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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없어'를 호소하는 그대에게

"오병이어의 기적"

by 깨닫는마음씨



그대여, 그대만 없는가?


좋고, 훌륭하고, 멋있는 것들은 전부 다 그대만 혼자 남겨둔 채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은가?


그렇게 그대는 "나만 없어."를 호소하고 있는가?


그대가, 그대만 없다고 느끼는 이 현실에 대해 해온 간절한 노력들이 얼핏 짐작된다.


그대는 이와 같았으리라.


이를테면, 다들 귀여운데, 그대만 귀엽지 않다고 느끼던 그대는, 귀여운 사물들을 많이 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 주변에 늘어나는 그 사물의 양만큼, 그대 자신은 더 크게 비교되어, 그대는 스스로가 점점 더 귀엽지 않게 느껴졌으리라. 이른바 풍요 속의 빈곤이다.


누군가가, 대체로는 그대의 부모님이 그대에게 귀엽다는 소리를 한 3만 번쯤 들려줬다 할지라도, 그대는 잠시간 살짝 기분이 좋아질지언정 그 말이 진심으로 신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부모님은 그대가 보기에 귀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그대여, 바로 이것이 핵심이지 않았을까.


그대도 불현듯 이 사실을 눈치챘다.


말할 수 없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귀엽다."라는 말을 들어야 어떻든 간에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 그리고 그 말을 해줄 사람은 그대의 눈에 귀여운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대는 최종적인 방법론으로서 귀여운 이성을 만나려고 했을지 모른다. 그리고는 그 이성으로부터 귀엽다는 말을 듣게 된 어느날, 그대는 하늘을 날듯이 기뻤을지 모른다.


그대가 귀여운 존재로 인정한 이가, 그대를 귀엽다고 평가하는 일은, 분명 그대에게 신뢰감을 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신뢰할 수 있는 귀여움의 대가의 긍정적인 평가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이제 그대의 "나만 없어."의 고통은 머지않아 해결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대는 머지않아 분노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는 눈에 익은 그대에게 귀엽다는 말을 전하지 않는 상대에게, 영원해야 할 그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상대에게, 그대는 마치 온 우주에게 버림받은 듯한 분노감을 기어이 전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의 분노에 치여 상대가 도망간 그 자리에 홀로 남겨졌다. 그대만 또 없었다. 귀여움도, 상대도, 그대에게만 결국 없게 되었다.


그대여, 이 장대한 "나만 없어."의 역사는 단지 하나의 작은 착각이 낳은 것이다.


그대여, 정직하게 한번 떠올려보자.


그대가 귀여움의 대가로 보던 그 상대를, 혹시라도 그대의 친구들에게 소개할 기회가 있었을 때, 어쩌면 그대는 친구들의 실망으로 가득찬 얼굴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야, 별로 안 귀엽잖아."라며 일부러 들리게끔 딱 그 정도의 음량으로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아랑곳없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 눈에는 완전 귀여운데. 자기들 기준에는 안맞나보지, 뭐.'


바로 이것이다, 그대여.


그대가 그대만 빼고 다 귀엽다고 느끼던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람이 그 귀여움을 얻게 된 것은 바로 그대의 눈을 통해서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나만 없어'가 아니라 '나로 인해'라는 것이다, 그대여.


그대로 인해 그대의 세상의 모든 것이 귀여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이러한 역사였다. 그대가 귀여움의 원천이었다. 모든 귀여움은 그대로부터 나와, 그대의 눈에 귀여움으로 다시 포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대는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귀여운 상대가 그대를 떠남으로써 그대가 영영 귀여움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를 떠남으로써 그 상대가 귀여움을 잃게 된 것이다.


그대는 다만 그대가 정말로 귀여움의 원천이라는 그 작은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것은 마치, 물 자체가 물이 없다는 고통을 호소하고, 불 자체가 불이 없다는 고통을 호소하며, 빨간색 자체가 빨간색이 없다는 고통을 호소하는 것과 같다.


빨간색 크레파스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자신을 도화지라는 대상에 칠해야만 빨간색을 볼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을, 빨간색 크레파스인 그대는, 그대가 칠해서 빨갛게 된 그 도화지가 빨간색의 원천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화지라는 대상이 없어도 빨간색 크레파스는 그저 빨간색 크레파스다.


그대여, 이것은 단순한 이해의 문제다.


그대의 눈에, 그대만 빼고, 그대가 좋게 보는 것들이 가득 들어온다면,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그대가 보는 그 크기만큼 그대는 그것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다만, 그대가 허락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이미 그것이라는 사실을, 기꺼이 그것이어도 된다는 사실을.


그대가 직접 두 눈으로 볼 때까지는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고집이 그 허락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그대여, 빨간색은 결코 빨간색인 자신을 볼 수 없다. 그것은 보아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이해로 눈치채야 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그대 주변에 화내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이 화난 존재라는 사실을 눈치챌 필요가 있다. 또는 그대 주변에 섹시한 사람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이 섹시한 존재라는 사실을 눈치챌 필요가 있다.


즉, 그대가 가장 "나만 없어."라고 하는 바로 그것을, 실제로는 그대가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것이다. 넘치도록 많이 갖고 있어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펼쳐진 것이다. 분수의 움직임과 같다.


그대여,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귀여움이 그대 자신에게만 없다고 생각하던 그대가, 실은 귀여움의 원천으로서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 세상의 모든 것을 귀엽게 만들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대만 없던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해 그대를 포함한 모든 것이 그러한 모습으로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대는 그저 그러한 자신을 허락하기만 하면 된다.


모든 이에게, 또 그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이미 주고 있던 자로서, 스스로를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그대여, 결코 그대만 없지 않다. 그대로 인해 다 있다. 그대가 가장 있다. 그러한 그대가 있어, 모든 것이 행복하다.


이처럼 그대는, 그대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도, 모든 이를 배불리 먹이는 이다.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실증적으로 재현하는 놀라운 사람이다.


그대가 이처럼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아름다운 기적의 존재라는 것, 이것이 "나만 없어."가 담고 있는 실제적인 그대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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