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면주제: 내 인생을 다시 찾는 법"
어떻게 내 자신의 삶을 다시 찾을 것인가?
이는 오늘날 가장 우리에게 당면해있는 동시대적인 주제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이며, 현실의 이야기입니다.
자신(自身)의 인생이 없을 때, 인생에 자신(自信)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해지며, 혼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늘 혼란스럽게 됩니다. 그 역기능적 결과로, 우리 대신에 생각하고 판단해서 쉽게 다 알려줄테니 그것만 믿고 따라오면 된다는 식의, 소위 선량한 시민들의 양치기를 자임하는 선동가들에게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결정을 내맡긴 채 갈수록 힘을 잃어 가게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을 잃음으로써 더 자신을 잃는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제 멈춰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한 존재로서 이 세상에 온만큼, 그러한 자신의 위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바로 이처럼, 자신을 다시 찾기 위해 오늘날 해야 하는 가장 최우선의 것, 가장 유효한 그 방편은 바로 이것입니다.
'정치에 무관심하기.'
이것은 도발을 위한 주장이나, 치기어린 위악의 태도가 결코 아닙니다.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해서 고통받는 이에게 도박을 끊어야 하는 필요성을 단순하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는 오늘날의 사회적 풍토 속에서는 권장되지 않는 태도입니다. 악인이나 죄인 그리고 미숙아처럼 취급되기 딱 좋은 태도입니다.
두렵게도 이러한 말이 들려올 것입니다.
"정치에 무관심했기에 일어난 결과를 우리는 근간에도 보았지 않는가. 독재자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시민 하나하나가 정치에 참여해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지 않으면, 비극은 또 반복된다. 그러한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말의 정체는 사실 협박입니다.
바로 그대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죄책감을 야기하기 위한 공갈입니다. 즉, 그대 앞에 사람의 목숨을 갖다 놓고, 그 심각한 무게의 위압감을 통해 그대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그대가 결국 특정한 행위를 수행할 수밖에 없도록 조장하는 통제의 기제입니다. 인민재판의 논리입니다.
같은 논리로 발화되는 또 다른 말이 있습니다.
"안보에 무관심했기에 일어난 결과를 우리는 불과 50년 전에도 보았지 않는가. 독재자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시민 하나하나가 안보에 참여해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지 않으면, 비극은 또 반복된다. 그러한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금새라도 사악한 독재국가가 출현할 것처럼 말하는 식의 이야기는, 그 반대편에서 말해지는 바 금새라도 북한이 탱크를 밀고 쳐들어올 것이라는 이야기와 똑같은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본질적으로 초등학생의 홍콩할매 괴담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초등학생들은 티비에서, 라디오에서, 유튜브에서, 팟캐스트에서 자꾸만 홍콩할매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늑대를 말하는 양치기소년의 마음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만, 사람들이 자기와 놀아주기 때문입니다. 더는 아무도 자기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이 양치기소년은 자기의 놀이터를 잃게 됩니다.
게다가 이 효과적인 놀이터에서 양치기소년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와,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놀면서 돈도 벌고 있네.'
바로 이 놀고 먹는 이득을 양치기소년은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정치라고 하는 놀이터로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하려는 일을 하게 됩니다.
"여기 늑대가 있어요! 보세요, 우리의 사악한 적이 제가 말씀드린대로 이렇게 숨어 있었죠! 늑대로부터 안전하려면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되요! 제 말을 안믿으시는 분은, 우리의 소중한 가족들과 친구들이 늑대에게 죽임당하도록 방임하시는 무책임한 분인 거 다 아시죠?"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꽃피워낼 시간을 약탈함으로써 양치기소년 본인의 재산으로 삼는 것입니다.
『모모』의 시간도둑과 같습니다.
시간이 바로 인생입니다. 시간을 뺏기는 일은 인생을 뺏기는 일입니다. 이것은 유감입니다.
지금 이러한 글조차도 어쩔 수 없이 이 시간도둑들을 배불리는 데 분명 일조하게 되기에 이 또한 유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히틀러의 독재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 아닙니다. 정치에 대한 광신 때문입니다.
자신의 판단을 그에게 다 일임한 채, 아돌프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일입니다.
독재는 무관심이 낳는 것이 아니라, 광신이 낳는 것입니다. 곧, 우상화가 낳는 것입니다.
