위해 우리는 '자각'이나 '지혜' 그리고 '깨달음'과 같은 용어들을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변별의 필요입니다. 이것은 앎이라고 하지만, 자아의 것과 같이 관습적으로 규정된 당연성을 지속하기 위한 <권위의 앎>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거짓의 권위를 깨기 위한 <전복의 앎>입니다. 곧, 우리의 변화를 위한 앎이며, 우리의 정신건강과 영혼의 회복을 위해 기능하는 앎입니다.
결국 이것이 심리학과 영성이 함께 걸어가고 있는 공통된 방향성입니다.
아는 척, 의식있는 척, 깨어있는 척하는 그 모든 실질적 적폐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그 진로 위에서 의심합니다. 당연한 것처럼,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올바른 정의인 것처럼 가정된 것들을 의심함으로써, 또 그러한 환상들에 의거해 세워진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가장 의심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길을 밝힙니다.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길이 아닌 것으로 전복되며, 우리의 참된 길은 그 위에 있습니다. 가장 길이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허공이 이제 전복되어, 우리는 활공 중입니다.
인간이 그 자신을 에워싼 당연함의 관습을 의심하여 넘어서고, 또 자기 자신을 전복하여 넘어서는 이 수직운동을 우리는 초월이라고 부르며, 이 운동은 심리학과 영성의 양자에서 함께 지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아니며, 반드시 그것을 넘어선 더욱 거대하고 멋진 것이라는 사실은 영원한 이 지지 속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