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심리학 #7

"심리사회적 태도: 정부를 믿지 않는 일의 중요성"

by 깨닫는마음씨




마치 마지막의 시대와도 같은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권장될 수 있는 심리사회적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부(government)를 믿지 않는 태도입니다.


왼편에 세워진 정부든 오른편에 세워진 정부든 간에, 또는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 세운 정부든 내가 싫어하는 이들이 세운 정부든 간에, 정부라고 하는 것 자체를 믿지 않는 태도입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정부를 믿지 말아야 하는 일이 권장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정부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단 1mg도 나쁘지 않습니다. 순도 100%로 좋기만 한 것입니다.


망치처럼, 에어컨처럼, 빨대처럼, 양변기처럼, 포크처럼, 있으면 정말로 인간에게 좋기만 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유용한 편리를 제공해주는 모든 도구는 좋은 것입니다.


정부는 바로 이 도구입니다. 도구 이상의 그 무엇도, 도구 이하의 그 무엇도 아닌, 순도 100%의 도구일 뿐입니다.


오직 인간에게 편리성을 제공하려는 그 목적으로만 구성된 도구이며, 곧 서비스 조직입니다. 그래서 정부는 통제기관이 아니라 봉사기관입니다. 정부를 구성하는 이들은, 인간의 위에서 인간에게 명령하기 위한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아래에서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가끔 자신이 도구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망치와, 에어컨과, 빨대와, 양변기와, 포크가 있습니다. 이러한 망치와, 에어컨과, 빨대와, 양변기와, 포크는, 마치 자신이 인간을 이끌어가는 위대한 지혜의 스승이라도 되는 양 행세하며 하늘의 거룩함을 흉내내는 인자한 웃음을 짓습니다.


우리가 더운 날 집에 들어가 에어컨을 켰을 때, 그 에어컨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얘야, 아무리 덥더라도 온도는 26도로 맞추어야 한단다. 그것이 정의로운 일이며, 네가 더욱 인간답게 성장할 수 있는 길이란다. 어떠한 기능을 사용하든 간에 항상 공기청정 기능도 함께 활성화시켜야 하는 일을 잊지 말렴. 가만히 있어도 더러운 먼지들은 쌓이는 법이란다. 언제나 이러한 적폐를 제거하는 것이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란 걸 기억하려무나. 하루라도 방심하지 말고 소홀히 여기는 일 없이 늘 부단하게 쓸고 닦으며 자신을 수행해야 한단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되는 현실입니다.


이처럼 에어컨이 우리에게 스승인 척 굴며 명령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이 동아시아의 반도국가에서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특정한 문화적 문법이 작동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것은 바로 선비주의의 문법입니다.


소위 옛시대에 정부를 구성하는 위정자들이었던 선비들은 자신이 일반적인 인간 이상의 존재라고 간주했습니다. 즉, 애초에 계급이 지지해주는 동시에, 또한 자신이 수행의 노력을 통해 얻은 상위의 위격과 능력을 더함으로써, 그러한 자신이 사람들 위에 서서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일을 하늘에게 부여받은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비들은 위정자가 애초에 도구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망각은 반드시 착각을 낳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인간의 스승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을 가슴아파하며, 어떻게든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치열하게 정책을 짜내고, 또 자신의 정책이 더 백성들을 위한 정책이란 것을 다른 당파와 열렬하게 투쟁하여 주장하려 하는 등, 마치 외견적으로는 선하고 아름다워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주제파악을 못하는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시키는 일은 하지도 않고, 오히려 인간의 운명을 걱정하며 도구가 인간을 계몽하고 인도하려 하는 분수모를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대체 네가 뭔데 건방지게?"


아무리 온도조절 버튼을 눌러도 귀를 막듯이 작동하지 않은 채, 우리 도령은 집에만 있을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서 다른 학동들과 교류하며 위대한 민족의 미래를 위해 심기체를 건강하게 수양해야만 한단다, 같은 소리만 하고 있는 에어컨 앞에서 황당해진 우리가 발화하게 되는 말입니다.


아니 이것은 오히려 너무 점잖은 태도입니다. 당장 그 오만한 도구를 갖다 버리거나 때려부순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이상한 일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정상적인 일인 것처럼 반복될 때, 우리는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부를 믿지 말아야 하는 그 이유입니다.


