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심리학 #3

"방향성의 전환: 더 깊은 심리학을 향하여"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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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심리학이라는 명칭은 대단히 교조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영토에서 저마다 한번쯤은 'OO 상담소' 'XX 심리학' 등의 이름을 걸고, 마치 인간의 마음에 대한 전문가로서 자임하며 활동한 적이 있다는 면면들만 봐도 이 점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마치 하늘의 계시를 읽는 고대의 무당처럼, 천문을 보며 운명을 파악하는 선비처럼, 오늘날의 심리학 활용자들의 지위가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이해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간이 좀처럼 알 수 없는 고급스럽고 비밀스러운 힘을 다루는 오컬티스트로서의 권위가 살포시 심리학이라는 분야에 덧씌워집니다.


이러한 힘에 대한 추구의 현상이 심화되는 데는 사주, 점성술, 마법, 고대의 지혜, 타로, 풍수지리, NLP, 최면, 채널링 등과 같은 유사심리학의 소재들이 한몫을 거듭니다. 저마다 심리학이라는 이름을 차용하여, 자신들이 보다 진정한 비밀의 힘을 해명할 수 있으며 또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 힘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경쟁을 펼칩니다. 심리학의 경계는 갈수록 흐려지며, 그 본질은 마치 더욱 효과적인 힘을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일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심리학계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을 무척이나 경계합니다. 그래서 더욱 엄밀성을 담보하여 연구를 수행하며, 그 과정 및 결과를 정교하게 수치화하려고 합니다. 검증과 재현이 가능한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의 경계를 명확하게 설정함으로써 그 남용을 막으려는 윤리적 노력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크게 효과적이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애착이론이라는 판타지는 무수한 부모들에게 더 많은 죄책감을 이식하고 있으며, 삶이 조금이라도 힘들다 싶으면 귀결되는 트라우마의 이야기는 술자리에서 널리 울려 퍼지고, 특정한 정치성향을 가진 연예인이 청소년 강연에서 주장하는 정신분석적 개념들은 맥락도 없이 선동을 위해 무비판적으로 소비됩니다.


힘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큰 만큼, 문제도 커집니다. 즉, 이처럼 힘을 원하는 이들이야말로 실제로 우리 삶의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는 이들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만들어내어 우리에게 넘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식입니다. 자신들이 힘 있는 자로 유지되기 위해서 계속 상대를 문제있게 만드는 방식, 이것이 바로 힘의 남용입니다.


힘의 남용이 큰 만큼, 윤리적 감수성은 더욱 요청됩니다. 오늘날 심리학의 상황이 이렇습니다. 물론 학계심리학과 대중심리학을 수준차로 구별해버리면 많은 것이 편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심리학은 스스로를 협소한 영토에 세우게 되는 셈입니다. 그보다는 이미 굴절된 심리학이라는 언어의 용법에 대해, 그 굴절이 왜 발생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 더 의미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야 심리학의 가능성이 더욱 분명하게 개방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굴절이 발생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마음의 속성 때문입니다.


마음의 대표적인 속성,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비가시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비실체성을 의미합니다. 즉, 잡을 수 없고, 고정시킬 수 없으며, 때문에 형용하기 어렵다는 성질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태도가 발생합니다.


첫 번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의 원리를 도출해보려는 태도입니다. 그럼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든 보이는 것으로서 엄밀하게 전환해보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학계심리학의 태도입니다.


두 번째는, 보이지 않으니 원하는 대로 구성하려는 태도입니다. 즉, 달의 뒷면이 보이지 않으니 그 자리에 토끼와 떡방아를 배치해보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대중심리학의 태도입니다.


후자에 있어 굴절은 필연입니다. 동시에 후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소재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일 또한 필연입니다.


우리는 판타지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대중심리학의 이야기들 속에는 사람들이 꿈꾸는 풍요로움의 색채가 있습니다. 판타지로 만들어진 대중심리학을 소비함에 따라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인생승리자의 상징인 아이언맨도 되고, 전능한 마법사도 되며, 이성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얻는 픽업전문가도 될 수 있을 것처럼 경험합니다. 즉, 사람들은 대중심리학을 통해 자신들의 판타지를 향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지의 심리왕, 나니아 심리기, 해리포터와 심리학 왕자, 사실 많은 대중심리학은 이러한 이름들의 판타지 소설들입니다. 그래서 인기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허구이기 때문에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실현될 수 없습니다. 드래곤볼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독자가 초사이어인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심리학의 인기의 정체가 판타지라는 사실은, 즉 굴절 그 자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해줍니다.


