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감동의 회복"
후쿠모토 노부유키 화백은 그의 작품 『최강전설 쿠로사와』에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잘 묘사합니다. 쿠로사와라고 하는 성실하게 살아온 소시민의 모습을 통해, 결국 감동이 사라진 현실을 경험하는 그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라는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쿠로사와가 감동을 잃은 이유는 성실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성실함이란 안전지상주의입니다. 곧, 자기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성실함의 목소리는 이러합니다.
"나 때문에 피해가 생기는 일만은 없도록 하자."
이처럼 성실함은 자신이 잘못한 존재가 되는 일만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사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잘못한 존재가 됨으로써 세상과 타인에게 비난받지 않게끔 자신의 안전을 꿈꾸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실함 속에서는 우리가 자신을 드러낼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그만큼 잘못한 존재가 될 가능성에 노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실함이 자기를 낮추고 타인을 높이는 겸손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실함 속에서는 타인이 없습니다. 성실함은 오직 자기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현재 잘하고 있는가, 혹은 잘못하고 있는가만을 끊임없이 점검하며,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자기에 대한 생각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비유하자면, 화분에서 자라는 화초를 바라보며, 저 화초가 행여나 남에게 피해가 되면 안된다는 생각만을 하며 화초의 잎사귀를 자르는 일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자기에게만 신경이 집중된 이 상태는 엄연하게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 상태와는 다릅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만 신경이 집중된 상태는 배고픔이 남에게 피해가 되는 잘못이 아닐지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배가 고파집니다. 영양실조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소외입니다. 성실함은 자기소외의 영양실조를 야기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실제적인 필요인 물과 햇빛에서 소외되어 영양실조가 된 채, 단지 잎사귀만 잘리고 있는 화초는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즉, 꽃이 피는 감동과 열매를 맺는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삶이 의미없게 생각됩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인생으로만 경험됩니다. 가끔 남의 꽃이 피고, 남의 열매가 맺는 모습만을 보며 위안을 삼고, 과잉되게 도취할 뿐입니다.
이것이 작품 속에서 쿠로사와가 자각한 바입니다.
여기에는 바로 나의 상실이 있습니다. 내가 나로서 살지 못한 아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픔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자기에만 집중함으로써, 타인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도록, 나는 그저 내 일만 열심히 하고 살면 되는 거야."
이 성실함의 진술은, 실상 우리가 어떻게 타인을 무시하고 있는지를 함축합니다. 즉, 우리 자신만 잘하면,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지에 대한 그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고 하는 오만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영향력에 의해 타인의 상태가 결정된다고 하는 대단히 무례한 발상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실함이란 결국 자신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타인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드는 셈입니다.
이것은 또한 중요한 사실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와 남이라는 것은 함께 얻어지거나 또는 함께 잃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죽으면 남이 살게 되거나, 내가 살면 남이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함께 살거나 또는 함께 죽게 되는 현실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의 상실을 눈치챈 끝에 나를 회복하기를 소망하던 쿠로사와는 결국 이렇게 묻게 됩니다.
"다들 정말 어떻게 살고 있지?"
자기에게만 신경이 집중된 까닭에, 남을 무시하게 됨으로써 나 또한 잃게 되었던 그 현실 속에서, 이제 비로소 남에 대한 관심이 처음으로 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남에 대한 관심은, 자기가 안전하고자 둘러친 자폐의 장벽을 넘어 타인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듭니다. 두렵지만, 밖으로 나가도록 만듭니다. 그럼으로써 끝내 나와 남을 함께 살리는 현실이 드러나도록 만듭니다.
나와 남을 함께 살리는 현실, 이것을 만남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이 만남의 현실이 우리에게 대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반증해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만나려면 우리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은 만남이 내포하고 있던 원래의 함의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이, 실은 이처럼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었다는 그 본래적 의미가, 이러한 시대상황에 의해 역설적으로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습과 같습니다.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우리는 이토록 만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만나고 싶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주를 만나고 싶어,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까지도 대기권 밖으로 향하는 로켓에 탑승한 우주비행사의 모습입니다. 위대한 모험가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이 위대한 모험가였습니다.
인간은 만나고 싶어,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협곡을 지나, 산맥을 넘어 닿고자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만남의 현실에 닿고자 했습니다.
인간이 이룬 그 모든 위업은, 만나고자 한 소망이 피운 꽃이며, 그 소망이 맺은 열매입니다.
곧, 만남의 결과가 바로 감동입니다.
우리가 감동을 잃은 이유는 나를 잃었기 때문이고, 나를 잃은 이유는 남을 잃었기 때문이며, 남을 잃은 이유는 만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난다는 것은 나와 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나와 남을 같이 살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남을 정말로 남으로 아는 일입니다. 정말로 남을 아는 일이 곧 정말로 나로 사는 일입니다.
남을 안다는 것을 조금 더 풀어 말하자면, 바로 남의 삶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앎으로 남의 삶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들 정말 어떻게 살고 있지?"라는 정직한 모름에서 생겨난 물음을 통해, 그리고 그 물음이 담고 있는 관심을 통해, 남의 삶을 그 자체의 온전함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남이 우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스스로 피어나 있는 온전한 남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도 비로소 온전한 내가 됩니다. 남의 삶에 대한 온전한 앎은, 그대로 온전한 나의 삶이 됩니다.
곧, 온전한 삶에 대한 온전한 앎이, 다시금 온전한 삶을 더 풍요롭게 꽃피웁니다.
우리가 감동받을 때는 이러한 때입니다.
어떠한 삶의 온전함을 정말로 온전함으로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감동받습니다. 그 감동 속에서 우리 자신의 삶 또한 온전함으로 경험됩니다.
만남은 이처럼 만나는 것들이 함께 온전하다는 사실을 개방합니다. 나와 남이 함께 온전하다는 감동을 개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를 잃어 아프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나라고 하는 것을 찾아내 더욱더 그 나를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남을 만나러 나가야 합니다. 남을 나의 밖에 있는 고유한 남으로서 정확하게 바라보며, 그 남의 온전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이 모든 고유한 삶의 온전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서만, 나의 삶 또한 온전한 것으로 실감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왜 인간이 그토록 자신의 생명을 걸고 만나고자 했는가에 대한 그 이유입니다.
만남 자체가 인간 자신의 생명인 까닭입니다.
인간은 만남을 통해서만 인간 자신이 온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인간은 만남을 통해서만 정말로 살게 됩니다. 살아서 감동받게 됩니다. 삶이 감동스러운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살고 싶어서 만나는 것입니다. 더욱더 살고 싶어서 만나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더라도, 살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만남입니다.
그래서 삶은 그 자체로 만남입니다.
삶을 살며, 그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그 모든 일, 그렇게 살아가는 모든 삶을 감동스러운 것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그 모든 일, 바로 그것이 만남입니다.
이와 같이 삶이 곧 만남이기에,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신의 마지막을 걸고서라도, 간절하게 만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대기권 밖의 우주로 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로 우주가 피운 꽃이며, 우주가 맺은 열매라는 그 사실을 알고 싶어서, 그렇게 우주가 가장 만나고 싶어한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그 사실에 감동받고 싶어서, 우리는 오늘도 만나러 나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만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