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름방학은 이야기 너머에서 펼쳐진다
실존은 아무리 대단한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먼저라는 것이다. 신, 깨달음, 국가, 정치, 돈 등과 같이, 우리가 극상의 가치로 치부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결코 위에 있지 않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이것은 소위 잘 알려진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같은 물음이다.
곧,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대답할 수 없음에 의해 대답이 대신되는 물음이다.
가장 모르는 것에 대해 우리는 결코 대답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모름 자체가 대답이다. 가장 거대한 모름을 우리는 바로 신비라고 부른다. 그렇게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신비다. 이것이 곧 대답인 것이다.
그래서 실존은 언제나 우리가 존재한다는 신비한 사실에 대한 경외감의 정조를 내포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통해 드러난 그 경외감은 자신의 밖을 향해서도 펼쳐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전부 다 말도 안되는 경이로운 사태라는 사실을 조우하게 된다. 이 우주가 놀랍게 느껴진다.
이처럼, 어원 그대로 거듭해서 밖을 향하는 실존의 몸짓은, 그 자체로 경외감의 확장이 된다. 때문에 작은 뇌 속의 논리로 이 세상 모든 것의 구조를 다 설명하는 척 하나 실제로는 지루함만을 느끼는 까닭에, 남들에게 자신의 논리를 전도해 스승행세를 하며 그 지루함을 달래고자 하는 도사연의 면모와는 근본적으로 그 질감이 다르다.
지루하다는 것은 사실 존재적 사건이다.
우리에게서 명징한 존재감이 상실되었을 때 찾아오게 되는 것이 바로 지루함이다. 즉, 실존이 망각되었을 때 야기되는 것이 지루함이다.
그리고 그 지루함의 문제에, 곧 존재감을 상실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서사다. 실존과 서사의 대비를 사실과 꿈의 대비라고 바꾸어 표현하면, 이 이해는 더욱 손쉬워진다.
그렇다면 서사(narrative)란 무엇일까?
사건의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여기에서 사건은 시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건들의 변화가 있기에 우리는 시간을 인식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서사는 결국 시간에 따른 변화의 과정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변화가 서술되는 방식은 인과론적이다. 하나의 사건의 결과가 또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는 식으로, 인과론적인 정합성을 견지하여 서사는 이루어진다.
때문에 이러한 서사의 방식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유익은 바로 안정성이다. 서사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터전 위에 지금껏 세워져온 것처럼, 또 그에 따라 미지의 미래 또한 어느 정도 예측가능한 것처럼, 인간은 안정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늘 어떠한 이야기[서사] 위에 자신을 정립시키고자 하는 이유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늘 고통을 감수하게 되는 바로 그 이유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단지 불안하기만 한 삶보다는, 우리는 차라리 우리가 익히 알 수 있는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고통의 통속극은 끝없이 반복된다. 집집마다, 세대마다, 공동체마다, 늘 비슷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비슷한 고통이 재생산된다.
이것을 무의식의 구조로 본 프로이트는 정확했다. 구조는 이야기가 만드는 것이다. 무의식 자체가 인간에게 세습되어온 이야기다. 융은 나아가 이러한 무의식의 이야기들을 더 많이 향유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현재에 적합하지 않아 오히려 역기능을 일으키는 나쁜 이야기를 좋은 이야기로, 나아가서는 더 좋은 이야기로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역동적 관점에 근거한 세력들이 갖는 전제는 결국 "이야기가 인간을 만들며,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더 좋은 인간존재란 더 좋은 이야기로 인해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을 살짝 변주하면, 더 좋은 인간존재는 더 좋은 구조로 인해 만들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신역동은 정치공학이 된다.
그러나 가장 명확한 것은, 어떠한 정치공학도 인간의 존재감을 담보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구조도, 또 어떠한 이야기도 인간의 존재감을 담보해주지는 못한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정말로 실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이야기 위에 자신을 세운 뒤, 마치 연극배우처럼 그 이야기가 요구하는 특정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로 인해, 이야기가 존재 앞에 서게 된다. 통속적인 서사구조가 신비로운 사실존재에 선행하게 된다. 삶이 몰락하는 사태다. 이러한 경우, 삶은 이제 그 재기의 생동감을 잃고, 빽빽히 채워나가야 할 방학숙제와 같은 것으로 탈바꿈한다.
이와 같은 무의식-구조-서사의 중요성을 주장한 학자들의 대다수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의미깊다. 탈출구 없는 미로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스스로 질식한 것과 같다. 또 그러한 미로의 이야기 위에 자신을 세워놓고, 우리는 스스로의 숨통을 조여간다.
