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아우슈비츠를 붕괴시키는 삶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서 좋은 것이란 없다."
굳이 이 말의 출처를 니체로 밝히지 않는다면, 이것은 어느 선사의 말로 인용된다 해도 아무 모자람이 없다. 선의 윤리는 바로 이 다 있음(wholeness)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다 있음은 곧 다(多) 있음이다. 하나의 실체적 정답과 같은 것만 있을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애초 다 있는 것은 그대로 있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논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우슈비츠의 논리다.
"있다는 사실만으로 죽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다. 유태인은 유태인으로 있다는 사실만으로 죽어야 했다. 그 고유한 존재 자체가 문제시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고유한 우리 자신으로 있다는 사실만으로 늘 죽음의 협박에 노출되어야 하는 사태, 이것이 바로 아우슈비츠의 사태다.
그리고 선은 말한다. 바로 이 아우슈비츠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고.
우리 자신의 경험에 입각한 기준이나, 혹은 우리 자신이 추구하며 의지하는 진리와 같은 기준에 근거해, 우리는 그 기준과 다른 것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채택한 그 기준과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염증을 느낀다. 오늘날 만연한 혐오의 문제는 여기에서 생겨난다.
비단 정치권의 문제나, 인종, 세대, 성별, 계급간의 갈등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다. 더 일상적인 차원에서부터 혐오는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한 구석에서 조용히 담배를 피며 '있는 것만으로' 벌레처럼 혐오스러운 그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선은 만연하다. 타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안된 정치적 올바름의 기제는, 어느새 또 다른 전체주의적 폭력이 되어버렸다.
과거 나치에 동조한 독일인들은 자신들을 단 한 번도 악이라고 경험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의와 진리의 편에 자신들이 위치해있는 것으로 체감하였다. 아우슈비츠의 논리의 진짜 비극성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소위, 특정한 정치세력이 배양하는 사회적 정의에 도취되어, 그 사회적 정의에 배치되는 타자의 존재를 악으로 규정하며, 그 존재의 사실 자체를 사형선고의 이유로 삼는 것이다.
이는 결국, 특정한 형태의 사회가 편의상 만들어낸 편리성의 논리를, 진리성의 논리로 탈바꿈하고, 또 그 논리를 다시 절대성의 논리로 실체화하여, 무수한 다(多)의 존재에게 행사하게 되는 폭력이다.
이것을 이른바 일(一)의 폭력이라고 말한다. 아우슈비츠는 분명하게 이 일의 폭력을 그 자체로 대변하는 사태였다.
그리고 선이 가장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일(一)의 폭력이다. 그러한 폭력을 낳는 집단주의며, 실체주의고, 전체주의다. 선은 진리의 일을 향한 추상적 지향이 만들어낸 이와 같은 것들이 아닌, 오직 구체적인 인간에만 관심을 둔다. 선의 윤리는 철저하게 고유한 구체적 인간을 향한 인격성에 근거한다.
선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불교의 전통 속에서 공유되는 핵심적인 윤리적 기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불살(不殺)이다. 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어린양 한 마리조차도 결코 죽임당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죽이지 말라."라고 하는 이 선언이, 레비나스에게서는 살아있는 구체적 인간의 얼굴에서 온 것처럼, 선에서는 또한 살아있는 구체적 생명의 몸짓에서 비롯한다. 고통받는 구체적 생명의 아픔에 감응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장 인격적인 것이며, 선은 바로 이 인격성의 표현이다.
인격성은 자연스럽게 다(多) 있음을 향한다. 유연하게 다로 드러나지 못하는 인격은 인격심리학에서 인격장애로 평정된다.
그래서 선은 "진정한 일(一)과 다르게 존재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죽어야 한다."라고 하며 다 있음을 부정하는 아우슈비츠의 논리를 필연적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다. 있음을 있는대로 다(多) 있게 하려는 선의 기획과, 특정하게 획일적인 형태로 있어야만 있을 자격이 생긴다고 하는 아우슈비츠의 논리는 상극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언뜻 선이 표면적으로는 반윤리적인 것처럼 보이게도 되는 오해가 출현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원칙적 윤리의 기제는, 개인이 마땅히 있어야 할 형태의 자격을 부여하고 또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원칙적 윤리는 그 자체로 이미 아우슈비츠의 논리를 다소간에 내재한다. 때문에 선은 윤리 안에 내포된 이 아우슈비츠의 논리에 도전할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반윤리적이라는 오명을, 특히 원칙적 윤리의 지지자들에게서,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원칙적 윤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삶을 허무하게 느끼는 이들이다. 삶이 허무한 까닭에 자동으로 쾌락을 끝없이 추구하며 달려갈 것만 같은 자신들의 모습이 선연히 암시되기에, 그것이 두려워 스스로를 제어할 기제로서 원칙적 윤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또한 커다란 권위가 아니면 그 충동을 제어할 수 없기에, 원칙적 윤리에 절대적이며 실체적인 권위를 부여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선을 가장 오해하는 이들, 즉 선을 반윤리적이라고 호도하는 이들은, 흥미롭게도 선을 이와 같은 허무주의와, 그 허무주의에 대한 반동이 낳은 쾌락주의의 전통으로 보기도 한다. 그야말로 자기 투사(projection)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선을 허무주의로 읽는 경향성은, 특히나 금욕적인 초기불교적 세계관을 선으로 오해하며, 이를 유희적인 들뢰즈 식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묘하게 결합시킨 해석에서 곧잘 드러난다. 라캉 등의 정신분석적 접근을 선이랑 연결할 때 역시도, 정신분석이 근본적으로 내포한 허무주의적 세계관["개인은 다만 스스로를 창조하며 허무를 버텨가는 것이다."]에 따라 이러한 해석이 빈번하게 유발되곤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선은 근본적으로 허무한 인생 속에서, 농담하듯이 기표들을 미끄러져가며 예술적인 유희성을 창조해내는 그러한 사조와 원천적으로 거리가 멀다.
