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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비영웅성

음모론과 마초주의로부터의 해방

by 깨닫는마음씨



음모론과 마초주의는 좋은 한쌍이다. 이 둘이 결합하면 이들만큼이나 짙은 2세가 태어나는데, 그것의 이름은 바로 영웅주의다. 모든 히어로물을 잘 살펴보면, 이 음모론과 마초주의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음모론은 이 세계를 작동시키는 어둠 뒤편의 규칙이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그 규칙이 결코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이면의 규칙은 나와 반대되는 세력들에 의해 만들어진 까닭에 필연적으로 그들의 이득만을 위해 작동함으로써 언제나 나의 존위를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 모든 음모론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마초주의는 이러한 음모론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자신의 힘으로 뒤엎는 실력행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곧, 마초주의는 '나에게 안좋은 세계'를 '나에게 좋은 세계'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자신의 위력을 지향하는 것이다. 물론 마초주의에서는 노골적으로 '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편' '동지' '전우' '형제' '시민주체' 등이 보다 정직한 '나'라고 하는 표현을 대신해 활용되는 언어들이다.


여기에서 마초주의가 '나'라는 표현을 쉽사리 쓰지 못하는 이유는, 마초주의의 주체들이 실은 수줍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정의의 우리편이라는 이름의 두터운 울타리 뒤로 숨고 싶어하는 까닭이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수치심이 이 마초주의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모든 수치심의 근간은 존재에 대한 수치심이다. 여기에서 존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몸이다. 때문에 모든 수치심은 곧 몸에 대한 수치심이다.


이처럼 자신의 몸을 수치스럽게 경험한 이들이 그 결과로 아주 빈번하게 채택하게 되는 사조는 심신이원론이다. 곧, 정신이 더욱 근본적인 것으로서 육체와 변별되기에, 정신은 육체보다 늘 우월할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진정한 자신은 육체가 아니라 바로 그 정신이라고 하는 관념적 구조를 그들은 매우 사랑한다. 선비정신, 지사의 얼, 공동체의 뜻, 민족의 혼 등과 같은 정신적 표현들을 마초주의의 주체들이 애용하는 그 이유다.


그리고 그 정신 중에서도, 지성이라고 하는 요소에 그들은 몰두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지성의 가치를 예찬한다. 이는 단순하다. 그들이 어린 시절 수치심을 경험했을 때, 그 수치스러운 상황을 해결하고자 자신들의 머리를 많이 굴렸던 까닭이다. 그러한 경험이 누적됨으로써, 그들에게는 지성이라고 하는 것이 정신의 핵심요소로서, 몸으로 인한 수치심을 극복할 수 있는 구원의 기제처럼 된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성에 대한 지향, 즉 지성주의는 마초주의의 핵심이 된다. 마초주의라는 이름에서 일견 느껴지는 뉘앙스와는 다르게, 실상 마초주의는 육체에 대한 반대기제로서의 정신에, 그중에서도 지성에 그 중심을 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음모론과 마초주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영웅주의에서 말하는 영웅의 조건이다.


히어로물에서도 묘사되듯이, 영웅주의에서 규정하는 진정한 영웅의 소양은 그의 강인한 육체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위대한 정신에서 비롯한다. 영웅주의에 있어 오히려 육체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며, 그렇게 육체를 극복함으로써 영웅주의적 주체는 자신의 정신성을 더욱 드높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의 몸이 작고 무력할지라도, 그의 고결한 의지와, 뜨거운 감정, 그리고 가장 핵심적으로는, 그의 탁월한 지성으로 말미암아, 사악한 위협의 세력이 만든 '나에게 안좋은 세계'를 극복하고, '나에게 좋은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그 모습이 바로 오늘날의 대표적인 영웅주의적 이상이다. 지성주의적 마초영웅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주의'는 그렇지 못한 이가 그러함을 지향하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아주 단순하다. 건강주의, 건강하지 못한 이가 지향하는 것이다. 인간주의, 인간적이지 못한 이가 지향하는 것이다. 평등주의, 평등하게 살지 않는 이가 지향하는 것이다. 이와 같다.


