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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이를 괴롭히는 그대에게

"자기표현의 의미"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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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대가 부모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 배우자이든, 자식이든, 선생이든, 그 누구이든 간에, 그대의 고질적인 문제는 그대가 좋아하는 상대를 늘 괴롭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대는 상대를 시험하고, 통제하며, 피를 말린다. 그리고 그대가 바로 그러하다는 사실을 그대 자신도 안다. 아는데 멈출 수가 없다. 그대가 애착을 갖게 되는 상대에게는 늘 이와 같은 일이 불가피하게 반복된다.


그래서 그대는 끝내 그대 자신을 다른 누군가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구제불능의 문제아로 느끼기까지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안되는 저주받은 존재인듯도 싶다.


그대여, 이 모든 일은 어찌하여 이렇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대가 상대를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너무나 좋아하는 이는 반드시 그 상대를 가지려 하게 된다. 사탕을 너무나 좋아하는 이가 사탕을 먹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사탕을 먹는다는 것은, 사탕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대는 상대를 너무나 좋아하기에, 상대를 가지려 하고, 상대와 하나가 되려 한다. 곧, 그대를 상대로, 상대를 그대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를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대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대는 바로 그 상대가 되고 싶어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대는 상대가 되기 위해, 상대를 흉내내고,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려고도 해보며, 상대의 말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여해 그 말처럼 살려고도 한다.


소위, 상대를 모방하게 되는 것이다. 모방을 통해 그대는 상대와 가까워지고, 나아가서는 상대와 똑같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상대와 똑같이 됨으로써 그대는 상대의 사랑을 영구하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대의 모습은 마치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과도 같다. 귀엽지만, 사실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길이다.


이것이 이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길이기에, 그대는 결국 상대를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아무리 상대를 모방하려고 노력해도, 상대는 그대가 처음에 목표로 설정했던 그 모습에서 벗어나 거듭 다른 모습을 보이기에 그대는 짜증이 나는 것이다. 다가갈 수 없는 것을 향한 그대 자신의 계속되는 노력에 지치고, 그대의 두 손에 붙잡히지 않는 상대가 원망스러워진다.


그래서 모방을 통해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던 그대는, 끝내 이 모든 좌절의 이유가 상대 때문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모방의 방법론 자체가 그 좌절의 이유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늘 억울한 피해자처럼 다음과 같은 대사를 발화하게 된다.


"나는 노력했는데, 너는 너 좋은 것만 하고 아무 것도 안했잖아."


그러나 그대여, 그대는 여기에서 정말로 정직할 필요가 있다.


그대는 단 1mm도 상대에게 다가간 적이 없다. 심지어 그대는 상대를 똑바로 본 적도 없다. 상대가 대체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대는 오직 그대가 정해놓은 모방상만을 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상대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곳에서, 열심히 혼자 조각상만을 파왔을 뿐이다. 그리고는, 왜 그대가 열심히 노력해서 만든 이 조각상의 모습과 다르냐며 상대를 힐책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처럼, 그대가 좋아하는 상대를 괴롭히는 구체적인 표현은, 그대가 그 상대를 마치 게임캐릭터처럼 설정한 임의적인 조각상으로 만들려고 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에 따라, 상대는 자신이 조각상이 되지 않은데서 비롯한, 영문모를 죄책감과 자괴감을 뒤집어쓰고 고통받게 된다.


그대여, 모든 생명은 고통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하는 법이다.


때문에 고통의 촉발자인 그대에게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는 그 어떤 상대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연법칙이다.


진정한 사랑은 아무리 괴로워도 자신의 곁에 머물러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억울하게 항변하는 그대여, 이것을 한번 생각해보자. 진정한 사랑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괴롭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대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두 발로 걷어 차며 부정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그대를 찾아올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은 없다. 그대가 격렬하게 부정하고 있는 그 모습 자체를 존중하며, 그 의도에 따라 그대의 곁에서 물러나는 것이 곧 진정한 사랑이 행사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사실 좋아하는 상대를 가장 가까이에 두고 싶은 것이라면, 즉 상대가 되고 싶은 것이라면, 그대여, 이제는 정확한 길로 향해보자.


그대가 좋아하는 상대가 되는 길은 결코 모방이 아니다. 모방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다.


그 길은 오직 하나, 그 상대가 가진 삶의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이럴 때 어떻게 할까?"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했을까?"

"그 사람은 여기에서 무엇을 바라볼까?"


그 상대가 가진 삶의 질문을 우리가 물어보며, 동시에 그 질문을 머금을 때, 그 질문을 통해 비로소 그 상대의 삶의 향기가 우리에게로 스며든다.


핵심은 이것이다.


삶의 물음 앞에 그 상대가 내놓은 대답을 모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가 대답하고자 했던 그 삶의 물음을 그대의 것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그것이 상대와 하나가 되는 길이며, 곧 상대가 되는 길이다.


삶은 물음이며, 그 물음을 공유함으로써, 그대는 상대와 하나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표현의 의미다.


자기표현은 상대와 관계없이 자기 언행만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각상의 논리다.


자기표현은 바로 "우리 자기야."를 표현해주는 것이다. 곧, '우리 자기'인 상대를 표현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를 그대의 자기로 삼아, 상대의 삶을 그대의 삶으로 삼아, 그 하나된 물음에 그대가 대답해나갈 때, 그것이 곧 자기표현이 된다. 그대가 좋아하는 상대를 정말로 가질 수 있는 길이 된다.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길이 된다.


그러한 그대로 말미암아, 상대는 그대의 "영원한 자기야."가 된다.


그대여, 한번 생각해보자. 다시 한 번, 삶은 물음이다.


자신의 물음을 공유하고 있는, 곧 자신의 삶을 공유하고 있는, 나아가서는 "그 삶이여, 영원하라."라고까지 하고 있는 그대의 곁에, 그 어떤 누가 대체 어찌 머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한 그대의 모습이 바로 그대가 꿈꾸던 진정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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