선은 창조하지 않는다. 다만 창조된 것들에 감사한다. 또한 선은 예술하지 않는다. 다만 삶이 빚어낸 인간이라는 예술에 감탄한다.
선을 특정한 사조로 굳이 수식하자면, 경외주의(aweism)라는 표현이 아마도 가장 적절할 것이다. 선은 더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몰라지려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이트에서 시작된 정신역동적 접근의 세력들이 핵심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모르는 무의식을 더 알아야 한다."라고 하는 관점과 전적으로 배치된다.
간명하게, 비트겐슈타인이 "세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세계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신비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분명히 선의 태도를 함축한다.
그래서 선에 어울리는 표현은 유희가 아니다. 감동, 감사, 감탄과 같은 것들이다. 때문에 스즈키는 선을 다만 느낌(感)이라고만 말한다.
다(多)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동, 감사, 감탄, 바로 이것들이 선의 윤리의 근거다. 이것을 낭만적인 언술로 표현하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네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기쁘다."
그리하여, 선가에서 찾아오는 이를 환대하며 차를 대접하는 끽다거의 전통은 생겨났다. 레비나스만큼이나 선은 타자를 환대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곧, 선은 그 자체로 윤리적이며 인격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명확하게 해야 할 지점은, 선의 윤리는 원칙윤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선은 덕윤리의 범주에 속한다.
선이 종종, 실체화되어 진리처럼 작동하고 있는 우상을 해체하고자 하는 이유는, 인간을 속박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하게 된 원칙윤리를 깨고, 덕윤리로의 전환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외재적인 일(一)에서 비롯한 원칙성이 아니라 스스로의 다(多)에서 비롯한 책임성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곧, 니체와 같은 윤리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라고 하는 말 자체에 개인이 진리처럼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현실을 파기하고, 레비나스처럼, 떨고 있는 구체적인 타자의 얼굴 앞에 그 개인을 세운다. 그럼으로써 "정말로 너는 죽일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개인을 개방되게끔 한다.
이러한 것이 선의 도전이다. 이를 파격(破格)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파격적인 것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선은 파괴된 폐허 속에서 몰락해가는 숭고한 비장미에 전율하는 게르만식의 영웅주의가 아니다. 데카당스 또한 아니다.
선의 파격은 물줄기를 가로막고 있던 격자를 깨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수원(水原)에 닿는 것이다. 깨서 닿는다는 깨달음의 의미는 이와 같다.
일(一)의 주체의 앎을 깨고, 다(多)의 타자의 삶에 닿는 일, 이는 종교철학적으로 선의 깨달음을 정의할 수 있는 충분한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적인 차원에서 어찌 윤리적이지 않을 수 있으며, 인격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체적 인간은 사회가 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 자체가 그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가 무용하다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이를 유연하게 은유하자면, 삶이 사회를 시켜 개인을 살린다는 그림으로도 묘사할 수 있다. 신이 구조선을 보내 물에 빠진 사람을 살린다는 그 은유다.
때문에 삶이 이미 그 존재를 허락하고 있는 그 어떤 인간도, 특정한 사회가 획일적 진리처럼 행사하는 원칙적 윤리와, 그에 내재된 아우슈비츠의 논리에 의해 희생될 수 없다.
인간이 존재할 권리는 사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삶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래서 선은 삶의 윤리다.
고유한 다(多)의 삶을 더욱 살림으로써, 우리 내면의 아우슈비츠를 그 통렬한 삶의 물길로 붕괴시키려는 삶의 윤리다.
곧, 삶이 정성스럽게 살리고 있는 어떠한 인간도 버리려 하지 않는 것, 그렇게 결코 버림받을 수 없는 그 인간이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