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와 풍토의 이해: 운동권 서사로부터의 졸업"
마음은 기후와 풍토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즉, 마음은 환경에 좌우됩니다. 생명과 환경의 상호작용이 마음인 까닭입니다.
여기에서 환경이란 자연환경뿐만이 아니라 사회환경 또한 의미합니다. 하나의 사회가 조성하고 있는 기후와 풍토 속에서 마음은 자연스럽게 그 환경적 조건을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곧잘 이렇게도 말하곤 합니다.
"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이렇게 돼."
비가 자주 오는 기후 속에서는 '나도 모르게' 자꾸만 옷이 젖게 되는 그 이유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영향을 주는 사회환경은 바로 서사(narrative)가 만들어냅니다. 하나의 사회가 현재 채택하고 있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사회적 기후와 풍토가 되어 마음에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사는 언제나 마음의 위에 서려는 경향성을 갖습니다. 이 말은, 서사는 근본적으로 마음을 임의적인 방향으로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속성을 내포한다는 말입니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정말 그러한 현실'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 그 방향성을 결정합니다. 즉, 서사는 마치 설계도처럼 작동하며, 모든 마음은 그 설계도를 실현하기 위한 부품으로 활용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외라는 현상입니다.
서사가 마음을 지배함으로써 야기되는 마음의 아픔이 바로 소외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라는 표현과 '마음이 소외되었다.'라는 표현은 동의어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 라고 우리가 말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소외가 있습니다. 사실은 사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닙니다. 서사가 부여하는 과업을 마치 매일매일 숙제하듯이 하고 있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소외되어 아프기에,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고통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힘든지를 이해하려면, 마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기후와 풍토가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드러내고 있는 기후와 풍토는 무엇일까요?
바로 정의로움의 기후와 올바름의 풍토입니다. 이러한 사회환경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새 정의와 도덕에 젖어, 필연적으로 자신과 타인을 그 기준에 따라 심판하고 관리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말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각박해집니다. 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현실이 도래합니다.
분명 이러한 기후와 풍토를 만들어내는 서사가 있습니다.
이를 임의적으로 운동권 서사라고 이름붙여볼 수 있습니다. 아직 졸업하지 못한 학생들의 서사입니다. 영원히 학생이고 싶어하는 이들의 서사입니다.
이 운동권 서사는 크게 세 원리를 기반으로 작동합니다.
"반드시 적이 있다."
"삶은 고고한 선비처럼 버텨내야 하는 것이다."
"모두가 한마당인 축제가 다가올 것이다."
반드시 지상낙원이 도래할 것이라는 목적론적 믿음이 이 운동권 서사를 견인하며, 그 믿음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두 축이 작동합니다. 한 축은 한낮의 태양처럼 노골적으로 선포되며, 다른 한 축은 달도 없는 밤처럼 은밀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전자의 이름은 바로 희생이며, 후자의 이름은 바로 쾌락입니다. 희생이 쾌락을 정당화하고, 쾌락이 희생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양자는 상보적입니다. 대의를 품은 선비처럼 열심히 헌신한 후에는, 이성과의 향락 가득한 술자리가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이를 정당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표현 그대로, 낮에는 공부라는 이름의 희생을 이룬 만큼, 밤에는 달콤하고 뜨거운 쾌락의 시간이 다가오기를 바라는 학생의 소망이며, 학생의 서사입니다.
이러한 상보적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기제를 바로 쾌락주의라고 부릅니다. 희생으로 말미암아 지연된 자극은 더 큰 쾌락을 만들어내며, 그렇게 더 커진 쾌락이 더욱더 희생을 종용함으로써, 삶의 모든 국면이 쾌락을 극대화하는 일에만 수렴되는 이 현실이 쾌락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입니다. 곧, 축제의 현실입니다.
축제에서 도덕과 올바름이라는 언어가 소비되는 이유는 그것이 짜릿하기 때문입니다. 쾌락을 주기 때문입니다. 축제를 더 열광되게 만들며, 축제의 불길이 꺼지지 않게 하는 촉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마녀사냥은 분명 이러한 의미에서의 축제였습니다. 희생과 쾌락의 원리가 만들어낸 쾌락주의의 현실이었습니다.
이 축제의 현실에서, 도덕과 올바름에 따른 인내로 자신을 희생시키고, 또한 도덕과 올바름에 따른 심판으로 타인을 희생시킴으로써 쾌락은 가장 극대화될 수 있었습니다. 역시나, 음모론처럼 반드시 숨어 있었던 '나쁜 적'이 끌려나와 돌을 맞고 불태워짐에 따라, 정의와 올바름의 편에 서있던 자신이 느끼는 짜릿함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짜릿한 쾌락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 강렬함에 중독되어 결코 축제가 끝나지 않을 수 있기를 갈망하게끔 만들었던 이 쾌락의 정체는 바로 아드레날린입니다. 포식자에게 쫓기던 피식자가, 전경과 술래잡기를 하며 내달리던 학생이, 고압적인 전쟁세대의 부모에게 반항하던 청소년이 경험하던 뜨거운 기운, 바로 '나는 살아남았다!'라며 전신을 타고 흐르던 그 실감, 우렁찬 아드레날린의 폭발입니다.
