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사회: 코로나 굿판"
프레이저라는 문화인류학자는 주술의 근간을 이루는 두 법칙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유사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접촉의 법칙입니다. 전자는 유사한 원인이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는 인과론이며, 후자는 한 번 접촉한 것이 떨어져서도 계속 동일한 영향을 받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감염론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코로나를 이러한 주술적 법칙에 따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이러합니다.
먼저 우리는 코로나를 의인화합니다. 언제인가 우리의 인생을 구속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특정한 '나쁜 사람'을 바라보듯이 그와 유사하게 코로나를 인격체처럼 상정합니다. 그렇게 코로나의 현실 속에서 그 사람과의 접촉에서 얻은 고통이 현재도 지속되는 것 같은 그림을 스스로 만들어냄으로써 접촉의 법칙을 정당화합니다.
즉, 코로나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경험한 '나쁜 사람'을 반복해서 재경험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마치 그 사람의 부정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인 것처럼 스스로를 위치지웁니다. 그리고 그 무력함을 극복해보고자 더욱 주술에 스스로를 위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처럼 '악마'로서 상정된 코로나에 대한 반응양식 또한 더욱 주술적입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결과처럼 보이는 코로나가 '악마'인 까닭에, 우리는 마치 코로나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감염의 원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똑같이 '악마'로 바라봅니다. 이 인과론의 구조는 아주 쉽게 이러합니다.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쁜 병에 걸린다."
'때문에'는 인과론의 핵심어휘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가 집단주의에 의해 지지되어 독단의 자리에 설 때 주술은 '만'이라는 표현을 얻어 비로소 완성됩니다.
"나쁜 사람들만 나쁜 병에 걸린다."
미생물학의 문제는 여기에서 윤리학의 문제로 전환됩니다. 이제는 병이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전염되는 것입니다. 주술의 놀라움입니다.
마치 코로나라는 이름의 악마가 자신과 유사한 악의 성질을 가진 나쁜 사람들만 찾아다니며 악을 감염시키고, 또 그렇게 새롭게 양산된 악마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위협하며 거대한 악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위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이해됩니다. 정말로 놀라운 주술입니다.
"너 코로나 확진이지?"
이 말은 오늘날 정확하게 이렇게 받아들여집니다.
"너 (죽창에 찔려 죽어야 할 악마같은) 빨갱이지?"
자신이 오해받아 아팠던 바로 그 방식대로 우리는 타인을 아프게 합니다.
미생물학의 윤리학으로의 전용은 고통만을 생산합니다.
주술사회는 더 큰 고통으로 더 작은 고통을 없애고자, 끝없이 더 큰 고통을 만들어가는 고통중독의 사회입니다.
하나의 사회를 핵심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용어가 합리적이라고 그것이 주술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주술은 의도가 결정합니다. 아무리 합리적인 형태라도 그 의도가 주술적이면 그것은 주술입니다. 오늘날의 주술들은 특히나 과학의 표피를 애용하며 스스로를 은폐하는 경우가 많기에, 의도의 파악은 더욱 중요합니다.
주술적 의도라는 것은 그럼 무엇일까요?
아주 쉽게,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곧, 전능한 통제력에 대한 의도가 바로 주술적 의도입니다.
보다 직접적인 예로,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의 자랑스러운 후예들로서, 월드컵 4강에 간 저력으로 우리가 똘똘 힘을 뭉치면 코로나를 극복하고 필승 코리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주술적 의도입니다.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도 자연인 까닭입니다.
인간은 자연현상인 코로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애초에 자연현상은 이겨야 할 상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현상은 경외의 상대입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가, 똑같이 자연인 인간에 대한 경외로 연결됩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잘못이 아닙니다. 정말로 그 어떤 인간의 잘못이 아닙니다. 자연현상 앞에서 경외감을 가지며 겸손할 수 있을 때, 인간에 대한 깊고 다정한 이해의 시선은 출현합니다.
자연현상이 특정한 인간 '때문에'라고 여기고, 그 인간'만' 없었으면, 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무수한 인간을 죽여왔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도 그 책임을 물으며 인간을 죽이고, 비가 오지 않아도 그 책임을 물으며 인간을 죽였습니다. 자연현상이 인간을 죽인 숫자보다, 자연현상에 대한 귀책의 사유를 물어 죽인 인간의 숫자가 더 많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술의 폭력입니다.
나쁜 사람을 없애면 나쁜 자연적 악이 같이 없어질 것이라고 믿는, 그렇게 인간이 다른 인간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연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원시적인 야만의 산물, 그것이 바로 주술입니다.
우리가 희생양을 찾고 있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주술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자신들이 화산을 막은 어벤져스인 척 하고 싶은 이들은, 자축하던 도취의 시간을 깨고 용암이 다시 흐르게 되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며 희생양으로 삼게 됩니다. 다른 이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으면, 자신들이 희생양이 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직감하는 까닭입니다.
이 또한, 자연현상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제사장이 집단에 의해 죽임을 당해왔던 원시적 야만의 산물입니다. 나아가 자연현상에 대한 기존의 제사장의 무능력함을 비난함으로써 그 자리에 대신 앉게 된 제사장이라면 파멸의 직감은 필연입니다. 자신이 매섭게 던졌던 칼들의 예리함이 스스로를 겨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파멸을 피하기 위해 제사장은 도덕을 만듭니다. 윤리학으로의 전환을 꿈꿉니다. 자신의 능력은 충분했으나, 악한 이들이 너무 많아 하늘이 노했다고 말하는 식입니다. 그리하여 그 악한 이들을 제거해야만 자연현상 또한 선한 모습으로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언제나 상위계급의 안위를 보전하기 위해 마녀사냥의 굿판은 시작됩니다. 놀라운 도덕이고, 놀라운 윤리학이며, 놀라운 주술입니다.