이러한 이들에게 삶이란 단지 '버텨야 할 것'이다. 근본적인 허무주의적 정조가 낳은 소영웅주의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히틀러와 그 당시의 독일의 집단정신이 정확하게 이러했다.
소영웅주의가 가장 잘 발현되는 영역은 바로 게임이다. 그래서 삶을 버텨야 할 것으로 사는 이는, 곧 그러한 이야기에 자신의 존재감을 위탁한 이는, 삶을 게임으로 살게 된다.
게임이란 승패를 가르는 정교한 규칙이 있는 놀이다. 곧, 모든 게임은 근본적으로 대립과 갈등의 속성을 갖는 투쟁이다. 이 투쟁 속에서만 소영웅주의는 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임을 하는 이는 언제나 투쟁할 적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허무한 자신의 삶에 조금은 생동감이 돌아오고, 그로 인해 자신의 존재감을 작게나마 실감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정치공학이다. 늘 끝없이 적을 만들고, 정의를 주장하며, 투쟁의 마당놀이극을 펼치는 정치공학자들, 그리고 그 지지자들은 다 게임중독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한 이들이다. 실존을 망각한 이들이다.
이것은 흡사 자신의 삶이 지루하다고 온 세상에 싸움을 거는 모습과도 같다. 그는 누구인가? 히틀러와 제3제국의 후예다. 위대한 정의와 진보의 서사 위에 자신을 주인공처럼 위치시킨 채, 그 게임 속 이야기를 현실이라고 믿으며, 거룩한 '자기편'의 승리를 위해 무수한 사람들을 게임판 속에 몰아넣으며 남용하고 착취하는 이다. 정치지상주의를 주장하며 모두가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변해 정치라는 단어를 열렬히 외치기를 바라는 정치병 환자들이 이와 같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장 나쁜 이가 악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지루한 이가 악마가 된다. 가장 지루한 것은 무엇인가? 니체는 분명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지루한 것, 그것은 바로 정치병 환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적 선[정의]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이 지루한 것을 알기에 게임을 하는 것이다. 정치병 환자들의 언행불일치는 여기에서 나온다.
이처럼 가장 사회적 선을 주장하는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지루함을 느끼는 이들이며, 곧 그래서 그들은 실제적인 악마가 된다. 악마는 영혼을 강탈하는 존재로 비유된다. 영혼이란 곧 생명의 에너지다. 정치병 환자들은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이 정치밖에는 없는 것처럼 쉴새없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관심을 집중시키고, 그렇게 수집된 사람들의 에너지로써 자신들의 지루함을 망각하기 위한 게임판을 지속할 동력으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악마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 서사는 악마가 활용하는 최고의 도구다.
이 도구가 작동하는 방식은 최면이다. 특정한 이야기에 위탁하지 않으면 개인이 정당하게 존재하지 못할 것처럼 구조를 세움으로써, 그 구조가 유지되게끔 하는 모든 일에만 개인이 자신의 생명력을 투여하며 살도록 만드는 것이다. 민족, 국가, 가족, 공동체, 조상, 전통, 정의, 혈통, 민주주의, 평등 등의 개념들은, 이러한 최면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도록 촉진하기 위해 준비된 고급언어들이다.
최면은 피험자가 동의했을 경우에만 작동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사람들이 최면에 동의함으로써 그 최면의 서사가 진짜인 것처럼 작동시키는 이유는 거기에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감의 이득이다. 즉, 최면이 제공하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그에 따라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하거나 망각한 이들이, 최면이 만들어내는 서사에 취해 존재감을 얻으려고 하는 이 현상을 우리는 우상숭배라고 부른다. 우상숭배의 정의는 단순하다.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서사는, 구조는, 게임은, 정치는, 최면은, 절대로 줄 수 없다. 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죽음 앞에서도 사라질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명징한 존재감을.
서사는, 구조는, 게임은, 정치는, 최면은, 필연적으로 죽음 앞에서 모조리 다 해체된다. 아무리 대단하고 신성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죽음은 그 모든 이야기의 부질없는 허상성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킨다. 그 어떤 이야기도 결코 죽음 앞에서 개인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개방시킨다. 하이데거는 정확하게 이를 묘사했다.