때문에 마초주의는, 실제로는 조금도 마초적이지 못한 소심이들이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이러하다. 자신의 몸에 대한 수치심은 자신의 몸을 비루한 것으로 느껴지게끔 한다. 그렇게 몸이 점점 더 작은 것이,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것이 되어버리니, 몸을 근간으로 존립가능한 이 삶에 대한 신뢰감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몸에 대한 수치심은 삶에 대한 총체적인 불안이 된다.


틸리히는 이 불안의 문제가 어떻게 두려움의 문제로 전환되는지에 대해 탁월한 통찰을 제공한다. 총체적인 불안 속에서 시름하는 개인은, 결국 총체적인 까닭에 명료하게 잡히지 않는 불안을, 조금이라도 그 실체가 잡힐 수 있는 다른 것으로 변환시키고자 한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두려움이다. 그래서 불안과 두려움의 핵심적인 차이는, 불안은 그 불안의 대상이 없지만, 두려움은 구체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음모론이 출현하는 것이다. 음모론의 핵심은, 언제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구체적인 대상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음모론은 근본적으로 코즈믹호러다. 크툴루 신화다.


몸에 대한 수치심으로 말미암아 몸이 부정되고, 그로 인해 삶에 대한 신뢰를 잃어 불안을 경험하게 된 이들이, 결국 그 불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것을 두려움의 기제로 전환해 만들게 되는 것이, 이처럼 바로 음모론이다.


그리고 그 음모론 속에서,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망각하기 위해, 위악적으로 늘어놓는 지적 허세와 허풍을 통해 자신을 강하고 거대한 존재인 것처럼 부풀리기 위해 채택하는 것이 바로 마초주의다.


때문에 마초주의는 실제로는, 대단히 쫄아있는 이들이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삶에 쫄아있는 지성주의적 주체들이 마초를 꿈꾼다. 마초적 위악을 통해, 두려움에 쫄아든 자신의 가슴을 달래고 싶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자신이 쫄아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초주의의 주체들에게는 그 자신이 더욱 쫄게 될 강도높은 사건들이 끝없이 닥쳐오게 된다. 이것은 마치 중고등학교의 일진의 생태와도 같다. 학급에서 한 번 강한 척 했기에, 이제는 전교에서 맞짱을 떠야 할 대상들이 생겨나고, 나아가서는 옆학교로, 지역구로, 전국구로 그 싸움의 구도가 계속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다.


쫄아있는 이가 자신의 쫄음을 숨기기 위해 했던 행위가, 더 커다란 쫄음의 삶을 거듭 만들어나가게 되는 비극적 순환인 셈이다. 그리고 이것이 분명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마초주의의 주체들은 이 순환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자신을 마치 영웅처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잃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싸우고 싶지 않은데도, 그들의 의지와는 다르게 계속 싸워야 한다. 그것이 영웅주의에서 규정하는 영웅의 의무인 까닭이다. 끝없는 수렁이다.


그러다가 이 마초주의의 주체들은 결국 하나의 솔루션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신이 채택하고 있는 음모론을 모두에게 보급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주체들이 얻게 되는 이득은, 자신만 쫄아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그 쫄아있음의 수렁 속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음모론이라고 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모든 이의 세계인 것처럼 만드는 일에 성공했을 때, 그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지적 전능감이다. 곧, 지성적 힘이다. 이 힘에 그들은 도취된다. 이러한 힘을 실감하는 순간은, 마치 술과 약물에 취하듯 자신의 수치심과 두려움을 잊을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지옥을 모두의 지옥으로 만드는 일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망각하게 해준다는 중독의 기제를 눈치챈 마초주의의 주체들은 이제 오직 하나의 일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선동하는 일이며, 곧 세뇌하는 일이다. 그렇게 음모론을 보급하는 일이다. 히틀러 치하에서 괴벨스가 탁월하게 수행했던 바로 그 일이다.


자신만의 세계를 모든 이의 세계로 만들려는 일,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다.


자신만의 지옥을 모든 이의 지옥으로 만들려는 일, 이것이 바로 홀로코스트다.


실제로는 가장 영웅이 아닌 이가 지향하는 영웅주의의 결과는 언제나 이 전체주의의 폭력이다. 게르만 신화의 영웅주의나, 유교적 선비정신의 영웅주의나, 동일한 영웅주의며, 동일한 히틀러의 재현일 뿐이다.


