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심리학 #18

"계획 있는 삶: 색즉시공 공즉시색"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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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종교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실은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듯하지만 따분한, 그냥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화려하지만 시시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로 구체적인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에 대한 아주 멋진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계획이 다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토록 우리가 얻기를 바라던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계획이 다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르지만, 우리를 위해 작동하고 있는 멋진 계획이 다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이 분명한 계획만큼이나, 우리가 기독교와 선불교를 가장 잘 구성된 고등종교라고 말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둘은 적극적으로 신(神)의 죽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신이 필멸하는 육신을 스스로 자청하여 입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죽음의 사건이 종교적 원리를 구성하는 핵심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인다."라고 하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정신이 종교적 원리를 구성하는 핵심이 됩니다.


즉, 이 두 전통은 신의, 그리고 신성한 것의 적극적인 죽음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 적극성이야말로 두 전통이 독보적인 종교적 전통인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적극성이 의미하는 것은, 이 두 전통에 있어 신 그리고 신성한 것의 죽음은 결코 비극이 아니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기독교와 선불교에 있어 신의 죽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이것이 왜 기쁜 소식인지를 신인관계로 이해해보면 이러합니다.


신인관계는 신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것을 절대성과 상대성 사이의, 또는 영원성과 필멸성 사이의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시종교들은 이 신인관계에서의 무게중심이 신을 향하도록 구조지어져 있었습니다. 곧, 신의 무한성, 절대성, 영원성을 중요하게 드러내는 일이 가장 큰 목표가 되었고, 이를 위해 인간이 희생되는 일 또한 빈번하게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인간이 자신의 죽음으로 신을 살리는 일이 지상과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신을 믿는다고 할 때, 거기에서 얻고자 한 것은 결국 신의 속성입니다. 곧, 인간은 무한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현실, 즉 죽지 않는 현실을 얻기 위해 신을 믿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죽지 않으려던 인간이 신을 믿음으로써 오히려 더욱 죽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원시종교의 구조 속에서 인간에게 운명이라는 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에게 치여 운명을 이처럼 비극적으로 경험하는 인간의 모습이 잘 묘사됩니다. 결국 원시종교적 신인관계는, 심하게 말하면, 인간이 신의 장난감에 불과한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 대단한 신에 의해 작은 인간이 늘 희롱당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가슴아파한 선구자들이 바로 붓다와 예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죽이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은 죽이되 신인관계는 유지함으로써, 신에게 쏠려있던 무게중심을 오히려 인간쪽으로 이동시키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천재적인 계획입니다.


붓다와 예수는 계획이 다 있었습니다. 인간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아주 멋진 계획이 다 있었습니다.


붓다는 자신의 계획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작은 네가 죽으면 그 대단한 신도 죽는단다."


예수는 자신의 계획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대단한 신이 바로 이렇게 작은 너를 위해 죽었단다."


그들은 이처럼, 대단한 것에 의해 작은 것이 좌우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 운명을, 실은 작은 것에 의해 대단한 것이 좌우되고 있다는 운명으로 다시 드러낸 것입니다.


즉, 그들의 위대한 계획의 핵심은, 바로 운명을 다시 쓰는 것이었습니다. 운명이라는 판 위에서 어떻게든 그 판을 바꾸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그 판 자체를 새로운 판으로 갈아치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신을 살리기 위해 인간이 죽어야 하는 당위의 규칙이 작동하는 현실을, 인간을 살리기 위해 신이 죽음을 선택하는 사랑의 규칙이 작동하는 현실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붓다와 예수의 계획이 성공을 거둔 그 방식입니다.


그들은 분명 성공했습니다. 신이라고 하는 대단한 것의 죽음이 좌우될 만큼 더 멋지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인간을 묘사하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더는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우호적인 것으로 전환되게 하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나아가 신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위해 죽는다고 큰 것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큰 것은 더욱 졸렬해질 뿐입니다. 오히려 큰 것이 작은 것을 위해 죽을 때, 큰 것은 그 거대한 자신의 크기를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게 됩니다.


이처럼 붓다와 예수는, 인간의 자리의 회복뿐만이 아니라 실은 신의 자리의 회복 또한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신인관계의 상호적인 회복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신이 죽음으로써 '없이 계신 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신인관계는 온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신은 이 우주에서 가장 작은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크기를 다 바쳐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자로서, 인간은 이 우주에서 가장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가장 사랑받을 수 있는 자로서, 서로에게 다시 발견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상호작용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복된 신인관계의 상호작용을, 무한성과 유한성 사이의, 절대성과 상대성 사이의, 영원성과 필멸성 사이의 그 상호작용을 우리는 바로 '삶'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붓다와 예수가, 그리고 기독교와 선불교라는 두 전통이, 이와 같이 신의 죽음을 통해 알리고자 한 것은 바로 삶입니다. 아름답게 상호작용하고 있는 그 온전한 '하나'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바로 구체적인 인간의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은유는 유효합니다. 그것은 하늘 꼭대기 높은 옥좌에 앉아 인간을 쥐락펴락하는 근엄하면서도 인자한 표정의 할아버지와 같은 실체에 대한 이야기가 더는 아닙니다. 그러한 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삶이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온전한 삶에 대해 경이로운 감동의 의미를 담아 그저 '하나님'이라고 친근하게 부르고 있는 것뿐입니다.