이것은 결국 쾌락주의의 운동권 서사가 그 근간에 어떠한 마음을 담고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확인시켜줍니다.
그 마음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죽을 것 같이 두려운 마음입니다.
권위적 부모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비루하고 수치스러워, 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그러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경험한 이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그 두려움이 또한 부모가 가진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다만 부모가 자신을 두렵게 만든다고 생각하며, 이에 저항하는 데, 또 이를 극복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습니다. 실제의 자신의 부모 대신에, 추상적이고 거대한 '나쁜 부모'를 만들어 이를 적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나쁜 부모를 무너뜨리면 자신의 두려움이 극복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이끌린 결과, 이들은 쾌락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을 가장 두렵게 만드는 그것이 역설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쾌락을 주는 소재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이들의 진짜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부모와 그렇게 술래잡기를 하며 들판을 뛰어다니고, 레슬링을 하며 방바닥을 구르듯이, 가장 뜨겁게 접촉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살가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부모에게 온 몸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즉, 자신이 저항하며 아드레날린을 불태우고 있는 부모로부터 그토록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바로 이 사실이 자신에게 가장 인정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정받고 싶기에, 곧 사랑받고 싶기에 두려워집니다.
때문에 자신이 이처럼 인정받고 싶다는 사실이 인정되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두려움 또한 인정되지 않게 됩니다. 두려움이라는 마음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소외되는 것입니다.
운동권 서사에 빠진 이들은 그래서 자신이 두렵다고 말하는 대신에, 저기에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음모론을 통해 어떻게든 적을 만들어냅니다.
그 적은 물론 자신이 두려워하는 자신의 부모를 대신할 상징물입니다. 이렇게 사악한 부모와 같은 상징물을 설정함으로써 얻는 최상의 이득은, 자신이 부모에게 경험한 불쾌한 것들을 그 상징물에게 뒤집어 씌우고, 자신의 부모는 좋은 사람인 것처럼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실제의 자신의 부모와는 사이가 좋아진 것 같은 연출을 한 뒤, 이제 자신은 부모를 극복한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극복된 것은 없습니다. 분열시킨 것뿐입니다. 분열을 통해 유예시킨 것뿐입니다. 부모로부터의 졸업을, 축제로부터의 졸업을, 곧 두려움으로부터의 졸업을.
이것이 오늘날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운동권 서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 서사는 두려움이라는 하나의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마음은 소외됩니다. 그리고 소외된 마음은 분열을 만듭니다. 그렇게 생겨난 분열을 마치 분열이 아닌 것처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서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를 소비함으로써, 마치 축제처럼 모든 것을 흥분과 열광이 지배하는 아드레날린의 전당으로 탈바꿈하려 한다 해도, 그 도취 속에서 자신의 두려움을 망각해보려 한다 해도,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부모로부터 졸업하려 하지 않는 한, 여전히 미워하고 공격할 부모를 필요로 하는 한, 부모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은 다시 이렇게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여전히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는 한, 부모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 큰 척, 이제는 오히려 자신이 부모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는 존재인 척 하지만, 여전히 외부에 나쁜 부모로서의 상징물을 두고 그것을 미워하고 있다면, 아직도 자신은 부모로부터 졸업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사실에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운동권 서사에 빠진 이들은 착한 아이들입니다. 착한 학생들입니다. 부모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인정하면 혹여나 부모가 나쁜 사람이 될까봐, 어떻게든 외부에서 가상의 나쁜 부모를 만들어 자신의 부모는 좋은 사람으로 지키고자 하는 여리고 순수한 청소년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가족만을 착한 가족으로 만들려는 의도는, 반드시 다른 가족들을 아프게 만듭니다. 자신을 고고하게 유지시키기 위해 소외한 마음은 분열의 서사가 되어 반드시 다른 이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그것은 자신의 집에 비가 오는 게 싫다고 남의 집에 비를 내리게 하는 일과 같기 때문입니다.
적이란 것은 정녕 없습니다.
삶은 버텨야 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열광과 도취의 축제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습니다.
서사는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비를 맞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도, 적도, 자신의 부모도, 자신이 소외시킨 마음을 대신 떠맡고 있는 나쁜 부모도, 모두 같이 비를 맞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비입니다. 마지막 눈물입니다.
학교를 떠나는 학생이, 부모를 떠나는 아이가, 축제를 떠나는 그대가 이제 졸업의 송사로서 정말로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마지막 마음입니다.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마음은 생명과 환경의 상호작용입니다. 그 어떤 환경에서도, 그 환경을 사랑했던, 또 그 환경으로부터 사랑받았던 생명의 고백입니다. 곧, 마음은 고백하는 마지막의 사랑입니다.
졸업의 유예가 아니라, 바로 졸업을 통해 우리가 사랑했던 것은 영원한 것이 됩니다.
마음이 언제나 마지막의 마음인 이유는, 곧 마음이 언제나 졸업의 마음인 이유는, 마음은 바로 이 영원을 향해서만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작용입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우리는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기후와 풍토 속에서도, 그 기후와 풍토를 통해, 이처럼 사랑은 계속됩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