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과 영성 #2

"세계의 끝에서"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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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을 읽어본 이가 아니더라도 알이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을 우리는 직관하고 있습니다. 개인 앞에 현상으로서 드러나는 사건들을 의미있어보이는 일련의 체계로 인식하여 엮어낸 것이 바로 세계이며, 그렇게 개인들 각각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80억의 인류가 지구에서 살고 있다면, 세계의 수도 최소 80억 개입니다.


그렇다면 지구는 거대한 둥지입니다. 부화를 기다리는 알의 숫자가 이토록 많습니다. 인간도 난생이라는 표현은 비유적으로 아주 적절합니다. 우리는 두 번 태어납니다. 어미의 몸에서 정신적 알로서 한 번 태어나고, 그 알에서 깨어나 신에게로 날아가려는 초월적 존재로서 다시 한 번 태어납니다. 아주 고전적이며 정통적인 영적 이야기들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결코 날려고 하지 않는 새에 관해 여러분은 들어보셨는지요?


우리는 오늘날 이 기묘한 조류의 생태에 관해 지나치게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이러한 새들은 이미 충분히 날 수 있는 날개의 힘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날아오르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깨고 나온 알을 떠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알을 둥지로 삼아 그 안에 영구하게 머물며, 가끔씩 발작을 하듯이 자신이 세계의 왕이라는 선포를 괴성으로 내지르곤 하는 것이 그 일과입니다.


신비체험, 합일체험, 종교체험, 매슬로의 표현으로는 절정체험 등과 같은 모종의 영적 체험을 한 이들에게서 자주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저 개인으로서는 이러한 류의 체험을 과연 영적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인 입장이지만, 논의를 전개하는 효용성을 위해 그렇게 일단 언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발전사는 단 한 마디의 의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체험의 증대'입니다. 양적인 차원과 질적인 차원을 포괄하여 인간은 더 다양한 체험의 소재를 더 깊게 체험하려는 방향으로 인간 자신을 이끌어 왔습니다. 이 시대의 평범한 한 소시민이라도 과거의 왕이나 귀족보다 그 체험의 수준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합니다.


종교적 체험 및 영적 체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과거보다 더 쉽게, 더 자주, 더 많이 일어납니다.


동네 요가원만 몇 달 다니더라도, 자신이 우주와 하나가 된듯한 황홀경 속에 기존까지의 무수한 고민들이 사라지면서, 시야가 선명해지고 가슴속에서 갑갑하기만 하던 두려움과 죄책감의 체증이 사라지며,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을 것 같은, 그러면서도 만물을 향한 자애가 넘치는 어떤 상태들을 아주 손쉽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혹자들은 영성 관련 유튜브를 보면서, 스피커가 말하는 대로 따라하기만 했는데 그런 상태들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보고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은 누구나 파인다이닝을 즐기고, 호캉스를 즐기듯이, 희소한 고급의 소재라고 가정되어 있던 영적인 경험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접근성을 갖게 된 시대인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도 더욱 빈번히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문제란 언제나 우리가 직관하고 있는 정직한 사실과 우리 자신이 일치하지 않으려는 그 간극에서 발생합니다.


모든 체험은 다 세계의 체험이며, 곧 알의 체험입니다. 우리가 여실하고도 정직하게 체험한 것은 즉각적으로 우리의 뒤편으로 물러납니다. 그것은 깨진 알입니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졸업하는 것이며, 이제 기존의 세계 밖을 향해 모험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증명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분명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알의 경계보다 더 큰 존재가 되었다는 그 확인. 인간은 이처럼 자신의 세계를 체험함으로써 그 세계를 초월해 자신의 실존의 면목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직관하면서도 일부러 간과하려 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펼쳐지던 실존의 모험을, 자신의 스크린에서 펼쳐지던 콘텐츠의 소비인 것처럼 뒤바꾸려 합니다. 그것은 요람의 왕처럼 굴고 있는 유아의 태도와 유사합니다.


하나의 세계를 오롯이 체험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 세계가 끝맺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체험한 세계는 소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알에서 깨어난 새가 알의 내용물을 소유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그 내용물의 정수가 바로 자신이기에 소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그 날개에 이미 끝맺어진 세계의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 하면 새는 날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 아브락사스라는 온전한 이름의 신의 하늘을 향해.


소유는 언제나 권력의 의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배와 통제가 그 실제적인 운동의 방향성입니다.


이것이 왜 종교적 체험 및 영적 체험을 했다는 이들이 매우 자주 권력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가의 그 이유입니다. 하늘로 날아오르라고 알은 깨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오히려 깨진 알을 둥지로 삼아 그 안에 머물며 이제는 자신이 알의 모든 것을 다 정복했다는 태도로 권위와 힘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소위 영적 스승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많은 수는 비행을 시작하기는 커녕 그저 알껍질에 걸터앉아, 자신이 어떻게 알을 깨게 되었는지, 또 알속에는 어떤 것들이 담겨 있는지를 가르치곤 합니다. 곧, 그들은 새에 관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알에 관해 가르칩니다. 새가 된 후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심지어는 그들 자신에게도 무용하기만 한 그 지식들을 영적 정보라는 이름으로 전합니다.


세계의 끝에서 멸망해버린 그 잔해들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어떤 시대착오적 예언자의 모습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런다고 그가 세계에 대한 어떤 소유권 내지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것을 얻었다 해도, 이미 멸망해버린 그 종말의 흔적이 대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는 그저 공허하고 지루한 <폐허의 왕>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영적 경지를 의미하고자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표현은 실은 두 동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깨다'이고, 다른 하나는 '닿다'입니다. 그러니 단지 깨는 것만이 아닙니다. 닿아야만 깨달음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새는 저 하늘에 닿아야 그는 참된 영적 존재로 드러납니다.


세계의 끝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저 무한한 푸른 빛의 하늘입니다. 이제 그 자리가 자신의 터전입니다. 알은 그 안의 내용물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하늘은 자신을 터하는 그 어떤 존재도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잘 알려진 표현들을 빌려 말하자면, 알에서 하늘로의 이동이란 곧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의 이행인 셈입니다.


<존재의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현상을 심리학적으로 묘사하고자 해온 전통들이 있습니다. 실은 이 전통들이 어떠한 것들보다 영성이라는 것에 대해 가장 정확히 말해주고 있던 전통들일 것입니다. 이 전통들은 우리가 어떤 것을 소유하는지에 따라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가 결정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말합니다. 우리가 알로 존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알입니다. 또 우리가 하늘로 존재하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하늘입니다.


깨어진 알의 틈새로 고개를 내밀며 우리가 처음 바라보게 된 그 하늘은 우리의 소망이었습니다. 하늘을 닮은 무한히 자유로운 모습으로 우리가 존재하고 싶어하던, 아니, 우리 존재가 원래 그러한 것이었음을 스스로 실감하고 싶어하던 그것은, 세계의 끝에서 우리가 품었던 고귀한 소망, 우리의 <존재의 소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끝난 것을 소망하지 않습니다. 끝에서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소망합니다. 이는 우리가 영적인 변화라고 부르는 어떤 것, 심리학적으로 가장 유의미한 변화입니다. <새로운 존재>, 그것만이 한 세계의 끝에서 우리가 소망했던 것이며, 알껍질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저 도약에서 그 위대한 성취는 스스로 증거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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