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의 극복: 약해도 괜찮아"
현재 한국사회의 키워드는 분명 내로남불입니다. 이를 조금 더 세련되게 표현하자면, 바로 분열입니다. 개인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분열의 기후는 만연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 분열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내로남불의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인가 반드시 약해서 아팠습니다. 그러나 아픔이란 것은 힘이 없는 못난 존재가 경험하는 것이라고 착각되었고, 곧 아픔은 잘못이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상냥하지 않은 까닭에 결국 자식에게도 거칠고 투박하게 된 부모가, 약한 것은 못난 놈이라고, 나는 너를 그렇게 병신처럼 약한 놈으로 키우지 않았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늘 힘있는 자로 당당해야 한다고, 가진 것이 없어도 선비처럼 꼿꼿하게 언제나 갑으로 살아야 한다고, 그것이 진정한 사람의 모습이라고 세뇌시켰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있어 아픈 것은 못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아프다는 사실은, 유능하고 힘세며 당당한 부모의 유전자를 제대로 이어받지 못한 결격사유의 못난 자식이라는 사실처럼 철저하게 착각되었습니다.
아픈데다가, 잘못된 병신이라는 비난의 채찍질까지 더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서러웠습니다.
그 서러움 속에서, 어른이 되면 빨리 힘을 얻어서 강해져야겠다고, 부모님만큼 힘센 존재가 되어 더는 부모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서러움이 만든 분노의 기운을 통해 그렇게 악바리처럼 불꽃을 튀기며 살아 왔습니다. 가슴에 이글거리는 불만큼, 손에도 불을 들고, 이곳저곳에 불을 지피며, 그렇게 스스로를 더 큰 불길 속에 몰입시켜 취하게 하며 살아 왔습니다.
이 서러운 분노의 기운이 바로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전반적인 대기입니다. 거칠고 투박한 대기입니다.
이른바, 자신이 강한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하고, 또 절대로 약한 존재로 보이지 않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움을 만들며 그 싸움에 파묻혀 살아가는, 육도 중에서 바로 수라계의 대기입니다.
이 수라계의 대기 속에서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약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착한 부드러움을 새롭게 다시 발견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고압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아플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귀함을 새롭게 다시 발견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폭력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끝내 태어나게 된 것이 바로 고압적이고 폭력적인 마초주의입니다. 상시 강한 존재로 보이기 위해, 허세를 동원해서라도 최대한 약함과 아픔을 거부하고 센 척 하기 위해 마초주의는 태동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초주의가 오늘날 내로남불의 분열을 만드는 직접적인 기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마초주의는 약함과 아픔을 다 못남으로 치부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과 아픔을 소외한 채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시킵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은 타인의 약함과 아픔을 돌보고 치유하는 목자와 같은 입장에 서려 함으로써, 사실은 누구보다 큰 자신의 약함과 아픔을 철저하게 숨기려고 합니다.
이 은폐의 의도가 바로 내로남불의 핵심입니다. 분열은 언제나 은폐와, 그 은폐로 말미암은 소외에 의해 일어납니다.
이것은 아플 때도 아프다고 표현하면, 천하고 못난 상것이 된다며 아픔을 은폐하고 꾹 참던 선비놀이의 문법을 닮아 있습니다. 이처럼 마초주의는 선비문화의 굴절된 현대적 계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지점은, 선비의 이러한 은폐의 문법을 키워내는 것은 많은 경우 거칠고 투박한 그의 어머니라는 점입니다. 즉, 마초적인 남성성으로 살아가는 소위 '센 엄마'가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선비를 키워내어 마초주의를 상속시킵니다.
여기에는 분명하게 여성성의 소외가 있습니다. 오늘날 특히 내로남불의 현상을 보여주는 사건으로서 많은 성의 문제가 드러나는 이유는, 그것이 여성성을 소외시키는 마초주의의 필연적인 귀결인 까닭입니다.
이것은 이러합니다.
마음은 자연스럽게 소외된 것을 회복하려는 방향성을 갖습니다. 때문에 마초주의는 자신이 소외한 섬세하고, 부드럽고, 따스한 것을 향하게 됩니다. 곧, 마초주의 자신이 약함이라고 부르며 거부하고 있던 바로 그것들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도저히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경우, 마초주의는 자신이 소외시킨 것의 이득을 외부에서 대신 제공해줄 대상을 획득하려고 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상속하고 있는 '센 엄마'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소외시킨 소위 약함의 성질들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성의 대상을 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신이 출현합니다.
마초주의에게 결여된 것들, 심지어 마초주의 자신은 쓰레기처럼 보고 있는 것들까지도, 대신 뒤집어쓰고 마초주의를 가득 품어줘야 하는 신성한 희생의 의무를 지니게 된 여신과 같은 대상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마초주의는 아이가 엄마에게 응석을 부리듯 당연한 것처럼 자신이 여신과 같이 설정한 대상을 착취하고 남용하게 됩니다.
'센 엄마'에게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며 응석을 부리지 못한 선비도령이 나이를 먹고 힘을 얻어 새롭게 '부드러운 엄마'를 영입함으로써 응석의 소망을 달성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어릴 때 엄한 엄마 말에 따라 한석봉처럼 살던 이가 나이가 든 뒤 룸살롱 중독이 되는 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러하다는 사실이 노출될 때, 그 노출은 철저하게 부정됩니다.
수치스럽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동안 자신이 허세롭게 강한 존재처럼 행세하며 살아온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약함을 소망하다니, "이 못난 병신 자식!"이라며 고압적이고 폭력적인 눈빛으로 죽일듯이 노려보는 마초주의 엄마의 세뇌가 여전히 뒤통수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르침 받은대로 약함을 부정하면서도, 사실은 약함을 회복하기를 소망하는, 그러나 그 사실을 결코 드러내서는 안되는 이 마초주의의 웃픈 역동은, 반드시 내로남불의 분열로 귀결됩니다. 나아가 분열이 아닌 척 하기 위해, 무수한 언어적 수사를 동원하여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복잡성의 안개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든 흐려 숨겨보려는 의도입니다. 치열하고 또 처절한 일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들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약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약합니다.
우리의 살의 속성이 그러합니다. 아주 작은 돌기에도 쉬이 찢어져서 상처가 날 만큼 살은 여리고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살 그 자체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본성 자체가 약함이며, 곧 부드러움입니다.
어떤 것이 여려서 쉬이 다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와 같이, 약함은 귀함을 일깨우는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약하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를 반증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 약함을 유한성이라고도 말합니다.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을 꿈꿉니다. 이 말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 모든 것과 더없이 함께하기를 꿈꾼다는 것입니다.
유한성은 바로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랑할 수 있는 근본적인 조건이 바로 유한성입니다. 우리의 약함입니다.
마초주의 속에서 소외되어 있는 여성성이란 분명 이 사랑의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장 드높아지는 존재의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이 경우, 여성성이란 곧 인간성 그 자체에 대한 지칭입니다.
가장 부드러운 것을 가장 부드럽게 품는 일,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약함이 약함을 품는 힘, 이것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입니다.
부드러운 한쪽 손이 부드러운 다른쪽 손을 맞잡아 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기도라고 말합니다.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부드러움의 결속은 이 세상 무엇보다 강력합니다. 결코 분열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로남불에 대한, 분열에 대한 우리의 해법입니다.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이해하는 일, 그리고 그 사실에 한없이 상냥한 일, 이것이 우리의 기도며, 우리의 해법입니다.
약해도 괜찮습니다.
아니, 우리는 약해야 합니다.
약해서 우리는 인간이고, 약해서 우리는 사랑합니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우리는 그러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약해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