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론의 기각: 만성화된 인생의 현기증"
오늘날 우울증, 공황장애, 어지럼증, 무기력함, 만성피로 등으로 진단되곤 하는 특정한 상태가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대단히 만연해있는 이 상태를 임의적으로 인생의 현기증이라고 명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크게는 이 인생의 현기증을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 외적으로 호소되는 개인의 신체적 습관을 다루려는 방식입니다. 즉, 나쁜 신체적 습관이 낳은 힘든 증세를 제거하고 새롭고 좋은 상태를 학습시키려는 방식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내적인 원인으로 가정되는 개인의 심리적 습관을 다루려는 방식입니다. 즉, 힘든 상태를 낳은 개인의 나쁜 심리적 습관을 제거하고 새롭고 좋은 상태를 학습시키려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사실 표현하는 언어만 다를 뿐 완벽하게 동일한 방식입니다. 이 동일한 방식은 세 가지의 원리로 구성됩니다.
1. 모순율의 원리: 좋은 상태가 있는 곳에 나쁜 상태가 있을 수 없다. (예: 이완이 있는 곳에 긴장이 있을 수 없다.)
2. 증득의 원리: 반복되는 학습훈련을 통해 좋은 상태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3. 주체의 원리: 주체적인 개인의 노력으로 나쁜 상태는 극복이 가능하다.
결국 이 방식은 바로 수행론입니다. 그것도 사실 대단히 고답적인 수행론입니다. 왜냐하면 1의 원리부터 이미 천동설만큼이나 현대적 사유에서는 채택되지 않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AI를 연구하는 이들이 말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AI가 발전한다 하더라도, AI는 1과 0이라는 이진법의 두 요소가 '동시에 존재하는 모순'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반대되는 양극을 동시에 체험합니다. 이것을 역설이라고 말합니다. 이 역설 때문에 사실 인간은 마음을 어렵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역설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만이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말은 생명의 원리는 역설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 기계의 원리는 모순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역설은 반대되는 것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모순은 반대되는 것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특히 인간의 몸을 기계나 프로그램처럼 보는 옛시대의 행동주의 심리학과 같은 오래되고 투박한 관점들에서는, 또한 원시적인 인도사상 등에 입각한 유사심리학들에서는, 그래서 1의 모순율의 원리가 작동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이기에, 즉 마음이 있기에, 모순율의 원리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마치 작동하는 것처럼 착각된다 하더라도, 결코 유지되지 않습니다. 모순율의 원리에 입각한 현실은 반드시 깨어집니다. 그것이 인간의, 생명의, 즉 마음의 힘입니다.
이처럼 모순율의 원리가 깨어진 상태를 우리는 바로 자유라고 부릅니다. 생명의 본성은 그래서 자유인 것입니다.
자유 속에서는 나쁜 상태도 좋은 상태도 없습니다. 즉, 추구하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 상태가 없습니다. 하물며 이미 그 출발점에서부터 성립되지 않는 모순율의 원리에 입각한 현실을, 꾸준히 반복되는 훈련으로써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좋게 말하면 허구고 나쁘게 말하면 거짓말입니다.
이처럼 고답적인 수행론이 내포하는 1의 원리가 부정되는 까닭에, 그에 입각한 2의 원리도 자연스레 부정됩니다. 그렇다면 3의 원리는 어떨까요?
아마도 이 3의 원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이 글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늘날 주체에 대한 아주 섬세하고 면밀한 철학적 논의들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겠지만, 그 핵심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체란 없다.'
이 말은 인간이란 존재는 입체적이며 다면적이지, 고정된 하나의 실체적 주역처럼 행세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주체는 개인에게 있어 모순되는 것을 제거하거나, 내지는 지양하여 통합한 뒤 세운 허구적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서로 다른 모습이 매순간 동시에 드러나는 존재입니다. 즉, 인간은 다시 한 번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이 입체적이고 다면적이라는 말은 인간이 역설적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때문에 그 본래적인 속성이 역설적인 인간은 애초 주체일 수가 없습니다. 주체가 되기 위해 인간에게서 모순을 제거하면 이미 인간 자체가 아니게 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체이기 위해 인간에게서 모순을 제거하려 하는 일, 이것이 바로 인간소외입니다.