애초에 정부는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엄밀하게 정의할 때, 믿음은 유한한 것이 초월적인 것을 향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유한한 것이 만든 더 유한한 도구입니다. 오히려 초월적인 것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도구는 애초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망치와, 에어컨과, 빨대와, 양변기와, 포크를 믿지 않습니다. 그것들의 편리성을 좋은 것으로 누릴 뿐입니다. 정부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너무나 편리하고 좋은 것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써 우리의 인생을 내맡겨야 할 것이 결코 아닌 것, 때문에 우리가 열렬하게 수호하고 그것을 위해 우리의 인생을 희생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 이것이 정부의 정확한 용법입니다.


망치를 위해, 에어컨을 위해, 빨대를 위해, 양변기를 위해, 포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의 모습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일견 우스운 모습 같지만, 그 희극적인 모습의 안쪽에서 다가오는 깊은 슬픔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정부를 믿는 일을 멈추어야 하는 절실한 그 이유입니다.


그것은 노비의 슬픔입니다.


선비가 혼자 잘난듯이 당당하게 선비인 척 할 수 있었던 그 이유이자, 선비주의의 문법에 의해 더욱 짙게 드리워진 서러운 그림자, 그것이 노비문화입니다.


"어이구, 우리 선비님네들이 알아서 잘 이끌어주시겠지유. 쇤네는 그저 공정하고 훌륭하신 우리 양반님네들만 성심껏 잘 지켜드리면 그분들이 쇤네 인생 알아서 행복하게 만들어주시겠지유."


자신이 부려야 할 도구를 오히려 자신을 부리는 스승으로 모시며, 단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잃게 된, 단 하나뿐인 자신의 존재를 내다버리게 된 슬픔이, 형용할 수도 없을만치 깊고 더욱 깊은 우물에 가득 고여간 인간의 눈물이 분명 여기에 있습니다.


오른편에 세워진 정부만이 이 눈물의 자극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른편과 왼편 중 진정한 편을 구분하는 바로 그 의도가 정부를 '좋은 것'에서 '믿어야 할 것'으로, 즉 도구에서 스승으로 탈바꿈시키는 전도를 낳음으로써, 그에 따른 눈물을 양산합니다.


그것은 마치 별다방에서 음료에 꽂을 빨대를 고르면서, 어떤 빨대가 내 인생을 구원해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오른편의 빨대를 고르면 하루종일 저주받을 것이지만, 왼편의 빨대를 고르면 하루종일 행운이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술적 논리입니다.


어떤 빨대도 내 인생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인생을 빨대 따위에 맡기는 일, 오직 그 일만이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정부는 우리를 이끌어줄 스승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곧, 정부는 존경스러운 우리의 부모가 아닙니다.


정부가, 그리고 정부를 구성하는 위정자들이, 우리 인생의 부모처럼 자신들을 헌신하여 우리의 행복만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다고 하는 그러한 그림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이 선비주의가 만든 착각이자, 그 착각을 공유시킨 세뇌입니다.


선비들은 인간의 부모로서 하늘을 상정하고, 자신들이 그 하늘을 대리하여 인간의 부모로서 기능하려는 기획을 품었습니다.


물론 비단 선비주의만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는 원시적 샤머니즘에 기반한 사유들은 이처럼 그 사유의 향유자들이 인간의 부모로 행세하고자 하는 공통적인 움직임을 보여왔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오만한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자신들은 상대적으로 더 지혜롭고, 사람들을 염려할 줄 아는 자비심을 갖추었으며, 이를 투명하고 공정한 방식으로 사심없이 실현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는 전제입니다.


즉, 자신을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마치 신적인 것에 보다 가까운 존재처럼 인식하는 어마무시한 착각이 그들에게는 은밀하게 전제됩니다.


양반집에서 태어난, 또는 양반족보를 돈으로 산 유사양반집에서 태어난 선비도령이, 인자한 미소를 품으며 하는 말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같이 노는 개똥이와 장쇠, 칠득이와는 자신을 은밀하게 변별하여 인식하고 있는 바로 그 착각입니다.


이런 착각을 가진 이들이 위정자가 될 때, 정부를 구성할 때, 도구가 스승이 되는 마법이 만들어집니다. 그 마법에 따라 굴절된 현실이 우리에게 공유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남들과 변별되어 힘 있어보이는 자신의 입장을 좋아했기에, 이를 유지하고자 더 많은 힘을 담지할 수 있는 그 위정의 자리에 올라선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이 우리의 부모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를 위해 살고 있다고 하는 왜곡된 그림입니다.


그 그림에 따라 우리는 그들에게 심지어 죄책감을 느끼게도 됩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부모에게 도리를 다하지 못했으며, 그 부모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이 굴절된 착각의 그림에 의해 유발됩니다.


