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과학"
과학은 시선의 문제입니다. 관심이 가는 현상을 관찰하는 일이 과학의 근간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과학적 태도의 기초로 우리는 현상학을 말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순수한 시선>으로 관심의 소재를 과학할 수 있는가의 그 방법론입니다.
이 <순수한 시선>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관찰한다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주 다릅니다.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내부'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어떤 외우주의 신적인 입장 같은 것을 상정합니다. 그러니 그 개념 자체로 오류입니다. 객관성이야말로 유한한 인간에게는 가장 불가능한 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순수한 시선>은 오히려 아주 놀라운 주관성의 마법입니다. 이것은 관찰하고자 하는 것과 분리된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내부'에 참여하고 있는 시선입니다. 참여한다는 표현도 실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관심하고 있는 이는 이미 그것에 깊이 참여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세계-내-존재'라고 묘사한 개념은 이러한 인간의 입장을 함축하는 표현입니다. 어떤 것을 잘 들여다봐서 그 성취여부와 가능성을 타진하고, 리스크 관리와 크라이시스 대비를 이룬 뒤, "자, 이제 참여하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에 던져져 있으며, 그렇게 이미 참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객관성이라는 불가능한 허구의 태도를 견지할 때가 아니라, 그 반대로 우리가 철저하고도 순수하게 주관적일 때 우리는 가장 온전하면서도 실용적인 결과값을 얻습니다. 소위 말해, 그럴 때에야 우리의 눈앞에 진리가 그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현상학이라는 학문전통이며, 이것은 결국 <참된 과학>을 정의하고 있는 하나의 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용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실제의 우리 삶에서 쓰일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과 분리된 입장에서 구성한 과학이라는 것이 우리 자신의 삶에 실용적인 가치와 의의로 드러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종교가 도그마가 되어 인간에 대한 폭권을 행사하게 된 방식과 똑같은 폭력성을 내포합니다.
폭력은 사랑의 부재입니다.
<참된 과학>은 과학이 정확하게 이 사랑의 문제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앞서 말한 '현상학적 태도'라고 부르는 것은 과학과 사랑 양자에 동시에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잘 과학하는 이들에게서도, 또 잘 사랑하는 이들에게서도 그들의 현상학적 태도는 매우 두드러집니다.
그것은 쉬이 자신의 편견 및 선입견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며, 끝까지 잘 보고 들으면서 관찰하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것이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순간을 경청하는 것이며, 누구보다 그에 감동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틸리히는 정확하게 이러한 태도를 '듣는 사랑(listening love)'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는 이 '듣는 사랑'이 심리학적 탐구와 종교적 탐구에 있어 공통적으로 지향되는 태도임을 말합니다. 심리상담자도 이 '듣는 사랑'의 원리 속에 있고, 기도를 하거나 명상을 하는 수행자들도 이 '듣는 사랑'의 원리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 '듣는 사랑'은 심리상담자나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전문성을 훈련하는 자연스러운 기제가 되기도 합니다.
과학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 사랑을 연습해가는 기회라고 말한다면, 무척 낭만적인 진술일 것이면서, 실은 매우 큰 진실성을 담고 있는 진술입니다.
우리도 일상 속에서 이러한 연습을 하곤 합니다.
사랑을 연습하고 싶은 이들이 아이를 낳거나 반려동물을 기르게 됩니다.
어떤 선입견으로 이루어진 평가나 통제의 의지를 기각한 채, 가만히 관심을 갖고 그들을 관찰하다보면, 또 그러다가 문득 그들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칠 때면, 우리는 알게 됩니다.
천사들. 그 눈을 보면 우리가 천사라 부르던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것도 있습니다. 인간이 임의로 정한 언어와 규칙 따위는 결코 따르지 않으면서 자신의 욕구만을 따르려 하는 모습, 우리가 종종 악마라고 정의해온 그것도 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랑스럽기만 한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주 섬세하면서도 모든 것이 다 있는 그 생생한 삶의 모습이, 그 조화로움이 정말 너무나 절묘해서 참으로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져 있으며, 우리는 분명 목격하게 됩니다.
다만 커다란 감동으로.
그 <존재에의 감동>이 아마도 우리가 영성이라고 부르던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게 되는 모습이 어떠한 영적 수준의 실현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인간을 통해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한번 이해해보겠다는 <순수한 시선>을 견지한 이들이 그 끝에서 만나게 되는 감동의 깊이를 의미할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사랑>을 결국 우리는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말하고 있던 셈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연습이었습니다. 우리는 현상학적 태도를, 그 <듣는 사랑>을 연습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과학을 연습한 것이며 동시에 사랑을 연습한 것입니다.
다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은 과학 중에서도 가장 현상학적 태도에 충실한 과학입니다. 심리학의 성립과 그 활동 자체가 그대로 현상학적 실천론의 묘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또한 우리의 일상에서 심리학을 연습한 것이며 동시에 영성을 연습한 것입니다.
이제 이름하여 이것을 <사랑의 과학>이라고 명명해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늘 하는 일이며, 어쩌면 유일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어떤 것들은 분명해집니다. 통속적인 선입견 속에서 마치 영성이 과학과의 대척점에 서있는 것처럼 묘사된다면, 그리고 심지어 영성이 과학보다 온전한 어느 것을 말하고 있다고 간주된다면, 그것은 올바른 진술이 아닙니다.
영성은 철저한 과학의 결과입니다. 위대한 주관성의 과학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실천된 그 결과값으로 우리는 마침내 우리 자신의 존재에 감동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실용을 획득합니다. 모든 것을 관심하며 모든 것에 감동해가는 이는 반드시 최후의 감동의 소재로 그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훈련의 성과가 자기 자신에게 오롯이 돌아오는 이 일은 몹시도 자연스럽습니다.
이처럼 이제 우리 자신을 향해 작동하게 된 사랑의 실제만큼 실용적인 것은 이 우주에 달리 없으며,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순수한 시선>의 관심 속에서 자라난 우리의 아이들과, 우리의 고양이와, 우리의 장미꽃이 가장 온전하게 스스로를 실현하게 되듯이, 이제 그 신성한 역사가 우리 자신을 향해서도 허락된 순간입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변화의 힘이며,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이 사랑이라고 하는 힘이 어떻게 출현하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며, 또 우리 자신을 위해 얼마나 멋진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이것이 바로 <사랑의 과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