평생 동안, 특히 뜨거웠던 젊은 시절을 거대한 이야기에 취해온 이들이 노년기에 접어들어 도저히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이야기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더욱 악착같이 자신들이 근거해온 그 이야기를 보존하고 또 확장하고자 한다.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서사구조를 받아들여 그 구조를 존속해주기를 바라게 된다. 그렇게 자신들이 지켜온 서사가 유지되면, 그에 따라 마치 자신들도 불멸할 것처럼 기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한국의 상황이다.
서사에 취해 실존을 까마득하게 망각해온 이들이, 이제 자신들의 실존을 실감할 수밖에 없게 된 이 순간, 다시 망각으로의 회피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를 자신과 같은 얼굴로 만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의 용사로서 승패감이 주는 짜릿한 전율에 취해 있는 게임 속 캐릭터와 같은 얼굴로.
모든 것은 죽는다. 이 말은 어떠한가?
당연하다. 이것은 생물학적 사실이다.
모든 것은 정치다. 그렇다면 이 말은 어떠한가?
당신에게만 그렇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서사중독자에게만 그러할 뿐이다.
실존과 서사는 이러한 문제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 비극적인 사태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존재감을 실감해보지 못한 이가, 이제 죽음을 준비해야 할 장에 들어선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즉, 하루도 제대로 그 자신의 몸으로 뛰어놀아보지 못한 아이가 이제 여름방학이 끝나간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들은 것과 같은 일이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이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방학숙제만에 매달린 채 다 같이 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어르고 협박하는 진정 비극적인 기획을 시도하는 일이다. 곧, 악마가 하는 일이다.
이 비극을 멈추기 위해 요청되는 것은 오직 하나, 정직성일 뿐이다.
실존은 언제나 정직성의 문제다.
사실적으로 도무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를 모르면 되는 문제다. 그 사실에 정직하면 되는 문제다.
우리가 마치 민족의 사명을 위해, 어려운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정의의 용사가 되기 위해,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 조상들의 얼을 이어받기 위해, 선비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한반도를 빛내기 위해 등과 같은 이유를 실현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말하는 그 모든 거짓말을 멈추면 되는 문제다.
즉, 자신이 정말로 왜 태어났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실존의 신비를 기만하는 일을 멈추면 되는 문제다.
그리고 나아가 정직성은 이렇게 자각될 필요가 있다.
"내가 해온 그 모든 일은 전부 다 내 자신을 위해 해온 일들이다."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내 자신의 모습에 행복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의 고통을 향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는 모습을 보며 편안해질 수 있는 내 자신의 마음을 향해서였다.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을 위해서만, 또 향해서만 산다. 이것은 이기주의가 아니다. 잘못된 일이 아니다. 정직한 일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남을 위해 사는 척 할 때, 자신은 투명한 것처럼 위장하고 숭고한 대의를 향해 사는 척 할 때, 언제나 언행불일치가 생겨난다. 내로남불이 된다.
이것은 모종의 냉정한 현실주의자의 이야기나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와 붓다의 이야기다.
성경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보라."라고 하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자신의 몸에 상냥할 수 있어야, 타자에게도 상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착취하는 이는 동일한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타자 또한 아무 자각없이 착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델포이 신전의 신탁은 소크라테스에게 "네 자신을 알라."라고 전했던 것이다.
생명이, 곧 삶의 명령이, 내 자신을 위해, 또 내 자신을 향해 이미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것이 곧 실존이다. 그렇게 삶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게 된 것이 바로 실존이다. 이처럼 내 자신이 가장 우선되는 고귀한 것임을 실감할 수 있어야, 타자 또한 그처럼 고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다.
여름방학 동안 신나게 논 아이는, 다른 아이들을 놀지 못하게 괴롭히지 않는다. 오아시스에서 물을 충분히 마신 이는, 다른 이들이 물을 마실 수 없게끔 끝없이 사막에서 헤매도록 하지 않는다. 이와 같다.
자신이 먼저 채워져야 정의를 주장하지 않게 된다. 이 말은, 자신이 먼저 채워져야 악마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사실을 평생동안 일관되게 전한 이가 바로 붓다다.
붓다에게는 악의 개념이 없었다. 붓다는 더 정확하게 그것을 묘사한다. 그것은 바로 환상이다. 꿈이다. 이야기다.
스스로를 채우지 않는 이가 꾸는 꿈, 그것이 붓다가 본 악의 실제였다. 스스로를 채우지 않은 그 결핍감으로 인해 생겨난 증오와 원망을 이제 정의의 이름으로 바꾸어 모든 이가 결핍되도록, 곧 자신과 같은 고통을 체험하며 살도록 종용하는 그 꿈이, 바로 이 세상에 고통이 끊이지 않고 전파되는 이유라고 진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제안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도록 안내한다.