이제는 이 주술의 굿판을 멈추어야 합니다.
한국사회의 주술적 원리는 크게 두 전통에 의해 지지됩니다. 하나는 무속이고, 다른 하나는 유교입니다. 그 둘은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뿌리입니다. 동일한 의도 속에 있습니다. 바로 자연을 통제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무당 할머니가 사람들을 이끌고 눈을 부라리며 성큼성큼 마을의 경계인 동구밖으로 걸어나가, 팥을 뿌리고 복숭아나무 가지를 흔들며, "냉큼 꺼지거라! 코로나 이놈!"이라고 성난 목소리를 장승 아래서 쩌렁쩌렁 울린다 해도, 자연현상은 결코 극복되지 않습니다.
또는 선비 할아버지가 의관을 갖추고 대쪽같이 정좌한 채, 예리한 안광을 띤 엄숙한 표정으로 노려보며,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는 이 코로나 잡귀들아, 하늘 아래 네 지은 죄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못하겠느냐!"라고 대궐집의 마당을 쓸던 장쇠가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로 크게 호통을 친다 해도, 자연현상은 결코 극복되지 않습니다.
또한, 코로나를 사악한 독재자처럼 의인화한 뒤, 좋았던 시절의 학생운동처럼 집단의 힘으로 저항하면 결국에는 그 독재자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낭만적인 믿음을 막걸리와 임연수, 청계천 8가와 함께 공유한다 하더라도, 자연현상은 결코 극복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자연현상에 대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 자연현상을 경외로 바라보며 그 앞에 겸손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겸손은 바로 도망입니다.
이길 수 없는 것 앞에서 도망가는 것이, 바로 그것에 대한 최고의 겸손의 표현입니다.
악마처럼, 독재자처럼 의인화시킨 코로나 앞에 우리의 항복을 선언하며 각자의 집으로 도망가는 일, 이것이 새롭게 우리가 눈떠야 하는 현실이며, 곧 주술사회를 끝내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주술적 집단주의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믿는 착각을 이제 포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집단이 아닌 개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제파악을 해야 합니다.
태풍 앞에서 백날 집단으로 뭉쳐봤자, 다 같이 날려갈 뿐입니다. 같이 죽을 뿐입니다.
인간을 광장으로 내모는 그 모든 주술적 제례구들을 다 해체하고, 이제 광장이 아닌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묘사했듯이, 우리는 자기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영화 카피처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두렵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도취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굿판의 열기에 도취되어 황홀경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집단주의의 축제를 예찬하며 살아오던 이들이, 자신들의 것이 아닌 다른 축제가 현재 창궐하는 악의 모든 이유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자기모순적인 일입니다.
남의 굿판을 멈추려면, 자기 굿판도 멈춰야 합니다.
패거리를 만들어 동지라는 이름으로 자기편을 편애하는 이 주술적 집단주의의 정신은 여전히 지속하면서, 단지 물리적인 집단의 해체만을 사람들에게 종용한다고, 이 굿판이 멈추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집단의 힘으로 나쁜 것을 극복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간다."라고 하는 이 집단주의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이 주술사회를 공고화시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섬세하게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주술, 나쁜 주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 성체가 된 이들이, 아이언맨 의상을 입고 심각하게 지구를 구하는 척 하든, 또는 타노스 의상을 입고 심각하게 지구를 위협하는 척 하든 간에, 똑같이 주제파악 못하는 일일 뿐입니다. 이처럼 모든 주술은 주제파악 못하는 일입니다.
실존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우리의 주제파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코로나는 분명한 실존적 사태입니다.
그래서 코로나가 가장 위협하고 있는 것은 사실 우리의 목숨이 아니라, 바로 주술사회의 존폐입니다.
주제파악 못하는 집단주의적 도취 속에서만 성립될 수 있었던 주술사회를 위협하며 코로나는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알리며, 그렇게 우리가 집단이 아닌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코로나는 그 모든 주술적 우상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굿판을 휩쓰는 태풍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한 인간으로서, 하루 빨리 우리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더욱 빨리 우리의 방으로 돌아갑니다. 가장 빨리 우리 자신이 됩니다.
굿판보다 우리의 인생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짜 주제파악입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을 전염시키는 악마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을 바로 이와 같이 졸렬하게 바라보는 주술사회의 굿판의 논리를 벗어나, 우리 각자의 인생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이해하는 일, 이것이 우리의 진짜 주제파악입니다.
이 주제파악 속에서 우리는 이해합니다.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닌 만큼, 너도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나쁜 것이 아니라, 아픈 것입니다. 내가 아픈 만큼, 너도 아픈 것입니다. 아픔을 나쁨으로 보게 만드는 주술에 취한 눈을, 우리는 어여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씻어야 합니다. 소란한 굿판을 벗어나 고요한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뒤에야 이 만연한 아픔 앞에서 비로소 흘릴 수 있게 되는 자신의 눈물로 자신의 눈을 씻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제가 잘 보입니다.
이 우주의 영원한 신비인, 바로 인간이라는 주제가 잘 보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지막 주제파악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주제파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