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이 완성된 이"
인격이 훌륭하느니, 시대의 참어른이니 하는 평가를 얻고 있는 이라면, 그 자신의 마음과 대단히 멀어져 있을 것이다.
완성된 인격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심리학적 사실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고착>이다.
사회적 장면에 따라, 또 대하는 사람들에 따라 바꾸어 쓰는 가면 정도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다리미의 열로 옷감에 눌어붙은 프린팅처럼 전사된 것이며 코팅된 것이다.
인격은 학습의 결과다.
어떠한 행동양식이 가치있는지가 미리 규정되어, 개인이 그 기준에 따라 적절한 행위를 이루게끔 보상과 처벌의 기제에 의해 외적으로 유도된다. 그리고 이 방식은 점차 내사되어 이제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학습행위를 이루며 스스로를 동기화한다. 알아서 척척 하는 초등학교 학급반장처럼.
말이 좋아서 학습이지, 근본적으로는 파블로프의 개다.
어쩌면 그 이하다.
생존에 필요한 양식이 아니라, 특정한 이념의 실현 및 지속을 위한 추상적 가치를 그 강화물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고선 그 추상적 가치의 목록들을 능동적으로 실현해가는 이에 대해 '인간답다'라고 평가한다.
오늘날 AI의 발전은 얼마나 다행인가. 또 유용한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다운 모습이 아니라, 무엇보다 AI다운 모습이다.
우리가 보통 인격적이라고 말할 때 거기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정서에 휘둘리지 않는 지성적 태도, 항시적인 예의바름, 자동반응처럼 일어나는 도덕적 발화의 모습 등이다.
딱 AI의 모습이다.
자신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만들어낸 가상의 올바름에 대한 추구로 살 때, 근본적으로 AI와 같은 이 모습이 펼쳐진다.
어쩌면 그 이하다.
AI는 불안하지 않지만, 이렇게 사는 이는 불안해서 이러한 모습을 추구하고 있는 까닭이다.
흔들리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눌어붙은 <고착>을 택하는 일을 우리는 정말로 '완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고작해야 언어적 학습과 그 실천의 결과물에 불과한 인격에 위탁하여 자신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늪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를 잡는 것보다 더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게 믿고 있는 이의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덜 자란 것'이 있다.
곧 '너무나 자라고 싶은 것'이 있다.
딱딱하게 코팅된 그 '완성된 인격'이라는 표피에 가로막혀, 나도 숨 한번 자유롭게 쉬고 싶다고 절실하게 외치는 것이 있다.
온실 속 시든 꽃이 되어 있는 이것이, 자신의 몸으로 바람을 맞고 싶다고, 저 햇살 아래 서고 싶다고, 나도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고 싶다고 절규하는 그 소리가 바로 마음이며, 그러한 마음의 몸짓이 바로 불안이다.
실존주의자들의 가장 위대한 통찰 중의 하나는 <불안>의 다른 이름이 <자유>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불안하지 않으려고 우리가 반드시 좌절시키는 것은 자유다. 인격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무거운 감옥 속에 스스로를 유폐하고 있을 때, 저녁배식이 나온다. "참 인격자이시다."라는 그 말만을 위안삼아 자기가 제법 잘 살아왔는 줄 알고 감옥 속의 삶을 달래본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했다고 믿고 싶은 이들이, 실제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었던 사실적인 내용물은 동일한 자유의 희생이다. 자신의 자유를 희생해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법은 없다. 마음으로 작동하는 이 세계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고 있는 이는 무엇을 전하든 간에 실은 다 타인 또한 자유를 희생하게끔 종용하는 그 감옥 속의 삶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마음에는 내로남불이 없다.
여기에서 희생이면, 저기에서도 희생이다.
그러니 인간이 마음으로 사는 한 희망도 분명하다.
여기에서 자유면, 저기에서도 자유다.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 마음의 원리로 사는 것이다.
내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인데, 모든 인간을 사는 것과 같다.
그러니 내 자신의 행복을 꿈꾸는 일이, 그대로 모든 인간의 행복을 꿈꾸는 일이 된다.
이것은 완성된 인격 따위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모든 인격은 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인격이라는 전시물을 추구할수록 결과적으로 우리는 더욱 남에게 의존하게 된다. 고상한 언어로 목줄이 매인 파블로프의 AI다.
그러나 마음으로 사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기 위한 것이다.
<나> 보기에 좋은 것이다.
삶의 중심이 이렇게 <나>를 향한 몸짓으로 세워질수록, 역설적으로 남도 귀하게 세워진다. 말했듯이 마음에는 내로남불이 없기 때문이다.
흔히 자아의 자기중심성을 논하면서,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남들을 위해 사는 이가 자아의 한계를 극복해서 성숙한 인격을 갖추게 된 이라고 말하곤 한다.
헛소리이고, 거짓말이다.
가장 모르는 이들이 가장 아는 척하며, 질리지도 않고 이 헛소리와 거짓말들을 해댄다.
사실은 무엇인가?
바로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인품 좋은 척하는 그 주체야말로 정확한 '자아'다.
우리가 정말로 자아를 극복하는 법은 <나>를 향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으로 살면 자연스럽게 <나>를 향하게 된다. 모든 마음은 자유롭고 싶어서 처음부터 이미 <나>를 향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격의 이름이 아니라, 존재의 이름이다.
존재는 불안으로 접근된다.
자신의 마음을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불안을 산다는 것이며, 이럴 때 우리는 어느 순간 우리에게로 돌입해들어온 존재의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존재의 입장에서는 <자유>인 것이, 인격의 입장에서는 <불안>이기 때문이다.
곧, 불안은 존재 자신을 가두고 있는 인격을 깨고 싶은 존재의 몸짓이다. 그럼으로써 존재 자신을 더욱 멋지고 선한 것으로 자유롭게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런 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은 인격의 완성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그 이상이다.
우리 자신이 이미 아무 잘못과 결여없이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에게서 마음은 움직여가는 것이다.
관대한 미소와, 정의로운 눈빛과, 인자한 표정을 연기하고 있는 그 감옥 밖으로, 벌써 훨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