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삶의 묘사: 판타지 세계의 직업 유형으로 알아보는 깨달음"
종교체험 연구의 대가인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체험의 핵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뿌리를 보고서가 아니라 열매를 보고 알게 될 것이다."
결국 깨달음이라고 하는 현상이 곧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문제를 시사하는 이야기입니다.
깨달음은 이처럼 삶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애초에 깨닫는다는 것의 의미가 바로 삶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속성 자체가 원래 깨달음입니다. 깨서 닿는 것입니다.
가상현실과 같은 작은 어항을 깨고, 있는 그대로 끝없이 흐르고 있는 거대한 삶의 물줄기에 닿는 것입니다. 그렇게 삶의 물길을 만나 그 물길과 하나되어 사는 것입니다. 곧, 있는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재미있는 예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게임이나 소설, 영화 등으로 표현되는 판타지 세계에 대한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깨달은 삶, 곧 깨달아 사는 이의 모습을 발견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종족으로 묘사하자면, 깨달아 사는 이는 분명하게 '인간족'입니다. 여기에는 엘프, 드워프, 호빗 등의 유사인간족이 모두 포함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대지에서 태어난 존재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특성을 갖고 있다 해도 신족이나 마족, 천사와 악마 등과 같이, 대지에 근거하지 않은 종족들은 이 범주에서 벗어납니다.
이처럼 깨달음은 철저하게 이 흙으로 만들어져 흙으로 돌아갈 인간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천상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대지의 인간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속성의 문제와도 궤를 함께합니다.
깨달음은 선(good)도 악(evil)도 아니며, 질서(law)도 무질서(chaos)도 아닙니다. '절대중립(true neutral)'입니다. 붓다가 말하듯이, 이것은 어느 진영도 아닌 길, 곧 중도(中道)입니다.
그래서 반지의 제왕으로 비유하자면, 간달프도 깨달은 이가 아니고, 사루만도 깨달은 이가 아닙니다. 여러 차원에서의 간달프에 대한 우리의 선호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한 현자이지만 깨달은 이는 아닙니다. 이것은 선(禪)의 계보에서, 신수가 아닌 혜능이 선통을 잇는 후계자로 선택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선한 것은 좋은 것이지만, 악함을 상정함으로써만이 성립이 가능한 선함은 언제나 그렇게 온전함의 절반일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본격적으로 판타지 세계의 직업의 문제로 들어가면 이러한 지점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먼저, 판타지 세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용사'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용사는 직업이라기보다는 역할에 가깝겠지만, 여러 RPG에서 이 용사를 고유한 직업군으로 분류하기도 하는 까닭에 여기에서도 직업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용사의 핵심은 '정의'입니다. 불의한 악의 세력에 맞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정의의 힘을 대변하는 존재입니다. 소위 말해, 권선징악의 주제를 실현하는 영웅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까닭에, 용사는 깨달음에서 가장 멀리에 있습니다.
깨달음은 정의가 아닌 까닭입니다. 그렇다고 깨달음이 불의인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그러한 영웅놀이를 다만 멈추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용사가 마치 깨달음의 상징처럼 자주 쓰이는 데는, 특히나 무협지의 영향이 지대합니다. 수련을 통해, 또는 기연을 통해, 주인공이 거대하고 신비로운 힘을 얻어 영웅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무협지들에서는 깨달음이라는 이름을 붙여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의 획득'이 '깨달음'으로 등치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정의도 아니고 힘도 아닙니다. 이를테면, 손오공이 초사이어인이 되었다고 해서 깨달은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동일한 이유로, 용사는 깨달은 이가 아닙니다.
이 힘에 대한 문제는 '전사'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전사는 자신의 강인한 힘을 바탕으로, 상대를 격퇴하고, 아군을 보호하는 존재입니다. 곧, 전사의 핵심은 '무력의 행사'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무력(武力)이 아니라 무력(無力)입니다. 이 말은, 깨달음은 강제적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행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현실을 섬세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이 무력(無力)의 이해로 말미암아 진짜 변화가 촉진됩니다.
"내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의 원리로 주요하게 작동하는 전사는 그래서 깨달은 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법사'는 어떨까요?