중세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나 현대의 폴 틸리히와 같은 이들이, 신 너머의 신(god beyond god) 또는 신 위의 신(god above god) 또는 신성(godhead) 등의 이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삶에 대한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고전적인 성부, 성자, 성령의 비유에 적용해, 보통 하나님이라고 통칭되는 성부에 대입한다고 해도, 이 또한 유용한 이해를 제공합니다.


다소 느슨한 비교항으로서 다음과 같은 구도의 묘사가 가능합니다.


성부-성자-성령

법-붓다-불성

삶-사람-마음


성부를 깨달은 성자,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은 이가 성령으로 삽니다. 이와 같이, 법을 깨달은 붓다가 불성으로 살며, 삶을 깨달은 사람이 마음으로 삽니다.


여기에서 깨달음은 그것이 내가 되었다는 응집과 육화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렇게 성부가 성자가 되었고, 법이 부처가 되었고, 삶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조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 구조 속에서 성자는 성령으로 삶으로써 그것이 정말로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깨달음을 증거합니다. 이와 같이, 붓다는 불성으로 삶으로써 깨달음을 증거하며, 사람은 마음으로 삶으로써 깨달음을 증거합니다.


이것은 의미입니다. 이제 드러나는 의미입니다.


의미는 언제나 아름다움에 대한 것입니다. 곧, 멋짐에 대한 것입니다.


성자가 성령으로 살 때 멋지고, 붓다가 불성으로 살 때 멋지며, 사람이 마음으로 살 때 멋집니다.


이처럼 삶의 의미를 드러내며 사는 일이, 멋지게 사는 일이며, 곧 깨달아서 사는 일입니다.


이를 불교의 표현을 사용해서 다시 이렇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이 두 표현은 같으면서 다릅니다. 같으면서 다른 이 한쌍의 표현 또한 삶의 상호작용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쪽만을 전부로 이해할 때 삶이 굴절됩니다.


색즉시공은 "아름다운 모든 것은 다 사라진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필멸의 구조에 대한 것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곧 '운명'에 대한 것입니다.


공즉시색은 "사라질 모든 것은 참 아름답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름다운 의미에 대한 것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곧 '자유'에 대한 것입니다.


결국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이 표현은, 필멸할 운명 속에서 의미의 자유를 갖는, 곧 운명과 자유의 상호작용으로서의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한 아름다움의 상호작용 속에 놓여 있는 인간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에 대한 묘사입니다. 곧, 우리 자신이 얼마나 멋진 존재인가에 대한 묘사입니다.


다시 한 번, 색즉시공은 운명이고, 공즉시색은 자유입니다.


삶은 우리에게 운명으로 다가오며, 바로 그 삶을 산다는 것이 우리에게 자유입니다.


곧, 삶을 기쁜 소식으로 환대하여 사는 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놓인 운명의 크기만큼이나 우리 자신이 얼마나 거대하게 사랑받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삶의 운명을 우리에게 우호적인 것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붓다와 예수의 계획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자유는 언제나 사랑의 결과인 까닭입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 우리가 자유롭다고 느낍니다.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실현하고 있을 때, 그 배경에는 언제나 사랑이 떠올라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작은 나에게 아름다울 수 있는 자유가 있고, 심지어 이 거대한 삶의 운명조차 이렇게 작은 내가 아름다울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지금 이 작은 나에게로 응집되고 있다는 이 사실, 그렇게 이 작은 나를 가장 멋지게 살리기 위해 모든 신성한 것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는 이 사실, 이것은 정말로 멋진 이야기입니다.


삶에 대한 가장 멋진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 정도의 존재입니다.


단 1mg의 과장도 없이, 이 우주에서 가장 멋진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획입니다.


우리에게는 계획이 다 있습니다.


삶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가장 멋진 계획이 다 있습니다.


우리가 그 계획 있는 삶의 상호작용 속에 동참하기만 하면, 계획은 이루어집니다.


삶을 살아가는 것은 반드시 마지막을 맞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 것은 반드시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삶은 우리를 가장 사랑스럽게 드러나게 할 바로 이 마지막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계획이 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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