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심리학적 관점에서나 영성의 관점에서나 가장 밑바닥의 인간의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공통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죄책감'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오직 그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원리로만 움직이는 인간은 언제나 최악의 결정만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빚을 진 이가 다시 또 큰 빚을 만들어 자신의 부채상황을 만회해보려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늪에 빠진 상황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발버둥칠수록 실은 더 추락하기만 합니다. 시야는 좁아져서 그 손에 붙잡게 되는 것도 부질없는 지푸라기들뿐입니다. 결국에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그 무력감으로 인해 생겨나는 거대한 화, 또 그 화가 만성화된 우울과, 그 결과로서의 총체적 절망의 상태만을 경험하게 될 뿐입니다. 빚더미에 질식해버리게 되는 이의 모습이 여기에 있습니다.
죄책감은 이처럼 <존재의 부채감>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죄책감이 큰 이일수록 그 오만성도 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빚을 많이 진 자가 오히려 자기는 큰 돈을 굴릴 줄 아는 자라고 뻐기는 모습과도 유사할 것입니다. 가뜩이나 이 부채의 상황 속에서는 시야도 좁아져 있기에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모습은 더 공고화됩니다. 다 틀리게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만은 맞는 길로 가고 있다고 고집부리는 일도 그래서 생겨납니다.
오만성의 크기는 정확하게 죄책감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아는 척하고, 또 있는 척하는 이들을 우리가 세간에서 보게 될 때, 그들의 '난 척'만큼 그들이 죄책감을 크게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라고 알아본다면 정확합니다.
이 오만성과 죄책감의 관계를 잘 묘사한 비유가 바로 타천사인 루시퍼의 신화입니다. 루시퍼는 가장 오만해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만이 아니라, 가장 죄책감이 컸기에 가장 오만해진 것입니다. 루시퍼의 오만성도, 또 죄책감도 하나의 문장으로 수렴됩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할 수 있다."입니다. 조금 더 나아간 표현으로는 "나는 해야만 한다."입니다.
실은 할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할 수 있다고, 그리고 해야만 한다고 고집하고 있을 때,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이 오만성이며 곧 죄책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곧잘 세상이나 타인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늘 과잉된 공격적 태도나 방어적 태도를 취하며, 자신을 무고한 피해자 및 신성한 희생자의 입장으로 형상화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들 자신이 스스로를 무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며, 또 해야만 한다며, 계속해서 자기 자신의 사실적인 상태를 무시하며 짓밟습니다. 나아가 자기 자신을 향한 그 태도가 곧 세상 및 타인에 대한 태도가 되어 이제 무시의 행위가 외적으로도 집행됩니다. 결국 이들이 세상 및 타인으로부터 무시받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이들 자신이 세상 및 타인을 무시하고 있던 주체였던 셈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인간을 가장 압박하며 고통스럽게 무시하고 있는 상태인 죄책감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죽은 자들로부터 온 것입니다. 죽은 자들의 유산이 죄책감입니다.
그러나 그냥 죽은 자가 아닙니다. 죽었으면서도, 또는 그 죽음을 통해서라도 살아있는 것을 자기 생각대로 지배하며 통제하고자 하는 분명한 <망집>을 가진 죽은 자입니다.
이러한 망자의 죽음은 그 관계장 속에 있는 이들에게 모종의 심리적 부채감을 남깁니다. 그리고는 그 부채감에 의해 이제 그 죽은 자의 의지를 대신 실현하려는 행위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일들은 애초 할 수 없는 일들이기에 좀처럼 만족스럽게 실현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이것은 요의를 느끼는 이를 대신해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누는 일을 실현하려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해도 충족될 수가 없습니다. 표현 그대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을 계속 은폐하고 무시하면서 우리 자신을 계속 괴롭히는 동안 결국 생겨나게 되는 것이 <존재의 부채감>입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그 감각. 이러한 감각이 출현하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매질을 가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잘못된 존재라는 사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망자의 아집을 대신 실현해주지 못했기에 잘못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기에 출현한 것이 이 <존재의 부채감>입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지점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존재의 부채감>을 경험하게 한 그 망자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늘 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정말로 정신적 유산이며, 정신적 부채의 세습현상입니다. 망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망집>의 내용과, 우리가 전달받게 되는 <존재의 부채감>은 같은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웅신화를 향한 유아적인 꿈입니다.