음모론과 마초주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이 영웅주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주체들은 언제나 화가 나있다. 생리학적 사실로서, 화의 크기는 두려움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자신이 두렵다는 사실을 망각하려는 이는, 결국 타인들을 두렵게 만들고자 하게 된다. 그럴 때 일어나는 것이 바로 화다. 화는 자신의 두려움을 타인들에게 넘기기 위해 내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영웅주의의 주체들은 화를 더욱 넓은 범위로 확장하게끔 된다. 곧, 이들은 음모론을 보급함으로써, 사람들을 더욱 많이 두렵게 하며, 더욱 많이 화나게 한다. 여기에도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화라는 것은 불이다. 불은 에너지다. 그리고 이처럼 화력발전을 통해 생산된 에너지는, 결국 이 영웅주의의 주체들이 지향하는 '나에게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동력으로 공급된다. 이것이 바로 끝없이 사람들을 선동해 화를 유발하는 이 주체들이 얻는 최고의 이득이다.


사람들의 에너지를 착취함으로써, 자신에게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목적에 남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세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숫자와 같다. 70억 명의 인간이 있으면, 곧 70억 개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의 입장에서 '나에게 좋은 세계'라고 하는 것은, 단지 그들 자신의 세계에 대한 것이지, 결코 우리 각자의 세계에 대한 것일 수 없다. 아무리 이들이 근대적 사상의 낡은 계몽적 논리 속에서 하나의 보편적 세계의 정당성을 내세우려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반드시 각자 살고 각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실존적 사실은 이 하나의 세계의 허상성을 반드시 해체하게 된다.


훈련소에서 화생방 훈련시설에 들어가듯이, 뜨거운 전우애로 똘똘 뭉쳐 정의의 우리편인 동지들과 함께 입장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특히 인간의 이성[지성]을 활용하여 보편적인 하나의 통합적 세계를 구축하면 이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 근대적 사유의 핵심이다. 영웅주의란 곧 근대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실증적인 역사 속에서 끝내 망상으로 드러나게 된 결과물이다.


실존은 음모론과 마초주의의 밀회로 인해 생겨난 이 영웅주의가 허상의 것임을 거듭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고작 수치심 가득히 삶에 쫄아있는 지성주의적 아동들의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실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음모론과 마초주의, 그리고 영웅주의의 실재는 이러하다.


그것은 자신의 몸[존재]이 수치스러워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어두운 미지의 세계가 무섭다며 머리만 굴리고 있는 아이가, 어느날 자신의 실제적인 몸보다 거대하게 보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그 그림자의 크기만큼을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허구적 크기로 과장된 자신의 크기에 취해, 이제는 자신이 어두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의 주체인 것처럼 행세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영웅주의는 근본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영웅주의를 지향하는 주체가 두렵게 느끼는 그 자신을 에워싼 어둠과, 그가 자신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그 음영은, 동일한 그림자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주체는 언제나 그림자로 그림자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즉 어둠으로 어둠을 바꾸려고 하는, 애초 성립될 수 없는 기획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빛의 반대편에 생겨난 거대한 그림자를 자신인 것처럼 착각하며 그에 도취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어둠에 빠지게 될 뿐이다. 어두우니 더욱 두려워지고, 더욱 화가 나게 된다. 어두우니 불이 꺼지지 않게 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어둠은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이 보편적인 세계가 어둡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보편적인 세계란 것은 없다. 우리가 다만 빛으로부터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노출시키는 빛을, 오히려 우리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나에게 안좋은 세계'로 보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상상 속에서 생각해온 자신의 몸[존재]과, 실제로 빛에 노출되어 드러나게 된 사실적인 자신의 몸[존재]과의 간극을 알게 된 순간, 그 간극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이들은 그것을 수치심으로 경험하며 빛으로부터 등을 돌렸던 것이다. 즉, 자신에 대해 과도한 완벽주의적 망상을 갖고 있던 이들은,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후퇴시키지 않고서는 도무지 초라하게 보이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이와 같이, 사실적인 자기 존재에 대한, 곧 실존에 대한 거부가, 나아가서는 냉혹한 자기비난이 결국 수치심을 만들어내고, 음모론을 만들어내며, 뒤이어 마초주의와 영웅주의를 만들어내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의 존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이 극렬하게 부정하는 이들이 결과적으로 향하게 되는 행보가 바로 영웅주의라는 의미다.