아주 쉽게, 소외는 인간이 환원되어 기능적 부품이 되는 일입니다. 곧, 기계가 되는 일입니다. 이처럼 주체란 인간을 기계로 바꾼 뒤에 만들어진 소외의 결과물입니다.
이 소외로 인해 인간은 아주 많이 화가 납니다. 기계 취급을 받는 생명은, 곧 마음은 대단히 크게 분노합니다.
수행론이 내포하는 이 주체의 원리로 인해 우리는 정말 너무나 화가 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생의 현기증의 근본원인입니다.
화가 나기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계속 화가 나기에 현기증이 만성화되는 것입니다.
나쁜 신체적 습관의 문제도 아니고, 나쁜 심리적 습관의 문제도 아닙니다.
주체가 만드는 폭력으로 인해, 화가 많이 난 것입니다.
특히나 개인이 건강한 주체로 서야 한다고, 모순을 제거하는 것이 정의라고, 그것이 깨어있는 시민의 모습이라고, 오늘날의 사회문화적 배경들이 이 수행론의 기제를 지지하고 또 강화하고 있기에, 이 화는 더 만연해지고 더 만성적으로 됩니다.
이 현기증의 정체인 화에 대해서는 더 섬세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별다방에서 주문을 한 뒤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명백하게 그보다 나중에 주문한 이들이 음료를 받아가고, 그의 주문은 15분이 지나도록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가 특별히 시간이 걸리는 음료를 주문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을 뿐인데, 여전히 그보다 나중에 주문한 이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그의 것보다 먼저 공급됩니다.
그는 어지럽습니다. 현기증이 납니다.
서비스바에서 몸을 비튼 채 대단히 불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에 현기증이 난다고도 생각합니다. 또는 자신의 트라우마인 엄마와 2시간 전에 전화통화를 한 심리적 역동이 남아 있었기에 현기증이 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가까스로 자신이 화가 나있다는 사실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이 부당한 대접을 받았기에 화가 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 화는 정당한 것이기에 별다방 직원이 제대로 된 방식으로 일할 수 있도록 자신이 당당한 주체로서 정의를 주장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심이 행위로 옮겨지든, 그렇지 않든, 그는 다소간에 만족감을 얻습니다. 당당한 주체로서의 자신의 면모를 회복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별다방 문을 나서 뜨거운 보도블럭 위를 한참 걸은 뒤에도, 좀처럼 현기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햇살 때문이려나 생각하며, 그래서 다짐합니다. 다음 번에는 자신의 당당함을 이처럼 뒤늦게 찾지 말고, 먼저 드러내자고, 아무도 자신을 우습게 볼 수 없도록 자신이 더욱 잘하자고 굳게 맹세합니다. 그러자 한결 편해진 것 같습니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론에 합류한 것입니다. 주체적이지 못한 나쁜 상태를, 주체적인 좋은 상태로 바꾸어 항시 유지시키려는 학습과 훈련의 현실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화가 대상을 향한 증오로 드러났다가, 다시금 자신을 향한 비난으로 바뀌어 스스로를 공격하는 데 쓰였고, 그렇게 화가 쓰인 까닭에 조금 편해진 것처럼 경험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학습과 훈련의 현실이 이처럼 끝없는 자기비난의 현실이라는 것을 정말로 모르고 있습니다.
주체가 하는 실제적인 일, 그것은 바로 자기비난입니다. 자기를 비난함으로써, 나쁜 자기를 제거하고, 모순을 거세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주체입니다.
그래서 참 재미있게도 주체의 성질은 도덕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이해는 바로 이것입니다.
도덕적이라는 말은 사실 의존적이라는 말입니다. 좋은 규칙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도덕입니다. 즉, 규칙에 의존하는 것이 바로 도덕입니다.