물론 광신과 우상화는 가장 엄밀하게 말하자면 분명히 무관심의 한 형태입니다. 보다 본질적인 무관심의 형태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자신이 아닌 외부의 대상을 신성시하고 있는 자기소외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정치에 무관심하기'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소외된 자신을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정치가 자신의 삶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착각을 멈추고, 스스로의 삶에 정성스레 관심을 비추는 것입니다.
관심이란 표현 그대로 자신에게 알려지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양치기소년의 소리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바로, 스스로 보고, 스스로 느끼며, 스스로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곧 자신(自信)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마음에 대해 가장 잘 이야기한 대표적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 붓다와 예수입니다. 그리고 붓다와 예수는 그들의 생전에 정치를 가장 철저하게 거부한 이들입니다. 붓다는 세상을 정의롭게 통치하는 전륜성왕이 되기를 거부하고 마음의 온전함을 깨달음으로써, 예수는 민족의 정치지도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거대한 사랑을 보임으로써, 우리에게 정치에 무관심하게 사는 현실의 향기를 남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단지 우리가 무관심하려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여기에는 정치의 본질 내지는, 적어도 그 소비적 효용이 시사됩니다.
우리가 정치를 거부하기가 어려운 이유, 그것은 바로 정치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구조로 짜여져 있고, 그 구조를 이루는 규칙들이 있습니다. 그 규칙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에 따라 승패가 갈리며, 정동적 자극이 생겨납니다. 또한 지적으로 규칙들을 통달한 다음에는 자신의 의지로 그 규칙들을 운용하여 구조를 경영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의 환상이 촉발됩니다. 감정, 지성, 의지, 소위 인간의 정신활동의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자극되는 셈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게임의 감수성과 동일합니다.
정치는 게임입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것이 재미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게임을 재미있게 즐기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게임판에 끼지 않으면 개인의 삶이 위험해지거나 잘못된다고 말하는 것은 무례한 협박입니다. 오만한 폭력입니다.
미국의 실존심리학자인 롤로 메이는 정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삶의 의미를 잃은 이들이, 그 대리물로서 사회적인 정치권력을 얻는 일에 몰두한다."
구체적인 자신의 현실에서 답답함을 느끼며 삶의 재미를 못느끼는 이들이, 게임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게임 속에서는 현실에서의 작고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잊고, 세계를 구하는 등의 거대한 임무에 자신이 한몫을 담당하는 거대한 존재인 것처럼 경험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이처럼 자기 삶의 의미를 잃은 자기소외가 과도한 게임에 대한 몰두를 낳고, 게임판 밖에서는 마치 삶이 영위될 수 없을 것 같은 착각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게임판 밖에서 더 커다란 형태로 펼쳐집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입니다. 정치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여타의 정치공학적 게임들이 생겨나기도 이전부터 이미 인간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이끌어 왔습니다.
인간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정치입니다. 게임에만 빠져 그 안에서 질식하는 일이 인간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지,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일은 결코 인간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안전하고 또 행복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저 마음에 참여하기만 하면 됩니다. 아니 이미 참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반드시 하루하루 마음을 체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렇게 매순간 알려지는 마음은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참여하는 데 있어 언제나 마지막의 손님입니다. 가장 마지막까지도 우리를 위한 그 자리가 비워져 있는 가장 귀한 손님입니다.
세를 모아 절대다수의 입장을 차지하려는 게임의 규칙을 따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가장 마지막에 홀로 선 절대소수의 입장으로도 무조건 환대됩니다. 그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민주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마음은 언제나 '오직 그대만을'입니다.
이를 신화적으로 비유하자면, 신(神)은 자신을 찾지 않고 게임에 빠져 있는 세상 모든 이들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으며, 자신을 찾고 있는 유일한 이인 바로 그대만을 원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신도 그러할진대, 그대가 그대 자신을 찾으면 안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을 찾으시면 됩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면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있어집니다.
게임 속 아바타를 보며 대리만족하지 않아도, 자신의 삶에 자신이 있어집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어집니다.
삶은 더는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신비가 됩니다. 가슴 설레는 내일이 기다려집니다.
시간이 해방된 것입니다.
생생한 눈망울의 소녀가 달려옵니다. 모모가 돌아옵니다.
그대께서, 그대 자신께서, 달려오시는 소리가 귀에 선합니다.
다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 있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품에서 다시는 잃을 수 없는 마지막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시는 잃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내 인생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다시는 잃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