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심리학 #20

"진리와 심리: 마지막 환상이 향하는 곳"

by 깨닫는마음씨




심리학은 진리에 대한 학문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니체가 비판했듯이 우리가 자신의 삶을 속이고 그 대신 추구하고 있는 하나의 보편적 정답과 같은 것입니다. 즉, 우리 삶의 기만적 대리물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포함하여, 니체는 분명 최초의 심리학자입니다.


니체는 모든 것을 대체하려는 진리 대신에,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심리를 내세웠습니다. 여기에서 진리의 특성이 표현 그대로 진리성이라면, 심리의 특성은 진정성입니다. 진리성과 진정성은 분명 구별되는 것입니다. 진리성은 모두가 속해야 할 것이지만, 진정성은 나만이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성은 통합의 움직임이며, 진정성은 초월의 움직임입니다.


진정성(authenticity)은 인본주의 및 실존주의 심리학과 상담학이 성립되기 위한 대전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배경 위에서 활동하는 상담자는, 스승처럼 내담자를 구원하려고 하거나, 부모처럼 내담자를 양육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진리처럼 가정되어 상담자에게 요구되는 그 어떤 개념적 역할도 수행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현자라도 된 양 내담자의 기억이나 꿈 등의 경험을 분석하지도 않습니다.


그보다는 인본주의 및 실존주의 상담자는 정말로 진정해지려고 합니다. 이 말은 아주 쉽게, 상담자 스스로의 경험에 날 것으로 정직해지려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에게 경험되는 삶의 느낌을 속이고, 보다 진리에 합치된 바람직한 모습으로 자신을 연출함으로써, 흡사 '진정한 상담자의 이미지'를 내담자에게 세련된 방식으로 소비시키는 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진정성으로 움직이는 상담자는 오직 자신을 속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 어떤 경험이라도 그것이 자신의 것임을 인정하며, 곧 그 순간에 알려지는 느낌에 따라 자신이 바로 그러한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정신분석에서, 상담장면의 느낌에 따라 상담자가 그러한 자신이 되기보다는, 늘 객관적이고 청정한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려 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입장입니다.


이처럼 진정성으로 움직이는 상담자가 제공할 수 있는 치료적 이득에 대해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음의 의사들이여, 그대들 자신을 치유하라.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이를 목격하는 것, 그것이 그대의 환자들에게는 최상의 도움이다."


심리상담이라는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말입니다.


여기에서 치유라고 하는 것은 곧 회복입니다. 회복은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향하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나에게로 돌아온다."라고 야스퍼스가 말하듯이, 이것이 실존의 운동입니다. 정말로 살아 있는 나의 궤적입니다.


진정성은 바로 이처럼, 나를 회복하는 일에 대한 모든 것입니다.


남에게 진리인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진정한 것, 이것이 진정성의 의미며, 동시에 이것이 진정성을 핵심적인 정신으로 삼고 있는 심리학의 대표적인 특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로서 진정하지 못하게 되는 데는, 또한 심리학이 그 역할을 적절하게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데는, 바로 진리라는 것이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 또한 쉽게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진리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삶을 억압하는 허구.'


진리는 허구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던, 즉 추구의 대상이 되었던 그 모든 진리는 다 허구입니다.


붓다는 이 지점에서 니체의 기획에 동조합니다. 붓다에게 있어서도, 우리에게 추구의 대상이 되는 그 모든 진리는 그저 공한 것입니다. 그저 환상입니다.


때문에 니체와 붓다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진리의 이름을 걸고 이루어지는 모든 갈등은 사실 코미디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것은 똑같은 환상들을 놓고, 어떤 것이 진짜 환상이고 가짜 환상인지를 따지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나, 마블 히어로들이 정말로 인간의 구원자인지, 또는 DC 히어로들이 정말로 인간의 구원자인지를 아무리 치열하게 논쟁한다 해도, 뉴욕에서 지하철 사고가 났을 때 그 둘 다 인간을 실제로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환상에 깊이 빠져 그 환상을 진리로 착각하고 있을 경우, 각자가 섬기는 그 진리관에 따라 누군가는 아이언맨을 기다리고, 누군가는 배트맨을 기다리다가 죽어갑니다.


