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과 영성 #4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법"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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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에서 '부조리'라고 부르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뭔가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무엇인가가 일그러져있고 어긋나있다는 어떠한 거짓된 불일치성에 대한 우리의 직감입니다.


종교체험을 하게 되는 이들, 또는 종교적 감수성이 발달한 이들은 이 부조리감을 자주 경험하곤 합니다. 그러할 때 그들의 보고는 대개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이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니다."

"이 세상은 허구다."

"어떤 거대한 거짓말 속에 있는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아니, 아닙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이 감각은 진실됩니다. 이것은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총을 빵 쏘게 되었던 그 감각이고, 카프카의 『심판』에서 요제프 카가 절규했던 그 심정이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이 늘 붙잡고 고뇌하며 구원을 호소하는 그 절실함인 동시에, 결국에는 니체가 들게 된 망치의 이유이며, 하이데거가 검은 숲을 관조하고 있던 그 뒷모습의 정경입니다.


라캉이라면 이를 개인이 상징계의 장막을 걷고 실재계를 조우한 순간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라캉이 틀린 것은 그가 실재계를 어떤 초월자들만이 살 수 있는 영토인 것처럼 규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또 종교체험의 실제를 통해 우리에게 자연스레 안내되는 방향성은 분명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실재를 향해 살아가며, 더욱더 실재와 일치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를 '성자성'이라는 용어로 제안합니다. 실재에 뿌리를 내려 그 실재성이 이제 그의 인격으로 열매를 맺게 된 <일치성의 삶>의 모습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우리는 언어의 권위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언어는 가상현실을 만들어내고, 그 가상현실에 진리성의 권위를 부여합니다. 이에 따라 해당의 언어가 작동하는 사회에 태어난 우리는 이미 그 권위에 동의하는 입장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자신에게 펼쳐지는 언어적 가상현실의 세상이 흡사 공정하고 절대적이며 참된 세상인 것처럼 자동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발달과정 속에서는 소위 사춘기라고 부르는 시기에 이 언어적 권위는 개인으로부터 도전받게 됩니다. 자신이 아주 거대한 모종의 거짓말에 속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어떤 진실성이 희생되고 있다는 감각은 '실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삶에 출현합니다. 사춘기에 우리는 괜히 반항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카뮈처럼, 우리를 위협하는 기만적인 거짓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온전성을 지키기 위해 실존적 투쟁을 이루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불운하게도 오늘날에는 아무리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사춘기의 발달과정을 겪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모성이 신성화된 양육[교육]문화 덕분입니다. 이러한 문화에 깊게 영향받아온 이들은 재산이 많거나 그 지위가 높다 해도, 심리적으로는 단지 아동의 상태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소유한 사회적 자원을 늘 유치한 목적과 의도로 집행하며 그 힘을 낭비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을 힘들다고 경험하게 되는 시절의 그 핵심적인 이유는 실은 이 심리적 미성숙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남아있으니, 사춘기 시절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못한 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옵니다. 병이 나서 몸이 아파진다거나, 주변인을 상실한다거나, 또 실직이나 이혼 등의 위기를 겪는다거나, 가장 분명하게는 자신의 죽음이 암시되는 형태로 모종의 커다란 고통을 경험하게 될 때, 그의 앞에서는 장막이 걷힐 정직한 기회가 마련됩니다.


우리가 고통을 예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분명 계기가 되어줍니다. 아무리 언어로 우리가 가상의 황금향을 만들어놓고 있다 할지라도, 실제적인 고통은 반드시 그 낙원의 허구성을 우리에게 자각시켜줍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둘러싼 이 모든 것이 그렇게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우리의 삶과 우리 자신의 존재를 오히려 그러한 환상에 위탁하고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이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척이나 이상한 일들이었습니다.


이 지구의 땅덩어리들에 주인이 있다는 발상을 먼저 떠올려보십시오. 땅의 소유라는 그 개념에 입각하여 국가라고 하는 것도 출현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정교한 규칙으로 돌아가는 실체성을 갖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뿌리는 그저 허구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보자면 역사라는 것은 또 어떠합니까? 그 또한 허구를 근거해서 만들어진 소설들이지 않겠습니까? 민족? 유니콘의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허구에 준거해서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과 비장한 태도로 그 모든 일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심대한 무게가 실려 있기에, 우리는 그 근거가 허구가 아닌 것처럼 믿고 싶어하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사이비교주에게 빠져있던 이가 교주의 말을 진리로 계속 믿고 싶어하듯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러합니다.