그래서 홀로 당당한 척 하는 주체는 역설적으로 사실 대단히 의존적입니다. 또한 이렇게 의존적이면서도 그 의존을 망각하고 홀로 당당한 척 하기에 주체는 분열적입니다. 이 분열 때문에 주체의 원리가 만들어내는 화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합니다.
별다방에서 자신의 주문이 늦어져 화가 난 이는 사실 도덕적이어서, 즉 의존적이어서 화가 난 것입니다.
그는 도덕 규칙을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면서 착하게 살면, 사람들도 자기를 공정하게 도덕적으로 대해줘야 한다는 규칙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정직한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음료를 제일 빨리 받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구를 억누르면서 착하게 기다렸습니다. 도덕 규칙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그렇게 도덕 규칙에 자신의 행복을 의존한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의존한 도덕 규칙은 보란듯이 그를 배신했습니다. 자신은 건강한 주체로서의 임무를 다했는데도, 행복은 오히려 그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속은 기분입니다. 놀림당한 기분입니다. 배신감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도덕 규칙에 따라 모든 것이 딱딱 떨어지는 기계처럼 정확하게 인풋과 아웃풋의 알고리즘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자신은 바로 그렇게 건강한 주체로서 주문을 하고 착하게 기다리는 그 기계적 프로세스를 수행했는데, 그 결과가 이러한 비기계적 현실이라니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 모든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닌 거야!'
주체가 만드는 화의 일차적인 표현은 이러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심층적으로 이러한 핵심적 의도를 함축합니다.
'나도 내 마음을 억누르고 이렇게 기계가 되었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인생의 현기증을 야기하는 화는, 이처럼 '마음대로 살지 못해서' 나는 화입니다. 즉, '마음이 스스로 살지 못해서' 나는 화입니다. 의존하고 있어서 나는 화입니다. 도덕적이어서 나는 화입니다. 다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현실을 마음대로 이루지 못하고, 남이 만든 규칙에 맹목적으로 의존해 이루려고 하고 있었기에, 그토록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화를 섬세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이 화마저도 다시 주체의 수행론으로 편입시켜 기계적으로 다루려고 할 때, 결국 우리가 가게 되는 길은 바로 독재자의 길입니다.
놀랍게도, 마음대로 사는 이가 독재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마음대로 살지 못한 이가 진짜 독재자가 됩니다. 주체의 다른 이름은 바로 독재자입니다.
그래서 모든 독재자는 사실 도덕적입니다.
독재자는 가장 강력한 규칙의 의존자입니다. 독재자는 자신이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남이 만든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려 합니다. 그렇게 규칙의 지지를 받는 속에서만 그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재자는 결국 규칙을 장악하려고 하게 됩니다. 자신과 규칙을 일치시키는 일이, 곧 자신이 규칙이 되는 일이 그의 최고의 목표가 됩니다. 남이 만든 것이 곧 그의 인생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자신을 남들이 따르도록 만들려 합니다. 남이 만든 규칙을 자신이 지킨 것처럼 또 다른 남들 또한 그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온몸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구조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을 때 독재자가 남들을 원망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며 자기비난이 생겨나는 일은 필연입니다. 그래서 화가 납니다.
이것은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한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에게 내는 화와 같습니다. 자기 엄마아빠가 만든 규칙을 다른 배우자가 지키지 않는다고 그를 심판하는 화입니다. 자신은 엄마아빠에게 거역하지 않고 아무리 싫어도 참으며 그 규칙을 지켜왔는데, 배우자는 왜 자신의 엄마아빠의 규칙을 신의 말씀처럼 지키지 않는지를 원망하며 배신감을 드러내는 그 화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만만하고 못나보이기에 배우자가 그 규칙을 지키지 않는지를 자책하는 바로 그 화입니다.
이것이 별다방에서 일어난 일의 전모입니다.
자신이 맹목적으로 의존해온 규칙과는 다른 현실을 모순이라고 여기며, 그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더욱 수행론에 빠져 도덕적 기계가 되어버린 주체가, 기계적 규칙에 따라 자신과 남들을 기계로 대하며 원하는 결과를 이루려는 독재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 직면하여, 그동안 규칙에 의존하기 위해 희생했던 자신의 마음이 상기되어, 그 서러운 소외의 억울함이 자각되어 생겨난 화의 전모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만성화된 인생의 현기증의 모든 이유입니다.