이러한 비유로만 들으면 정말로 코미디와 같은 이야기지만, 실제 우리의 삶이 이렇게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로 비극적입니다.


분명하게 우리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진리라는 이름을 가진 무수한 환상들에 의해 자신의 삶을 잃어갑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신이라는 환상, 정치라는 환상, 정의라는 환상 등의, 그 모든 환상이 언제나 인간의 피와 살을 요구합니다. 허구에 불과한 것이 그렇게 인간으로부터 피와 살을 얻어, 살아 있는 것처럼 더욱더 행세하려고 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처럼 환상이 진리로서 인간 위에 군림하는 놀라운 일이 펼쳐지는 이유는, 바로 언어 때문입니다. 언어의 놀라움 때문입니다.


언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생명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마법과 같습니다.


언어는 그 자체가 신비로운 마법과 같으며, 곧 놀라운 환상입니다.


이 언어가 바로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 환상이 작동하게 하며, 그렇게 환상이 현실에 영향을 주게 만드는, 환상의 시작과 끝입니다. 환상의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는 마지막 환상입니다.


'파이널 판타지(Final Fantasy)'라는 오랜 전통을 가진 명작 RPG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마지막 환상'입니다.


이 마지막 환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논리체계를 가진 프로그램의 언어로 만들어졌습니다. 곧, 환상은 언어의 논리체계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우리 삶에서 환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다 언어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것이 정말로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가 그것을 환상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언어 자체가 바로 환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좋은 예가 하나 있습니다.


"귀신이 나타날 때는 소금을 뿌려라."


이러한 규칙이 있습니다. 이 신비로워 보이는 환상적 규칙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귀신은 무서운 것입니다. 귀신이 나타나는 때는 '밤'입니다. 인간에게 밤에 대한 무서움은 원초적입니다. 귀신은 이 밤에 대한 무서움의 상징입니다. 밤은 어둡습니다. 그리고 이 밤의 '어둠'은 '검정'을 연상시킵니다. 동시에 밤은 죽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죽음은 '썩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적 연쇄에 따라 단어의 연상작용은 일어나며, 귀신이라고 하는 무서운 것의 이미지는 커져 갑니다. 그리고 이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 이에 대응되는 반대의 속성을 가진 논리체계를 정합적으로 구성해야 할 필요가 생겨납니다.


즉, '밤-어둠-검정-썩는 것'을 상쇄시킬 수 있는 대립항으로서 '낮-빛-하양-썩지 않는 것'이 구성되며, 이러한 속성들을 모두 내포하는 구체적인 사물로서 '소금'은 자연스럽게 선정됩니다. 낮의 햇빛을 많이 받은, 썩지 않고, 하얀색인 물질이 바로 소금인 까닭입니다.


이와 같이, '귀신'이라고 하는 무서운 것이 구성되는 논리체계에 대해, 그에 반대되는 '소금'이라고 하는 해결책으로서의 또 다른 논리체계가 구성된 것입니다. 그렇게 두 논리체계를 상쇄시킴으로써, 즉 소금이 귀신을 상쇄시킴으로써, 인간은 무서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놀라운 전개입니다. 놀라운 언어작용입니다. 왠지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언어적으로 그럴듯하게 성립되는 것 같기에, 이 언어의 논리체계는 진리로서의 권위를 갖게 됩니다. 이 진리의 힘에 의해 인간은 구제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언어가 바로 인간의 자구책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귀신'이라고 하는 언어적 허구에 대해, '소금'이라고 하는 또 다른 언어적 허구를 만들어, 이 둘을 상쇄시킨 것뿐입니다. 즉, 스스로 만든 언어를, 똑같이 스스로 만든 언어로 구제한 것뿐입니다.