우리가 진짜라고 믿어온 그 모든 허구는 어쩌면 <아름다운 거짓말>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분명 인간을 위한 인간의 배려와 사려깊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불안하지 않도록, 또 조금 덜 방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가상의 지도를, 또 그 지도에 담긴 어떤 상냥한 마음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처럼 <아름다운 거짓말>임을 알고 사는 일과, 허구를 정말로 참된 것이라고 믿고 사는 일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이 쌓아온 이 모든 허구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 아닙니다. 그것이 허구라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허구를 조롱하거나 폐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의 영적인 방향성을 묘사합니다.


우리가 사실성을 회복함으로써 함께 회복되는 것은 참된 우리 존재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허구에 준거해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존재도 허구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니 늘 존재가 불안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온갖 언어들로 자신을 무장해야 하고, 언어적 게임에 뛰어들어 성공의 훈장들을 모아야 합니다. 오늘날 범람하는 '자기소진'이라고 하는 현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언어적 허구에 준거하고 있기에 생겨난 대표적인 역기능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는 언어적 허구에 근거해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언어로 만들어진 가상현실이 있어야 우리가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이 쌓아온 그 모든 허구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서 존재하게 해주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의 절대적 법칙이며, 참된 영성이라는 것은 오직 이 <존재의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전술한 것처럼 새로운 방향성이 설정됩니다.


우리는 존재합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개입할 수 없는 고귀한 절대적 원리로 존재합니다. 스스로 존재합니다. 그러한 존재의 위상 위에서, 우리는 이제 허구들을 향유합니다. 우리 자신의 근거가 <존재의 사실> 위에 뿌리내린 상태에서, 그 모든 <아름다운 거짓말>을 그것이 담고 있는 선량한 의도로 기꺼이 즐겨 삽니다.


이것이 허구의 존재가 아니면서도, 허구와 함께 살아가는 그 영적인 길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에 속하지 말라."는 잘 알려진 표현이라든가, 십우도의 그림에서 묘사되듯이 깨달음을 얻은 이가 저잣거리로 들어가는 장면은 이와 같은 의미를 함축합니다.


우리가 뭉쳐서 똑같은 거짓말에 동조하고 있다고, 우리의 날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날 수 없게 만드는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의 날개를 누르고 있는 언어의 무게뿐입니다. 이 우주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언어라고 하는 그 허구의 무게이며, 이것은 가상현실이 가진 중력의 크기이기도 합니다. 더 많은 이가 가상현실의 중력에 붙들려 있어야만 가상현실은 자신이 하나의 실체적 행성인 것처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파와 같이, 까보면 그 중심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날개를 누르고 있던 그 억압의 작용으로 인해, 어떤 중요한 중심부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또 그 중심부를 향한 진정한 힘이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오인되고 있었을 뿐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가상현실의 내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에 있습니다.


'지금 이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니다!'


만약 이러한 외침이 우리의 가슴속에서 불현듯 발견된다면, 또 발견되자마자 바로 솟구쳐오른다면,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것을 바로 찾은 것이며, 이 순간 우리의 중심을 회복한 것입니다.


더는 거짓된 권위들이 우리를 침범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는 점점 더 우리 자신의 존재가능성이 그 모든 허구에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분명해집니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확연해진 것이고, 이로써 사실은 사실의 이득을 위해, 허구는 허구의 이득을 위해 우리 자신에게 더욱 잘 작동하게 됩니다. 우리를 둘러싼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상황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적 통로와 영적 통로가 일치된 모습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우리 자신의 존재와 일치되려고 할 때 펼쳐지는 그 모습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치된 이만이, 외부에서 펼쳐지는 어떤 불일치한 부조리성을 직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이제 그 부조리함조차 지혜롭게 관통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떤 강력한 가상의 중력장 속에서도 오롯한 중심을 갖고 비행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된다고 묘사하는 일은 가능합니다. 자신의 존재와 일치되어 그 <존재의 힘>을 바로 행사할 수 있게 된 이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분명 언젠가는 이러한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에는 숨길 수 없이, 언제라도 반드시 진실된 존재인 까닭입니다. 언제나 희망은 남아 있으며, 그것은 정직하게 일치되고자 하는 우리의 내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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