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의 삶 안에 담긴"
그대는 신중하게 계단 하나하나를 밟아오른다. 큰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성실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다만 그대에게 주어지는 일들이 누구나 그러하듯이 계단을 오르게 되는 일들일 뿐이다.
노력을 더해 더 높이 올라갈수록 그대는 더 신중해진다. 당연한 일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아프고, 더 심하면 죽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대는 더 잘해야 하며, 늘 잘해야 한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치명적인 이 상황에서 누구나 그러하듯이 그대는 강박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구나 그러하듯이, 그대는 '내가 제대로 잘할 수 있을까?'라는 끝없는 의심과 함께 그대를 족쇄처럼 괴롭게 하는 이 강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꿈꾼다. 실수하지 않고 잘해야 한다는 강박없이 편안하게 그대의 능력껏 자연스러워질 수 있기를 꿈꾼다.
그러한 그대의 눈에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이러한 이야기들이다.
"마음에 쉼표찍기."
"잠깐 쉬어가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멈추면 내가 보여."
잘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을 노래하는 이 목소리들에 그대는 크게 감명받는다. 그대가 듣고 싶던 바로 그 말들인 듯 싶다.
그래서 그대는 책도 많이 주문하고, 온라인 강의도 많이 결제하고, 명사의 강연도 많이 신청한다.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누구보다도 잘 들으려 한다. 잘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실현하려 한다.
이처럼 그대는 잘하지 않음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된다. 잘하지 않음의 가장 성실한 대가가 된다.
이러한 그대는 주변에 전도도 가장 잘할 것이다. "우리 한번 쉬어가자. 멈추면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어."라며 남들에게 책도 선물하고, 힘들어 하는 이가 있으면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등, '잘하지 않음교'의 선지자로서 열심히 성실하게 활동할 것이다.
그렇게 그대는 계단을 열심히 오르던 일을 멈추고, 하나의 계단 위에 열심히 머무르고 있는 중이다.
조금 더 진보적인 그대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계단을 오르기만을 재촉하는 자본주의의 강압적인 폭력을 그대만은 더욱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그대는 제주도로 내려가거나, 귀농을 하거나, 유기농 카페를 차릴지도 모른다.
그대는 분명히 거부했다. 더 잘함을 잘하는 길을 거부하고, 더 잘하지 않음을 잘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그대는 한참 그대가 열심히 오르던 계단을 거꾸로 열심히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대는 이처럼 계단을 열심히 오르거나, 계단에 열심히 머무르거나, 계단을 열심히 내려가는 그 일만을 한다.
즉, 그대는 계단과 관계된 일만을 열심히 잘한다. 잘 계단한다.
어쩌면 그대는 "잘 계단한다."를 두루뭉술한 발음으로 "잘 깨달았다."라고 읽을지도 모른다. 계단 위에서 누구나 그러하듯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을 잘하는 그대여, 잘함도 잘하지 않음도 잘하는 그대여, 그대는 정말로 유능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대의 강박은 '내가 제대로 잘할 수 있을까?'라는 그대의 능력에 대한 의심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대의 유능한 능력 때문에 만들어진다.
그대가 유능한 능력에 집착하는 일, 그것이 잘해야 한다는 강박의 정체다.
그대가 잘하지 않음에 끌릴 때, 그것은 그대가 능력을 포기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잘하지 않음 자체도 유능하게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겠다는 말이다.
이것은 아주 쉽게 말해, 공부를 정말로 안한 결과로 시험에서 20점을 맞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원한다면 0점도 맞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다는 의미다. 즉, 5지선다의 시험에서 하나의 번호만 일관적으로 찍어도 0점은 결코 나올 수 없는 현실을, 정답을 파악하는 그대의 능력으로 정확하게 정답만을 피해가 0점이 나올 수 있는 현실로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능함은 전능함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전능함은 완벽주의로 드러난 강박이다. 0점과 100점 사이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계단의 삶'이다. 그대가 두루뭉술한 발음으로 '깨달은 삶'이라고 읽을지 모르는 그 삶의 형태다.
