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5

"위험한 사유자"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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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전체제목을 『위험한 사유자』로 바꾸고 싶다.


그런 모습이 매력적이기 때문이고, 매력적이라는 것은 지금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게임체인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게임은 위험하지 않다. 이미 상정된 프로그램언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는 극단적 신체활극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이 이미 잘 만들어놓은 협곡이나, 남이 이미 잘 지어놓은 빌딩 사이를 뛰어다니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협하는 일일 뿐이다. 그렇게 자신을 일부러 위기에 빠트림으로써 사람들의 박수와 찬사를 받아낸다면 그것은 더욱이나 우리가 말하는 위험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 아니 인간에게 있어 진짜 위험한 것은 이런 것이다.


세계가 우리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


모두가 우리에게 다 틀렸다고 하는 일.


너는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던 것 같다는 말을 듣는 일.


이처럼 우리의 존재가 전적으로 부정되는 것 같은 상황에서, 그럼에도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가? 또는 존재하고 싶은가?


이 물음을 품고 있는 이라면, 그가 바로 우리가 의미하는 '위험한 사유자'일 것이다.


세계와 싸우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특히 왼쪽팔에 봉인되어 있는 그 놀라운 힘으로, 세계를 바꾸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는 세계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기 전에, 우리 주변의 좋은 사람들과 함께 먼저 세계에게서 등을 돌리자는 말도 아니다.


우리는 세계에 갖은 아양을 떠는 착한 아이만큼이나 똑같이 유아적인 이 태도들에서 졸업할 수 있을까?


이 말은 이러한 말이다.


세계를 상대하는 대신에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을까?


우리 자신의 마음에 귀기울이며, 세계를 바꾸는 대신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꾸는 일은 가능할까?


그 가능성을 꿈꾸고 있다면, 역시나 그가 바로 우리가 말하고 있는 <위험한 사유자>다.


위험한 사유자는 세계 안에서 위험하게 사는 이라거나 위험한 세계에서 사는 이가 아니라, 실은 세계에 위험한 이다.


세계를 소란스럽게 할 핵폭탄의 스위치를 들고 있다든가, 세계를 유치하게 몰락시킬 음모론들을 만들어내고 있어서 그가 위험한 것이 아니다.


위험한 사유자는 세계를 초월하려 하기에 세계에 위험하다. 심지어 그 초월의 방법론으로서 그가 세계를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기에 더욱 위험하다.


허깨비에게 위험한 것은, 허깨비와 싸우는 이가 아니라, 그것이 허깨비임을 직시하는 시선이다.


위험한 사유자는 스스로 생각하는 자다.


스스로 생각하려면, 스스로 봐야 한다.


그는 세계가, 또는 세계의 유명인이 생각하라는 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올바르고 정의로운 생각이라며 주입되는 세계의 생각들을 그는 거부한다. 그렇게 판단하라고 이미 판단된 그 선입견들을 그는 모두 중지시킨다. 그렇다고 세계로부터 온 선입견 대신에 똑똑하고 균형잡힌 자신의 주체적인 견해를 통해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자신만의 견해라는 것도 이미 한참 전에 세계로부터 온 선입견이다. 그것도 중지시킨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다.


직접 보고, 머리를 굴려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듯이 그저 가만히 보는 것이다.


가만히 보고 있는 동안, 현상이 마음으로 직접 우리에게 들어오며, 느낌으로 직접 우리에게서 느껴진다. 그 느낌들이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생각을 창출해낸다. 이러한 생각이란 용도가 분명한 생각이며, 마음이 개방되며, 느낌이 펼쳐지게 되는 생각이다. 그래서 명료하다. 대체 어떤 현상이 펼쳐지고 있었는가에 대한 그 앎이 명징하게 드러난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처럼 스스로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중심의 이동이 있다.


자기가 혼자서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 이는 중심이 바깥에 있어서 늘 세계의 정보들에 치인다. 음모론에 쉽게 현혹되며, 조작된 정보들에 자주 조롱된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되어지는 이는 외적인 정보들이 아닌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을 참조한다. 그것만을 따라가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진실한 어떤 참됨이 반드시 드러나서 그 자신과 주변을 환하게 한다. 중심이 그 자신의 안에 가장 안착되어 이제 점화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느낌의 현상학> 또는 <마음의 현상학>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지 '보는 방법'의 변화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보는 자'의 변화를 시사한다.


선입견을 깨고 보는 일은, 그 선입견에 의거해 구성된 하나의 자아도 함께 깨지는 일이다. 그리고 자아가 깨지면 그 자아를 창조한 세계의 권위도 함께 깨진다.


자신을 바꾸면 세계도 바뀐다는 말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신이라고 믿어온 어떤 선입견의 내용을 깨고자 도전하는 이가, 자신을 바꾸게 되는 것이고, 자신의 세계도 바꾸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자신이기를 포기하는 일, 이 일은 기존의 자신에게는 분명 가장 위험한 일일 것이다. 이처럼 자신에게 위험한 이가 세계에게도 위험한 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의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이는 세계도 초월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이를, 저 <위험한 사유자>를, 세계는 도무지 막을 방법이 없다.


그는 세계를 직접 상대하지 않고, 자신을 바꾸고자 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깨려고 하는 이가 있다면 세계는 더 큰 위력으로 그를 굴복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만을 깨려고 할 뿐이다. 세계는 그에게 개입할 어떤 정당성이 없다. 그의 작은 손에 속절없이 세계 자신의 낡은 운명을 내어놓고 있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러나 실은 세계에게도 이것은 희망이다.


자신을 더 장엄한 것으로 변화시킨 이를 통해 세계 또한 더 장엄한 것으로 함께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도 더는 조잡하고 쩨쩨한 음모론이나 권모술수로 돌아가는 작은 게임판 같은 것이 아니다. 다들 무슨 제갈공명이라도 된 것처럼 남들 머리 위에서 세상 다 뻔하게 파악하고 있는 책사놀이를 하며 까르륵 좋아하는 저질유치원생들의 저주로부터 세계도 해방된다.


"이것이 나의 세계야."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해방된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 자신의 미소가 세계의 미소가 되어있을 것이다.


비록 그런 칭찬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할지라도,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스스로 든다.


존재의 긍정.


우리 모두가 정녕 가고 싶던 길이고, <위험한 사유자>가 한길로 향하고 있던 길이다.


그 길이 위험하다고 불리던 이유는 실은 오직 하나,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그것을 향해 발걸음이 움직여져 그것처럼 될 것만 같아서, 그러면 지금의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잃을 것만 같아서, 그 매력은 위험함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이 정말로 놀랍고 신비한 존재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 바로 그토록 매력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이렇게나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두려워하는 존재가 있다니.


우리 자신이 아직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그래서 도덕이라든가 합리적 지성, 정치적 올바름 같은 조건들을 달성해야 이제 좀 매력적인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모든 선입견을 넘어서고자 하는 일이 소위 '위험한 일'이라면, 이 순간 격하게 위험해지고 싶어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


잊지 말고 기억하면 된다. 그의 이름이 바로 <위험한 사유자>다. 자신의 존재를 바로 찾고 싶은 이의 온전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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