그리스의 영웅신화들, 특히 헤라클레스의 신화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이의 모든 장면이 다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정당하게 용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가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는 시련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렇게 끝없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고통받게 하는 과업을 버텨내야만, 그는 자신이 정당한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자신의 고통의 크기만큼 결국에는 신들에게 인정을 받아 저 하늘의 별자리[슈퍼스타]가 되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앙망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분명하게 죽음을 예찬하는 감각과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미시마 유키오 같은 이가 정신적 각성을 외치며 할복을 할 때, 또 어떤 정치인이 정의를 주장하며 자살을 택할 때, 거기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이 <위대한 죽음>에 대한 동경입니다. 영웅신화는 근본적으로 죽음이 삶보다 우월하다는 감각을 묘사하고 있으며, 영웅은 더 많은 죽음을 자기에게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앞서 말한 오만성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위대한 죽음>을 이루어 하늘에 도달할 자격을 쟁취할 수 있다는 어떤 광신. 언뜻 처절한 비극적 몸부림처럼만 보이는 영웅신화 속에는 늘 이 오만한 자아도취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또 그만큼의 죄책감을 담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이처럼 죄책감이 발생하는 구조와 패턴을 영웅신화의 내러티브들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내사시킴으로써, 우리의 내면에 더욱 많이 죄책감을 배양하고자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죄책감은 죽은 자들을 위한 먹이이기 때문입니다.
<망집>을 가진 죽은 자들은 우리 안에 죄책감을 자라게 한 뒤 그것을 양분으로 삼아 자신들의 <망집>을 지속합니다. 이 경우, 우리는 망자들과 동일한 행동양식을 갖게 된 입장이 되어, 흡사 우리의 몸으로 망자들이 대신 살게 되는 것 같은 현실을 출현시키게 됩니다. 죄책감을 저당잡아 죽은 자들이 살아있는 우리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영웅신화들을 떠올려보면 이 점은 분명합니다. 영웅을 꿈꾸는 이는 자신의 죽음을 빌미로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유발한 뒤, 사후에도 계속 사람들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합니다. 모두가 죽은 자를 따르며, 다들 죽은 자와 같은 모습이 되어 <망집>을 이루고자 하는, 소위 <죽은 자들의 왕국>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 죽음을 예찬하는 감각과는 정반대의 감각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을 <정말로 살아있는 이들>이라고 불러보겠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이들은 죽은 자에게 먹이를 주지 않습니다. 곧, 죽은 자를 따르지 않으며, 죽은 자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여부가 마치 죽은 자들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거짓을 숭배하지 않으며, 이들은 오직 존재가 스스로 존재하며 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고 있다는 그 참된 사실에만 감사합니다. 그렇게 <존재 그 자체>의 사실만을 직접적으로 향하려 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모종의 부채감을 유발하는 <죽은 자들의 왕국>의 규율, 곧 율법주의를 벗어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망집>을 가진 이의 죽음은 율법이 됩니다. <망집>의 실현을 위해 그 죽음은 성역화되고 신성화됩니다. 마치 그러한 죽음 자체가 의지를 가진 절대적 도덕법칙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율법으로 화하게 되는 것이며, 망자에 대한 죄책감을 가진 이들은 그 율법을 신처럼 숭배하는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고 제안한 영토 속에는 분명 이 죽은 자들의 <망집>과 관련된 부분이 있습니다. 조상이나 부모의 심리적 행동양식이 세습된다든가, 개인이 애착하고 있던 인물로부터 심리적 소인을 전이받게 된다든가 하는 지점들은 분명한 무의식의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무의식을 다루는 이들은 결국 죽은 자와의 관계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지점들을 설정하게 됩니다. 그 방향성들은 프로이트와 융을 통해 대표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신적인 율법의 재구성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이 <망집>에 너무 지배되지 않도록 적절한 균형점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 일은 건강하고 이상적인 아버지상을 개인의 내면에 자리잡게 하는 일로 시도됩니다. 그 아버지의 율법을 통해 무수한 죽은 자들의 <망집>을 정리정돈해보려는 것입니다. 즉, 다신주의적 율법들에 대해 일신주의적 율법을 대안으로 제공하는 일입니다.
융은 정확하게 그 반대로 움직입니다. 그가 문제로 삼는 것은 오히려 프로이트의 일신주의적 율법입니다. 융에게 '아버지의 법'보다 더 강조되는 것은 '어머니의 품'입니다. 모든 다양성을 다 품어주는 것 같은 그 무한한 모성의 품. 즉, 일신주의에서 다신주의로의 귀환입니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탈율법주의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일신주의를 넘어선 메타일신주의입니다. 여기에서 묘사되는 '어머니의 품'은 실은 그것이 율법임을 은밀하게 숨기고 있는 초율법입니다. 왕의 모친이 왕의 뒤에 숨어 실질적인 권력을 집행하는 수렴청정의 구조 같은 것입니다.