그 어떤 이야기와도 아무 상관없이, 즉 그 모든 이야기가 없더라도, 우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돌아보도록 꽃을 들어 미소짓는다.
모른다. 왜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이토록 명징하게 존재하고 있다.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눈부신 향기로 가득하다. 이것이 존재의 신비다. 붓다는 그 신비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며, 우리를 향해 미소지은 것이다.
이러한 언술들에 대해, 정치병 환자들은, 서사중독자들은, 낭만적인 판타지 소설일 뿐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들의 자기투사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기에 낙수효과와 같은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때문에 공정한 사회정의에 입각한 국가가 재분배를 이루어주어야 한다고, 곧 스스로 채운다고 타자 또한 채워지게 되는 아름다운 일은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을 여전히 견지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중독자들은 끝없이 존재를 환원시킨다. 그 이상의 것을 늘 그 이하의 것으로 축소시키는 일을 거듭한다. 인간을 우습게 보는 이들이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결여된 이들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그들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들의 그들 자신에 대한 시선이 곧 인간에 대한 시선이 되는 셈이다.
채운다는 것은 존재감의 문제다. 돈을 스스로 채운 이가 타인에게도 돈을 나눠주게 되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일은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돈을 채우는 이는, 자기 존재감의 결여를 돈이라는 대상을 통해 대신 채우려고 하고 있는 까닭이다. 즉 "돈이 있는 자는 충만한 존재가 된다."와 같은 서사를 소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까닭이다.
이 모든 것은 다 인간을 결핍된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다. 모든 서사는 결핍된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작동하는 것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와도 같다.
그러나 스스로를 채운다는 것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감수성이다. 스스로를 채운다는 것은, 이미 채워져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것이 실존에서 말하는 "이미 존재한다."의 함의다.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나 부족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부족한 존재에 대한 자화상은 서사가 만든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삶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고, 남의 삶만을 보며 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이들이 창작해낸 허구의 것이다.
이 허구의 결핍감을 끌어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허구의 서사를 만들어내어, 그 서사적 규칙으로 작동하는 허구의 게임판 위에 모두를 끌어들여, 실제적인 고통을 더 광범위하게 끝없이 양산하는 일, 이것이 바로 지옥의 일이다.
자신의 삶을 발견하려 하지 않는 이가, 곧 실존을 망각한 이가, 어떻게 거대한 지옥을 만들게 되는가의 실증적인 과정이다. 붓다의 묘사와 같다.
지옥에서 신이 나는 것은 지옥의 옥졸들 뿐이다. 지옥이라는 게임의 운영진들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사악한 이들로 보이지 않는다. 지옥의 옥졸들은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러나 피치못해 '너를 찌르면 나도 아프다.'의 심정으로 찌른다는 식의 단호하고 애절한 인간적 표정을 지으며, 마치 사탕을 많이 먹어 이가 썩은 나쁜 아이의 입을 벌리는 천국의 치과의사의 표정을 지으며, 창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한결같이 이처럼 말한다.
"정의의 이름으로."
이제 이 서사를 끝내야 할 때다.
그 어떤 서사도 우리에게 존재감을 제공할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의 온전한 존재감은 그 모든 서사에 앞서 이미 우리에게 허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때다.
더는 우리의 한 번뿐인 귀한 생명의 에너지를, 서사중독자들의 중독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한 허구의 게임판에 그만 바쳐야 할 때다.
이야기는 다만 재미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밖의 삶은 더 재미있는 것이다. 우리가 앞선 통속적 이야기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삶이 이 세상에 처음 생겨난 고유한 이야기가 되는 것, 이것이 삶의 재미다. 실존이 언제나 서사에 선행한다. 곧, 특정한 보편적 이야기가 지시하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내가 가는 곳이 그대로 단 하나뿐인 길이 되어 이야기로 전해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며, 단 한 번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나는 그 전까지 단 한 번도 있지 않았던 것이라는 의미다.
이보다 더 거룩한 존재의 의미는 없다. 그 긴 우주의 역사에서도 단 하나뿐인, 그래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가, 비교될 수도 없는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나는 바로 이 놀라운 사태다. 대답될 수 없는 사태다. 대답될 수 없다는 것은 이야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자체로는 직접적으로 이야기될 수 없는 불가지한 사태다. 어떠한 이야기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이 사태, 때문에 그 모든 이야기를 넘어서 펼쳐지는 절대적으로 존귀한 사태, 이것이 실존이다. 미지의 여름방학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