그래서 실존은 결코 영웅주의가 될 수 없다. 실존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이미 온전한 것이다."의 한결같은 목소리인 까닭이다.


곧, 실존은 우리가 영웅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각자 생긴 꼴로 존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이미 영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영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바로 영웅이다.


때문에 실존은 비영웅성의 속성을 갖는다. 이를테면, 모두가 다 왕이라면 더는 왕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非)인 까닭이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하는 이 사실 자체만으로 우리 모두는 이미 영웅이다. 이 우주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지금의 내가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도저히 말도 안되는 가능성들을 관통해왔는지 우리 자신은 감히 상상조차도 하지 못한다. 이것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없는, 생명이라고 하는, 그 생명이 구현된 나라고 하는 실제적인 영웅에 대한 서술이다.


실존은 바로 이처럼, 우리의 몸[존재]을 노출시키고 있던 그 빛의 의미를 전한다. 빛은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빛이 개방하고 있던 우리의 모습 그대로 이미 영웅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도 우리는 엄연한 영웅이라며, 결코 비교되거나 대체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존귀성을 알리고 있던 것이다.


빛은 우리를 수치스럽게 비웃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곧 빛이다.


이 빛을 전하고 있던 근원은, 곧 광원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그것이 또한 실존이다.


스스로의 빛으로 스스로를 비추며, 그렇게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긍정하고 있던 이 사태, 이것이 바로 실존이다.


이것이 이 회색빛의 우주에서, 붓다가 말하듯, 스스로를 등불처럼 밝히며, 동시에 이 우주를 환하게 천연색으로 밝히고 있는 실존이라는 사태다.


인간은 이 실존이다. 색이 없던 곳에, 색을 있게 하는 존재다. 각자의 몸[존재]이 색(色)다름으로 인해, 더 다양한 자신만의 색으로 이 우주를 아름답게 만드는 존재다. 표현 그대로, 공즉시색 색즉시공은 개별적 인간으로 말미암아 성립된다.


이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진짜 영웅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일이 아니다. 영웅적으로 행위해야 할 일이 아니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미 우주적 행위다. 그 자신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색다름을 창출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처럼, 인간의 실존은 그 자체로 빛이다. 색을 있게 하는 빛이다. 그러한 색이 있어도 괜찮다고, 언제나 허용하는 빛이다.


인간의 실존은 그래서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한 용서다. 스스로를 향한 용서다. 그러한 모습이어도 괜찮다고, 언제나 다시 삶을 허락하는 용서다.


삶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들이 어둠 속에 숨는다. 빛이 집요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집요함은 존재해서는 안될 수치스러운 죄인을 추적하는 전조등의 것이 아니라, 어두운 설산의 골짜기에 매몰된 채 두려움과 추위를 잊기 위해 온갖 음모론을 공상해내던 이를 따듯한 집으로 반드시 돌려보내고자 눈길로 향한 어느 상냥한 이의 손에 들린 등불의 것이었다. 어두운 설산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가장 상냥한 빛이 되어, 어느 시공간에서인가 소외 속에 두려워하던 우리 자신의 모습에게로 언제나 돌아온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진짜 영웅은 바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이다. 그러한 영웅은 곧 영웅주의에서 벗어난 비영웅적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비영웅적 영웅, 이것을 은유적인 표현으로 이렇게 옮길 수 있다.


연인.


나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더럽고 추한 내 자신의 가장 상냥한 연인이다.


그리고 이 연인이라는 단어의 음절들을 도치시켜볼 수 있다.


인연.


나는 당연하게 그저 내 자신인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자신이라고 하는 것과의 인연이다. 곧, 나는 내 자신이라고 하는 실체가 아니라, 내 자신과의 관계성이다.


그렇게 나는 내 자신과, 연인으로서 인연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더욱 가득히 품에 끌어안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더럽고 추한 내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처음으로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실존은 바로 이 사랑이다. 비영웅성은 우리가 이러한 사랑 속에 이미 놓여 있다고 하는 그 의미다. 그래서 실존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사실 다 연애담이다. 표현 그대로, 로망스(Romance)다.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곧 사랑한다고 하는 사실을 뜻하는, 그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해방시키는 우리의 끝없는 무용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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