실제의 자신이 못났다고 생각하는 개인에게, 정상을 비춰주는 거울이 아니라 굴절되게 비춰주는 거울은 경우에 따라 아름다운 상을 그 개인에게 제공해줍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가 그토록 원하던 아름다움을 되찾은 것처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날 정상을 오히려 마르고 길게 굴절시켜주는 휴대폰의 어플기능이 선호되는 이유와 같습니다.


모든 판타지에는 인간이 회복하고 싶어하는 아름다움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 자체를 향한 이 의도만은 정당합니다. 그것만은 오롯하게 정당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또 하나의 중요한 속성이 바로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온전합니다."와 같이 자기치유서 등에서 자주 사용되는 '온전함'이라는 표현의 실제적인 의미는 '아름다움'입니다.


마음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움직입니다. 마음으로 사는 인간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말로 마음이라고 하는 표현에 대해, 서구의 학문적 체계 속에서 그에 대응할 적절한 표현을 찾는다면 바로 '존재'입니다. 특히 하이데거가 묘사한 존재의 개념은 동아시아적 이해 속에서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곧 존재가 아름답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드러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고, 또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존재의 아름다움을 향한 여행이 곧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깊이'를 시사합니다. 존재의 아름다움을 향해 여행한다는 것은 삶의 깊이를 향해 내려간다는 말입니다.


더 아름다운 것은 더 깊은 것입니다. 깊은 것은 그윽합니다. 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이 꽃바람을 타고 자연스레 알려집니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을 만나러 오며, 그 만남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삶이 참 좋아집니다. 더 살고 싶어지며, 또 살고 싶어집니다. 노시인의 말처럼, 정말로 아름다웠더라고, 삶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 마음의 아름다움과 깊이에 대한 주제가, 학계심리학의 전통 속에서, 특히 사회과학이라는 틀에서만 더욱 작동하려고 하는 경향성 속에서 다소 둔감해지게 된 부분입니다. 그 대신에 대중심리학이 허구의 소재들을 통해 취하게 된 반사이득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대중심리학이 이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견지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반대로 대중심리학은 대단히 투박합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아름다움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힘에만 모든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힘도 아름다움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힘으로만 환원되는 아름다움은 그저 투박함일 뿐입니다.


다만 대중심리학은 결코 엄밀하지 않고 느슨한 까닭에, 개인이 회복하고 싶어하는 아름다움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은근하게 노출시켜주는 틈새를 곧잘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영어공부를 하는 데 있어 성문종합영어보다 빨강머리앤을 원서로 읽으려는 이가 대체 어떠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꿈꾸고 있는지를 더 잘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아름다움, 이것이 전부입니다. 아름답다는 존재하다이며, 존재하다는 '좋다'입니다. 살아서 좋은 것,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면 대체 우리 삶에 다른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 전부인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온 대표적인 전통은 바로 종교입니다. 오늘날 심리학의 세력들 중에 인본주의 심리학 및 실존심리학이 종교적 탐구를 중요한 심리학적 주제로 설정하고 있는 현상은 분명하게 정향된 방향성을 나타냅니다. 바로 깊이를 향한 방향성입니다.


나아가 철학과 종교, 그리고 문학은 심리학을 이루는 중요한 축들입니다. 존재의 아름다움을 노래해온 이 기둥들 없이는 심리학은 정말로 심리학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과격한 선언이 아닙니다. 마음은 아름다움을 가장 그 근본의 속성으로 가지며, 바로 그 마음을 연구하는 것이 심리학이라고 할 때, 또한 마음이 곧 존재의 동의어라고 할 때, 심리학은 바로 이 존재의 아름다움을 향한 탐구의 여정 위에서만 더 깊은 면모로서 정당하게 존립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더 쉽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쁜 옷을 입으셔도 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셔도 됩니다."

"자신을 꾸미셔도 됩니다."

"귀여우셔도 됩니다."

"사랑받으셔도 됩니다."

"태어나신 것을 좋아하셔도 됩니다."


심리학은 바로 이러한 말들을 명확한 노랫말로서 노래하는 활동입니다. 힘이 아닙니다. 힘을 주면 노래를 못하게 됩니다. 노래는 부드러운 것입니다. 그대의 귀에 좋은 것입니다.


그대가 더욱더 아름다우셔도 된다고, 허구 속에서만 아름답지 말고 실제로 아름다우셔도 된다고, 그대가 그래도 된다는 사실은 가장 견고한 근거들에 의해 지지된다고, 우리가 그대의 아름다움의 편이 되겠다고, 꽃피우시라고, 그렇게 그대라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가득 개방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좋은 노래, 그것이 심리학입니다.


바로 우리가 말하고 있는 심리학입니다.


더 깊은 심리학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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