그렇게 무서움을 형상화한 '귀신'이라고 하는 언어를, '소금'이라는 언어로 물리치면, 무서움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던 인간의 웃프고도 간절한 자구책의 기획입니다. 논리적 구조에 따라 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환상에 불과한 것을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지켜보려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논리체계에 따라 구성된 언어적 환상이 실제로 작동한다고 여기는 일, 이것이 주술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환상을 창발시킨 논리체계를 진리처럼 섬기는 일, 이것이 우상화입니다. 즉, 주술도 우상화도 모두 언어를 진리로 보는 맹신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금을 뿌린다고, 귀신이라는 언어는 사라질지언정, 무서움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언어의 진리성은 무서움의 진정성, 곧 무서움을 느끼는 마음의 진정성을 결코 해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가 출현합니다. 정확하게는 종교성이 출현합니다.


종교성이라는 것은 진정성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곧, 종교성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하는 방향성을 갖습니다.


이를테면, 종교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귀신과 소금의 사례를 다시 활용하자면, 종교성은 귀신이 무섭다고 할 때 소금을 뿌리는 것입니다. 곧, 종교성은 환상을 그대로 활용합니다. 그러나 종교성은 개인이 소금을 뿌리려 하는 그 장면에서, 바로 그렇게 무서워하고 있는 마음을, 바로 그러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서워하는 자신만을 위해, 오직 그 의미로 소금을 뿌리는 것입니다. 무서워하는 자신을 향해 한없이 상냥할 수 있는 오직 그 의미로만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성은 그 모든 환상 속에서도, 역설적으로 그 환상들을 통해 인간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신을 향하는 것입니다.


곧, 종교성은 환상이 작동한다고 믿거나, 환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소금을 뿌리는 일이 아무 의미없는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 환상을 인간을 위해 봉사시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환상을 만들어낸 기원인 바로 그 인간 자신을 발견하고, 그 인간에게 친절한 것입니다.


그렇게 무의미한 모든 환상 속에서, 인간이라는 유일한 의미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언어적 환상이 없이도, 곧 진리가 없이도, 인간이 안심할 수 있는 현실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에 있는 환상 대신에, 인간을 위해 있는 사랑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한 번, 실존이라고 부릅니다. 발화된 언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발화한 실제의 인간을 발견하고, 그러한 인간 자신에게로 돌아와 바로 그 자신으로 사는 일, 이것이 진정성으로 사는 일인 곧 실존입니다.


진정성의 학문인 심리학은, 그중에서도 심리상담이라는 분야는, 바로 이 실존의 실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존은 이념이 아닙니다. 언어적 진리를 규정하는 이론체계도 아닙니다.


실존은 그저 우리가 정말로 사는 일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입니다. 곧, 나를 향해, 나로 사는 일에 대한 모든 것입니다.


거센 장마의 폭우 속에서도 진리를 드높이기 위한 깃발의 천이 펄럭이고 있을 때, 실존은 그 천을 가져다 자신의 발의 물기를 닦는 발수건으로 삼습니다. 그렇게 모든 환상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씀으로써, 스스로가 그 모든 환상 너머에 있는, 그 모든 환상을 초월해 있는, 그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연스러운 심리입니다.


심리(心理)라고 하는 것은, 표현 그대로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마음은 이처럼 반드시 우리 자신을 향해 움직입니다. 마음은 기필코 나를 향해 움직입니다.


마음의 목적은 바로 나입니다.


우리가 나로 살고 싶어서 걷는, 나를 향한 그 모든 여정을, 마음이 예비하고, 마음이 인도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아닌 심리를 따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내가 됩니다.


마음의 길이 곧 실존의 길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운명적인 길입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나는 하나의 운명이다."


표현 그대로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우리가 내가 되는 일은 운명입니다. 누구도 멈출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진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그 운명은 우리가 그토록 간절하게 되기를 소망하는 우리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되고 싶어하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바로 그것이 나입니다. 자유와 운명이 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나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고 있는 바로 그것이 나입니다.


그 모든 환상이, 마지막 환상마저도, 결국 가리키고 향할 수밖에 없는 그 진정한 최후의 좌표, 곧 나입니다.


심리는 바로 이 나를 향한 움직임에 대한 즐거운 묘사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은 '즐거운 학문'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심리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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