더 쉽게 비유하자면, 프로이트는 망자들 중에서 으뜸가는 모범적 망자의 말을 통해 '이 세상'의 현실적인 복지경영을 이루어보자는 것이고, 융은 모든 망자들의 말을 다 들어줌으로써 '이 세상'뿐 아니라 '저 세상'까지도 다 통치하는 여신의 제국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로이트의 기획은 유교를 닮아 있고, 융의 기획은 무속을 닮아 있습니다. 유교와 무속은 서로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둘 다 죽은 자의 말을 중요시여기며 율법화하는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죽은 자에게 정기적으로 먹이를 주는 실제적인 의식행위까지 공통적입니다.
죽은 자의 율법, 즉 <비존재의 언어>보다는 <존재의 사실>에 주목하고자 하는 심리학의 전통들, 곧 <존재의 심리학>은 이 두 방식을 다 기각하며 출발합니다. 이를테면, <존재의 심리학>의 일군인 실존주의 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도 반동하면서, 동시에 융에게도 반동합니다. 쉽게 핵심만을 말하자면, 그 반동은 죽은 자들이 살아있는 자에게 개입하는 불건강한 현실에 대한 반동입니다. 곧, 인간존재의 근간에 죄책감을 심고자 하는 모종의 의심스러운 의지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법이 시키는 대로 집행하지 않아서 생기는 죄책감이든, 어머니의 품이 시키는 대로 품지 못해서 생기는 죄책감이든, 그것들은 다 타인의 <망집>에 맞춰 우리 자신의 삶을 짓누르고 있기에 생겨난 산물에 불과합니다. 누군가가 영웅이 되려고 만들어낸 그 망상의 원리들에 우리가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고, 또 그를 충분히 영웅으로 만들어주지 못했으며, 나아가 그러한 이의 삶을 이어받아 대신 우리 자신이 진정한 영웅이 되지 못했다고 경험하게 되는 죄책감이란, 그 자체가 그저 환상일 뿐입니다.
죄책감의 실체가 이러합니다. 그것은 실은 <허구의 질병>입니다. 가장 없는 것이 가장 있는 것을 괴롭힙니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이, 이처럼 '있지도 않은 것'에 의해 고통받는 일을 지속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있게 해주고 있는 이 삶에 대한 가장 큰 모독입니다.
죽은 자들이 우리를 살게 한 것이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오직 삶 자체만이 우리 자신을 살게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살아있는 일>은 우리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존재하는 삶 자체가 우리를 살리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그 삶의 본래성, 곧 <존재의 사실>을 다시 기억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거대한 부채를 해소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채감을 경험하게 만드는 죽은 자들과의 관계설정을 대안적으로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에게는 애초 부채가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는 이 일에 대해, 우리는 죄송해야만 할 그 어떤 빚도 지지 않았습니다.
비유적으로도 분명합니다. 존재는 빚으로 자신을 존재하게 한 것이 아니라, 빛으로 자신을 존재하게 했습니다. 스스로가 원래 스스로임을 밝히는 그 빛으로.
우리는 한번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살아있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 그 존재방식을 바꾸게 된 이들, 만약 그러한 이들에게 물어본다면 어떠한 대답이 돌아오겠습니까?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막대한 마음의 빚을 지고 있음을 엄숙하게 주장할까요, 아니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볼까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온전하게 만족하며 완수한 이는 그 삶 자체에 대한 감사와 사랑 외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여분의 과업이나 숙제 같은 것을 <망집>의 의지로 다른 이들에게 물려주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남의 삶도 똑같이 괴롭힐 그 무게를 결코 전하게 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이는 아무 것도 전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아무 것도 전하려 하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자유입니다.
자신의 존재에 아무런 부채가 없다는 그 <존재의 자유>를 살아간 이들은, 이 모든 존재를 향해서도 <존재의 자유>를 전하게 되는 이들입니다. 그 존재에 아무런 잘못이 없고, 그 어떤 빚진 자가 아니니, 죽은 것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자신의 삶을 다만 기쁘고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그 소리없는 노래만이, 향기처럼 그들이 머문 자리에 감돕니다.
"당신은 왜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미안해하나요?"
한 영성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껏 얘기하고 있던 그것이며, 그 향기입니다.
조악한 비유이지만,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고 미안해하는 이가 있다면 그러한 모습은 무척이나 이상한 모습일 것입니다. 자신이 산타보다 높은 존재라고 오만하게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선물은 그저 기쁨입니다. 조건없는 선물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에게 삶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삶은 조건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곧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존재해도 된다는 그 <존재의 자유>의 허락입니다.
죽은 자에게 먹이를 주는가, 또는 정말로 살아있는 우리 자신의 이 삶이라고 하는 선물을 받는가, 우리는 결국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심리학적 건강성의 길도, 참된 영성의 길도, 공통적으로 삶이라는 단어를 향해 끌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