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이해: 우리가 잘못하는 이유"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쓰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공부도, 연애도, 놀이도, 사업도, 운동도, 여행도, 미용도, 사교도 아닙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우리는 바로 이렇게 자신이 잘못한 사람이 아니라는 변호를 하는 데 가장 많은 에너지를 씁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를 위한 에너지를 계속 소비하고 있기에, 우리는 사실 어떠한 일에도 전력투구를 하지 못합니다.
하루의 마지막에 우리가 안도감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 수 있는 몇 안되는 기적같은 날은, 바로 우리가 '오늘은 큰 잘못없이 보냈다.'라고 생각하는 날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그만큼 우리가 자신을 얼마나 잘못한 사람으로 경험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증입니다.
우리 삶의 핵심적인 모든 불행과 고통은, 바로 이처럼 우리가 자신을 잘못한 사람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스스로를 잘못한 사람으로 경험하는 것일까요?
바로 외롭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외로운데, 그것이 외로움인 줄을 몰라서 잘못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외로움이 너무 아팠습니다. 아파서 그것이 잘못인 줄 알았습니다.
아무리 해보아도 외로움이 안없어져서, 아픔이 안없어져서, 그렇게 우리가 계속 잘못된 사람인 것 같아서, 결국 우리는 자기충족적 예언처럼 잘못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를 잘못한 사람으로 만들게 됩니다.
자신을 아프게 하는 그 잘못이라는 것과 하나가 되면 더는 그것이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는 더 잘못하고, 또 잘못해야, 이제는 아프지 않은 현실을, 바로 사랑받는 현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렇게도 다시 말할 수 있습니다.
"혼자 외로워서 아플 바에야, 잘못이라도 해서 사랑받고 싶어."
그러나 이렇게 잘못한 사람으로 사랑받고 싶어 가게 되는 길은, 그 길 위에 더 많은 잘못을 밟으면서 가게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잘못의 원래의 이름은 바로 아픔입니다.
그래서 그 길은 갈수록 아프고, 더 아프기만 한 길입니다.
사랑받는 길이 아니라, 그저 아픈 길입니다.
그렇게 더 많이 아파져서, 더 많이 외로워집니다.
출발점과 같습니다.
외로움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외로움에 대해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화적으로 비유하자면, 낙원을 잃은 경험이 외로움입니다. 분명 자신에게 낙원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바로 외로움입니다.
그것은 절대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절대적 낙원으로부터 소외되어 상대적인 세계에 던져진 우리가 절대를 희구하는 그 그리움입니다.
'절대'의 더 친밀한 표현은 바로 '영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언제인가 우리 자신이 속했던 낙원이 영원하지 못하고 사라진 것을 아파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마지막까지도.
그렇게 영원할 수 없는 것처럼 경험되었기에 생겨난 그 아픔을 우리는 외로움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에 대한 그리움을 외로움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원을 잃은 아픔이, 외로움이, 끝내 잘못과 연결된 이유 또한 분명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잘못했기에 영원을 잃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부모님이 나 때문에 이혼을 했고, 친구가 나 때문에 자살을 했고, 배우자가 나 때문에 인생을 망졌다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낙원으로부터 추방될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잘못한 사람이 된만큼, 더욱더 낙원의 빛과 온기가 사무치게 그리워지고, 바로 그렇게 잘못한 사람인 동안에만 낙원이 보다 가까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만 같기에, 우리는 계속 잘못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더욱 잘못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렇게 아픔만을 키워갑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이유입니다.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진단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진단은 처방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돌이킬 수 있습니다. 낙원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스즈키 선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삶은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삶을 살 때, 우리는 분명 절대와, 곧 영원과 연결되게 되는 셈입니다.
삶을 산다는 것은, 마음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느낀다는 것은, 이것이 내 마음이라고 알며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나로 알아 살 때, 그것이 영원으로 향하는 길이 됩니다.
이것은 이러한 비유와도 같습니다.
우리만 낙원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없는 곳에서 낙원은 우리 대신에 더 좋은 존재들을 머물게 하며 행복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낙원도 우리를 잃었습니다. 우리를 잃은 낙원은, 낙원을 잃은 우리의 가슴만큼이나 산산조각이 나 여러 무수한 조각들로 흩어졌습니다.
마음은 바로 그 낙원의 조각들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살 때, 우리는 낙원의 조각들을 내 안으로 모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낙원 안에 있던 우리가 나가게(go out)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낙원을 담고 우리가 나가는(go forward)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낙원이 영원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영원은 시간뿐만이 아닌 공간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있는 그 모든 곳에서 낙원을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담고 있던 낙원의 밖으로 나가, 우리의 안에 낙원을 담고 나가게 된 이유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모습은 우리 마음의 모습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낙원의 조각으로 담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어느 곳에서라도 우리가 담고 있는 그 낙원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이 세상 어느 곳이라도 낙원으로 만들 수 있는 아름다운 존재가 바로 그대입니다.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영원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외로웠던 것입니다.
그대가 대체 왜 외로웠는가 하면, 세상의 많은 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처음 보는 일들로 가득해 놀랍고, 사람의 온기가 너무 좋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이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즉, 좋은 것을 느낄 줄 아는 감수성이 고운 그대는 이 삶에서 더 많이 느끼고, 더 깊이 느끼며, 더 나로서 느끼고 있었기에, 그렇게 정말로 살고 있었기에, 영원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낙원을 향해 가고 있었기에 외로웠던 것입니다.
좋은 것을 정말로 좋은 것으로 보고, 그것이 잃어지는 일을 아파하며, 그래서 그 좋은 것이 영원히 좋은 것으로 될 수 있기를 꿈꾸던 아름다운 사람이었기에 외로웠던 것입니다.
그대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던, 그래서 열렬하게 그대 자신을 변호하고 있던 그 모든 일은, 그대가 단지 다정하게 영원을 꿈꾸던 일일 뿐입니다. 낙원이 부정된 곳에 낙원을 만들려던 일일 뿐입니다.
"이 마음도 참 좋았어요."라고 말하기 위한 일일 뿐입니다.
잘못이 아니라 참 잘한 일입니다.
그대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아니라, 태어나기 참 잘한 사람입니다.
마지막까지도 사랑스러운 참사람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우리가 참 잘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