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6

"자아도취의 축제"

by 깨닫는마음씨




우리는 오늘날 정치가 과잉된 시절을 살아간다.


과거 80년대에는 프로야구가 사람들의 시선을 정치로부터 돌리게 하는 서커스쇼의 기능을 했지만, 오늘날에는 정치 자체가 "날 좀 봐요, 날 좀 봐요."라고 시선을 부르는 서커스쇼가 되어 있다.


로마의 콜로세움에서는 직접 검을 들고 싸우는 유흥을 만들었지만, 오늘날에는 누군가의 펜에서 만들어진 이념으로 투쟁의 유흥을 창출한다.


어느 쪽이나 로마의 시민들처럼 지루하고 권태로워서 펼쳐지는 일이다.


권태는 왜 생기는가?


자신이, 자신의 삶을 위해, 자신의 생명력을 오롯이 쓰지 못할 때 인간은 권태를 경험한다.


쉽게 말해 잉여에너지가 고여 정신적 늪이 된 현상이 권태인 것이다.


그러니 정치는 늘 좋은 권태의 해소제다. 카를 슈미트가 말했듯 우리편과 적이라는 '대적구도'를 통해 성립되는 것이 정치공학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싸움의 기회는 항시 열려 있으며, 잉여에너지는 쉬이 소비될 수 있다. 심지어 상대를 타격한다는 죄책감도 면죄된다. 자신은 대적하는 그 상대조차도 결국에는 행복하게 만들 저 위대한 이념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날리는 죽빵은 더 큰 현실에서 온 고귀하고 자비로운 사랑의 손길이다.


축제.


그래, 정치축제다.


중세에는 정치에 불만을 가진 피지배층이 그동안 지배층에게 쌓였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축제를 열곤 했다. 카니발의 의의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민중들이 정치에 더 큰 불만을 갖도록 정치 자체가 유도하며, 그렇게 더 많은 이들을 정치 속으로 끌어들인다. 정치 자체의 카니발화다.


식량의 생산기술이 좋아지고 인류의 평균적 영양상태가 월등해짐에 따라, 또 의료가 발전하고 사회의 관리시스템이 고도화됨에 따라, 인간의 생활에 있어 잉여에너지가 더욱 많이 출현하게 된 까닭이다.


비극은 이 여분의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쓸 곳이 없다는 것이다. 배를 타고 멀리 모험하던 대항해시대도 아니고, 냉전의 긴장 속에서 부국강병에 몰두하던 시대도 지나갔다. 이제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 모두에게 치명적이기에 과거처럼 전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잉여에너지가 소비될 수 있던 시절도 아니다. 그렇다고 우주로 진출하거나 심해로 파고드는 일에 열정적인 에너지를 쏟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남은 것은 미디어의 콘텐츠다.


끝없이 콘텐츠를 소비하며 어떻게든 잉여에너지를 해소하려고 중독에 가까운 상태에 빠져든다. 이에 발맞추어 콘텐츠의 질적 저하도 가속된다. 충분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작품>을 만드는 일은 환대받지 못한다. 잉여에너지 때문에 괜히 짜증나고 미칠 것 같이 답답한 현상황을 빠르게 해소해줄 <패스트콘텐츠>가 요구될 뿐이다. 짜증내는 아이를 달래주기 위해 거듭해서 공급되는 그 무수한 싸구려 장난감들처럼.


건장한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에게 양육의 서비스를 제공받으며 살아가는 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특별한 문제는 없지만 이들은 많은 경우 매우 신경질적인 불평분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또한 만성적인 무기력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동들이 이유없이 투정을 부리며 안절부절하는 모습과 정말로 유사하다.


자기 안에 출렁거리는 생명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때, 또는 그 채널이 막혀있을 때, 이러한 일들이 발생한다.


내면에 고여가는 잉여에너지는 흡사 소화되지 못한 음식물의 상황과도 같을 것이다. 아직 자신의 것이 아닌 어떤 이물(異物)이며, 그래서 심한 불편감을 준다.


바로 이처럼 이 잉여에너지를 스스로 처리하지 못한 심리적 소화불량에 걸린 이들이 결국에는 찾게 되는 것이 축제다. 소화불량자들의 대연회. 그것은 하나의 종교적 형식과도 같은 제의인데, <자아도취>가 그 신앙의 본질이다.


잉여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모종의 매체를 소화불량자들은 마침내 찾아내고야 만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궁극의 콘텐츠로 삼는 일, 곧 '자기콘텐츠화'다. 나르시시즘의 역동과도 매우 유사한 면모를 갖는다.


정치라고 하는 축제는 특히나 이 자기콘텐츠화를 강력하게 지지하며 견인한다. 그 본질은 자아도취이지만, 아름다운 이념을 말하는 언어적 수사들을 통해 마치 자아도취가 아닌 것처럼 포장해줌으로써, 정치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은 안전하게 자아도취에 빠져들 수 있는 이득을 얻는다.


자아도취에 관해 많은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시간낭비라서. 아주 간략히만 말하자면, 자아도취라는 자기-콘텐츠가 바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저질의 콘텐츠이며, 싸구려 장난감 중의 가장 싸구려 장난감이다.


68혁명 때 자기 교수를 쓰레기통에 쳐박은 뒤 파리의 거리를 신나게 달려가는 어느 커플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이것 봐, 줄리아! 우리는 지금 '역사' 속에 있는 거라구! 너와 내가 그 주인공인 거야! 너와 나의 두 손으로 지금 인류에게 미래를 만들어주고 있는 중이야!"


우드스탁의 히피들도, 일본의 전공투 소년들도, 어쩌면 한국의 특정세대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수 있다.


그 경험은 사춘기에 겪는 발달심리학적 특성 속에 있다. 바로 '개인적 우화(personal fable)'와 '상상의 청중(imaginary audience)'이라고 하는.