"완벽해야 한다."
이렇게 또박또박한 그대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대의 발음은 참 두루뭉술하다. 간극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간극 속에 그대의 소망이 있다.
흐릿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 표현은 두루뭉술하다. 곧, 두루뭉술함 속에 그대가 보고 싶은 것이 있다.
그대여, 그대가 보고 싶은 것, 그것은 사랑이다.
그대가 사랑받는 현실이다.
그대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잘 알고 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사랑받음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대는 "완벽해야 한다."가 실은 아니다. "완벽하게 사랑받고 싶다."이다.
그렇게 그대에게는 조건이 출현한다.
완벽하게 사랑받으려면,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조건이 출현한다. 그대가 스스로 만든 사랑의 조건이다.
바로 능력이 사랑의 조건이 된 것이다. 전능함이 완벽한 사랑의 조건이 된 것이다.
그대가 잘하지 않음을 그렇게 두려워하며, 잘하지 않음조차도 잘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대가 세운 이 조건에 따라 잘하지 않으면 사랑을 잃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대의 강박은 곧 사랑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꽃잎을 하나하나 따면서, 마지막 꽃잎에 "사랑한다."가 나오도록 잘 따면 사랑을 얻을 것이며, "사랑하지 않는다."가 나오도록 잘 못따면 사랑을 잃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 두려움과 같다.
바로 그렇게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락내리락하며, 더욱 계단을 잘 왕복하려는 그 행위에만 집중하고 있기에, 그대는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지는 것이다. 그대가 계단에서 발만 구르고 있는 동안에, 사랑이 떠나갈까봐 두려워지는 것이다.
즉, 그대의 강박은,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수줍음이다.
혹시나 고백하지 않고도 그대만 열심히 잘하고 있으면, 그러한 그대의 성실성을 알아봐주며 사랑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기를 은근하게 기대하고 있는 그 수줍음이다.
그대여, 이렇듯 그대에게는 이 삶의 모든 것이 연애와 같다. 강박은 모든 일을 연애로 보고 있는 그대와 같은 이들이 경험하는 상태다.
그대가 이처럼 강박에 시달리는 환자가 아니라, 연애를 꿈꾸는 수줍음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많은 것이 달라진다.
만약 그대가 제대로 잘하지 않으면 혼날까봐 두려운 구체적인 대상이 있다면, 실은 그대는 잘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확인된다.
이에 따라, 그대가 그 대상에게 그대의 능력을 증명하는 대신 그 대상에 대한 호감을 고백한다면, 그대에게 더는 계단의 왕복운동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게 확인된다.
그리고 또 만약, 그대의 고백에 대해 그 대상이 "호감은 필요없고 무조건 유능하게 잘해야지."라고 한다면, 그 대상은 애초 그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자가 아니니 그대가 그 대상 앞에서 계단의 왕복운동을 할 의미는 더욱더 사라진다. 그렇게 확인된다.
이처럼 이것이 똥인지 된장인지가 선명하게 확인되는 까닭에 두루뭉술함이 사라진다. 흐릿한 망설임이 사라진다. 이로 인해 그대는 정말로 그대가 원하는 종가집 된장을 향할 수 있게 된다. 그대의 삶에서 정말로 많은 것이 달라진다.
그대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확인한 까닭이다. 모든 것을 연애대상으로 볼만큼, 그대가 그토록 많이 사랑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앞에 그대가 자연스러워진 까닭이다.
바로 그렇게, 그대가 "사랑해요."라는 말을 그대의 가슴 안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인 까닭이다. 그 사랑의 말이 그대 안에서 그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까닭이다.
그대여, 보라, 하루에도 수십번씩 오르락내리락하던 가슴의 요동이 멎는다.
사랑의 말이 묵직하게 담겨 있다.
언제라도 그대가 원한다면 가슴 밖으로, 계단 밖으로 튀어나갈 수 있도록 상시장전된 상태로, 그대를 뿌듯하게 채우고 있다.
"사랑해요."
담겨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많은 것을 달라지게 하는 그대의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