수행론에 빠져 주체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끝없이 현기증을 유발하는 일입니다. 화만 나는 일입니다. 모든 수행론의 핵심은 이 한 마디로 요약 가능합니다.
"마음대로 살면 안돼."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체가 하는 가장 큰 착각이며, 독재자의 도덕이 만든 가장 큰 환상입니다.
영어표현의 as의 뜻처럼 '-대로'는 '-답게'입니다. '마음대로'라는 것은 '마음답게'이며, 바로 '인간답게'입니다.
즉, 마음대로 사는 현실은 인간답게 사는 현실입니다.
별다방에서 펼치고 싶었던 마음은 그저 목이 마르니 빨리 음료를 받고 싶다는 것뿐입니다. 그 인간다운 욕구를 따라 별다방 직원에게 주문시 인간다운 간절함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 주문 밀리지 않게 잘 챙겨주셔야 해요. ㅠㅠ"
마음대로 산다는 것의 핵심은 결국 이러한 표현들로 형상화됩니다.
'도와주세요.'
'이쁘게 봐주세요.'
'고맙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마음대로 산다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며,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어난 일은, 각박한 주문의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인간끼리의 대화 한 토막입니다. 인간적인 교류의 한 장면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산 결과, 인간답게 산 결과, 기계적인 소매의 프로세스 속에 인간이 출현한 것입니다.
인간답게 살면 안되고, 기계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주체의 저주를 뚫고, 비로소 인간이 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별다방에서 주문한 음료를 받지 못하는 동안 우리의 머릿속을 자꾸만 맴돌던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혹시 인간으로 안보이나?"
그토록 인간의 부재를 느끼던 우리가 너무나 보고 싶어하던 그 인간이 바로 이렇게 기적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기계처럼 살 때 생겨나는 것이 바로 현기증입니다. 그리고 그 현기증을 다루는 척 하지만 실은 더 만성화시키는 것이 바로 수행론입니다.
이제는 그 모든 수행론을 기각해야 합니다.
마음에는 수행이, 즉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몸에도 또한 수행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은 같은 것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늘에 있어서 잘 안보이는 물을 수증기라고, 땅에 있어서 좀 더 잘 보이는 물을 호수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은 뜻으로 드러난 몸이고, 몸은 꼴로 드러난 마음입니다. 하나인 것입니다. 바로 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나에게 수행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정말로 아는 것이 종교현상으로서 깨달음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에게 수행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주체입니다. 주체는 자신을 가장 진정한 것으로 가정한 채, 나를 돌보고, 관리하고, 깨우쳐서, 더 좋은 상태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고집부리는 독재자입니다. 있지도 않으면서 마치 가장 있는 척 나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망령과 같은 것입니다.
살아 있지도 않은데 살아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 그것이 기계입니다. 그것이 기계론적 구조입니다. 망령의 속성과 동일합니다.
수행론을 기각한다는 것은, 살아 있지 않은 이것들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살아 있지 않은 것들을 내 위에 세우지 않으며, 또한 나를 그것들과 똑같이 살아 있지 않은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살아 있다."라고 분명한 실감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답게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삶은 원래 마음대로입니다. 살아 있다는 말은 그 자체가, 마음대로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마음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귀를 기울이면 들려옵니다.
"마음대로 살면 안돼!"라고 악으로 깡으로 소리치는 일을 기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마음대로 살아도 돼."라는 메아리가 속삭이듯 들려옵니다.
언제 화가 났는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집니다.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거였구나, 자신이 용서됩니다.
마음대로 사는 것이 정말로 자신이 원하던 유일한 그 현실이었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사람들도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도 남들도 마음대로 못살게 꽉 틀어쥐고 있던 현기증의 소용돌이가 걷히고, 날이 갭니다. 빛이 비춥니다. 화난 날이 지나고 이제 환한 날입니다.
마지막까지도 그러할 것입니다.
마음대로 빛날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마음대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