이것은 자기가 남들과는 다르게 실은 아주 특별하고 똑똑한 주인공 같은 존재이며, 그러한 자신을 남들이 성실한 관객처럼 다 주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자신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 속에 있다고 믿고 있는 이 증상은, 더 쉽게는 중2병이라고 쓰지만, 심리학적 공식용어가 있는 셈이다.


성인으로 진입하는 생물학적 과정 속에서, 아동시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하게 솟아나는 자신의 생체에너지가 생소하면서도 감격스러워 그에 취하게 되는 일시적인 도취의 상태라고도 이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거기에 항구적으로 빠져있지 않게 되는 것은, 사춘기를 겪으면서 신체적 역량과 함께 발달하게 되는 개인의 정신적 역량 덕분이다. 자신의 존재성을 물을 수 있고, 자신에 대해 회의할 수 있는 그 힘, 곧 <자각력>이 해당의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 경험들은 처절한 이불킥의 소재들, 그것에 다름아니었다. 새벽 내내 두꺼운 오리털 이불을 호날두 프리킥처럼 차고 또 차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그 낯뜨거운 수치심을 <자각력>에 의해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된 이는,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신의 생체에너지, 곧 생명력을 자아의 도취가 아닌, 온전하게 자신의 존재를 향해 유익하게 활용하려는 방향성을 갖게 된다. 이것이 성공적인 심리학적 발달과업의 완수다. 스스로 소화하는 법을 배운 것이며, 자신의 안에 생겨나있는 어떤 이물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증득할 수 있는 지혜의 길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심리학적으로 성인이 된다는 의미다.


아동과 성인의 차이는 분명하다.


아동은 자신의 에너지를 양육자와 같은 외적 대상물에 의존해야만 운용할 수 있지만, 성인은 스스로 자신의 에너지를 운용할 수 있다.


결국 이는 결정적으로 마음에 대한 태도의 변별이다.


인간의 생명력이 바로 마음이다. 아동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소화하지 못하고 늘 아웃소싱을 통해 외적으로 소화해야 하니 생명력의 자체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성인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소화할 수 있기에 그 양분을 자체발전을 위해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또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동의 끝은 자아도취이며, 성인의 시작은 그 자아도취의 초월이라고. (현대정신분석가들은 이 진술을 무척 좋아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만나서, 스스로 알아가며, 스스로 소화하려고 하는 이에게는 자아도취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에게는 인위적인 제의로서의 축제도 필요없다.


자신의 마음이 그 왕성한 생명력으로 펼쳐내고 있는 <삶의 축제>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축제는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개최되며, 우주에서 그 한 사람이면 모든 것이 다 충만하다고 말한다. 그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살아가는 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노래하기 위해 열리는 축제다.


이 <삶의 축제>가 열리고 있다는 분명한 증명이 되는 것은 바로 <창조>다. 자신의 마음[에너지]을 스스로 운용할 줄 알게 된 이는 이제 그 에너지로 자신의 주변에 가장 좋은 것들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서, 창조자 자신이 그 창조행위로 인해 충만해지며, 그 이득들이 주변에도 자연스럽게 전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들이 자연스럽고도 충만하게 나누어진다. 흡사 오병이어의 비유처럼.


떠올려보면, 인간사에서 인간에게 정말로 좋은 일들은 다 이 아름다운 창조행위들을 통해 생겨났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살아간 이들이 그 에너지로 인간을 위해 가장 멋진 일들을 해낸 것이다.


사실 결론은 단순하다.


잉여에너지가 있다면 그것은 자아도취로 낭비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창조를 위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하지만 어려움도 분명하다.


어떻게 창조해야 할지, 무엇을 창조해야 할지에 대한 어려움들이 늘 호소된다.


그러나 그것은 반증이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아직 소화하고 있지 않아서, 또는 소화하려고 하지 않아서, 창조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반증.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있는 이는 벌써 안다. 이미 안다. 마음이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있다. 자신의 존재에 좋은 어떤 것이 창조되어야 할지 그 방향성과 구체적인 이미지를 이미 건네주고 있다. 목마름을 느끼는 이에게서 컵이 만들어지고, 잘 때 추위를 경험하는 이에게서 이불이 만들어지는 그 일과 정말로 같다. 완전히 같다.


"이러이러한 세상과 역사를 목표해야만 내가 행복해질 수 있어."라고 마음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자아가 늘 그렇게 말한다. 자신에게 스테이크와 스시를 제공해주지 않는 외적 대상물에 의존하는 동시에 그것을 문제삼으며 "테치테치."하는 것이 자아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말하지 않는다. 이미 음미하고 있고, 그 안에서 양분으로 바꾸고 있어서다. "내일도 살아가는 데스." 아니, 내일도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그렇다면 분명하다.


콘텐츠 중의 콘텐츠, 최고로 상질의 콘텐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내일'이다.


인간이 마음을 통해 창조하는 것의 으뜸이 '내일'이다.


자아는 이 내일이라는 것을, 자신이 그린 이념의 설계도에 따라 실현될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권태로웠던 그 이유의 연장일 뿐이다. 자기 머릿속에서 이미 상정된 각본에 따라 펼쳐지는 지루한 자아도취 축제의 나날들, 우리는 그런 것을 내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내일의 핵심적 의미는 미지다.


그리고 동시에 이 미지를 결국에는 반드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가 여기에 있다는 든든한 신뢰다.


그 둘이 합쳐진 것을 우리는 <신비>라고 부른다.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신비>이며, 그러한 내일을 살아갈 우리 자신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큰 <신비>다.


언제나 마음을 통해 바로 이 위대한 신비가 창조되는 것이며,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성대한 <삶의 축제>에 막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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