정부라고 하는 순도 100%의 편리성을 위한 도구가, 이처럼 부모-자식의 역할극이 펼쳐지는 무대로 인간을 끌어들임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그 역할극을 구성하는 도구적 역할을 맡도록 하는, 곧 인간이 오히려 도구가 되도록 하는 불편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스승을 보듯이 정부를 믿는 태도, 부모를 보듯이 정부를 믿는 태도가, 바로 이와 같이 우리에게 불편함을 가중시킵니다.


우리가 음료를 먹는 일에 이용해야 하는 빨대에, 온갖 요란하고 장중한 믿음의 부속물들이 달림으로써 빨대가 마치 신주단지처럼 변하게 됨에 따라, 오히려 우리가 그 빨대에 인생을 바쳐 우리의 헌신을 먹여주어야 하는 대단히 부조리한 현실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빨대의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른 편에 있는 더 진정한 빨대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빨대는 다만 빨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주단지가 된 빨대는 불편합니다. 그렇다고 그 빨대를 버려서 빨대가 아예 없게 된 현실 또한 우리에게는 불편합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단 하나, 빨대를 다시 빨대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도구를 '믿어야 할 것'이 아닌 '좋은 것'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도구에게 덕지덕지 붙은 그 모든 믿음의 부속물들을 다 떼어내야 합니다.


도구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일, 즉 유한한 것이 스스로가 만든 더 유한한 것을 초월적인 것처럼 섬기는 일, 이것이 바로 우상화의 현상입니다.


정부를 우상화하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부는 '좋은 것'으로 회복됩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편리한 도구로서의 그 아름다운 위상을 다시 찾게 됩니다.


정부가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일, 이것이 정부를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정부를 믿지 않는 태도만이 정부를 지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좋은 것'이라는 표현은, 도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 어떤 망치도, 에어컨도, 빨대도, 양변기도, 포크도, 도덕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들이 도덕적이라고 더 편리해지는 것도 아니고, 비도덕적이라고 더 불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애초에 도구는 편리성과만 관계되는 것이지, 윤리성과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범주가 다릅니다.


때문에, 정부를 믿지 않는다는 것의 구체적인 실천론은, 정부라는 도구를 도덕적 기준에 따라 좋은 것이나 나쁜 것으로 보려는 범주의 오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도구의 편리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존의 질을 높이려는 목적을 갖습니다. 즉, 도구는 우선적으로 생존과 관계된 품목입니다. 그런데 생존을 위한 편리성의 가치를 도외시한 채 단지 도덕적 가치에 따라 정부라는 도구가 평가된다면, 이것은 범주의 오류고, 정부의 우상화며, 니체가 말하듯이 가치의 전도입니다.


이것은 자기분열된 선비들이나 하던 짓입니다.


생존보다는 도덕이라며, 자신들의 생존만은 뒤에서 안전하게 다 챙긴 채, 대외적으로는 그 고결함을 열렬하게 주장하며 눈물흘리던 내로남불의 전형입니다.


정부가 자기분열과 자기우상화를 멈추고 인간 생존의 편리성을 향해 정확하게 작동할 때, 이는 역설적으로 도덕적으로까지 드러나게 되는 현실을 낳습니다.


비인간적인 무더위로 쓰러져가는 인간을 위해 가장 정확하게 작동하여 냉기의 편리성을 제공하는 에어컨이 착한 에어컨인 것과 같습니다. 먼저 그 도구가 만들어진 목적에 적합하게 잘 기능하는 좋은 도구가, 도덕적으로도 착한 도구입니다.


정부를 믿지 않아야, 정부라는 도구가 착각에서 벗어나 이처럼 자신이 만들어진 목적을 다시 상기하여 잘 작동할 수 있게 됩니다.


정부는 우리가 믿어야 할, 착한 스승도, 착한 아빠도, 착한 엄마도 아닙니다.


정부는 단지 좋은 망치고, 좋은 에어컨이고, 좋은 빨대고, 좋은 양변기며, 좋은 포크입니다.


때문에 정부는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 있어 우리가 가야 할 참다운 길을 가르쳐주는 인도자가 아닙니다. 단지 정부는 우리가 각자 가고 싶은 길로 자유롭게 나서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 있어 우리에게 혹시라도 필요할 수 있는 유용한 것들을 제공해주는 봉사자입니다.


인간이, 서로 다른 인간의 여행길을 위해 준비한 베이스캠프와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생각하며 만든 좋은 것입니다.


정부는 좋은 것입니다.


믿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것이 정말로 나를 위해 편리하고 유용한 것임이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믿지 않고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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