현자, 연금술사, 소환사, 정령술사 등과 같은 다양한 변주들을 다 같이 마법사로 통칭해보자면, 이들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성의 전능성'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지성으로 남들이 모르는 세계의 규칙을 파악한 뒤, 그 정보의 독점적 소유를 힘으로 삼아 세계를 손에 놓고 다루어보려는 존재들입니다.
이처럼, 다른 이는 모르는 세계의 숨겨진 비밀과 같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기에, 이들은 마치 지혜로운 존재인 것처럼, 곧 깨달은 존재인 것처럼 우리에게 쉬이 착각되곤 합니다.
그러나 마법사와 깨달은 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깨달은 이의 동력은 지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동시에 지성은 추구되는 목표도 아닙니다. '자신의 지성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라는 마법사의 기획은, 깨달은 이에게는 가장 먼저 기각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은 이는 세계를 통제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비밀을 풀어내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시간에, 깨달은 이는 자기 자신을 탐구합니다. 곧, 인간이라는 신비를 탐구합니다. 깨달은 이에게는 세계의 비밀이 아니라 인간의 신비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이것은 이렇게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법사가 경제구조를 파악해 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시간에, 깨달은 이는 동산에 누워 잠듭니다. 따듯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과, 경쾌한 풀벌레소리를 '느끼며' 행복하게 잠이 듭니다.
곧, 마법사의 핵심적 원리가 '지성'이라면, 깨달은 이의 핵심적 원리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마법사는 아무리 신비로운 일을 펼쳐낸다 하더라도, 깨달은 이는 아닙니다.
마법사와 비슷하지만 다른 직업으로 우리는 '성직자'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신앙하는 대상을 통해 기적을 행사하는 존재가 바로 성직자입니다. 성직자는 고귀하고 훌륭하지만, 깨달은 이가 아닌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깨달은 이는 대상을 신앙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를 신뢰합니다.
여러모로 성직자는 종교적 직업이라는 인식 때문에 깨달음과 가까운 존재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의 신앙의 깊이는 삶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대상을 향해 있는 까닭에, 삶의 깊이를 깨닫는 일과는 그 질감이 사뭇 다릅니다. 이 경우, 성직자가 드러내게 되는 깊이란 단지 헌신의 깊이입니다. 곧, 성실성의 강도입니다.
그러나, 정말 유감스럽게도, 성실함은 깨달음의 조건이 아닙니다. 황량한 모래사장에서 성실하게 깊이 모래를 파내려간다고 물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선사(禪師)들이 성실하게 수행하는 제자들을 혼낸 그 이유입니다. 수행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성립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깊이를 드러내야 할 곳은 건조한 사막이 아니라 촉촉한 삶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깨달은 이와 성직자는 명확하게 변별됩니다.
우리는 또한 '치유사'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깨달은 이는 타인을 구제하고 치유하는 힐러인가?'
이 질문은 유효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마치 깨달은 이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의 치유가 일어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결과일 뿐, 치유사와 깨달은 이의 작동 원리는 상이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치유사는 자신의 생명력을 담보로 타인을 치유합니다. 곧, 사실은 제로섬 게임입니다. 자신이 안좋아지는 대신에 상대를 좋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깨달은 이는 삶을 통해 먼저 자신을 치유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삶의 물줄기의 통로가 되어, 그 물줄기가 쏟아져나오는 분수가 되어, 다른 이를 자연스럽게 적시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과 상대가 함께 좋아집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상대를 치유하려는 자기 소진의 노력을 하지 않고, 다만 삶이 그 둘을 함께 치유할 수 있게 하는 통로로서 자신을 열어놓을 뿐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이에게는, 치유사 특유의 "내가 똑바로 구원하지 못했어."라는 오만한 책임의식이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함께 구해내는 삶에 그저 감동합니다. 삶에 대한 감동이 아니라, 자기 능력을 통한 성취감과 그에 상응하는 자기 소진에 의한 피로가 전반적인 정조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치유사는 분명 깨달은 이가 아닙니다.
이밖에도 더 많은 판타지 세계의 직업 유형에 대해 더 상세하게 살펴보는 일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큰 범주에 있어서는 판타지 세계를 대표하는 상기한 직업군들의 특성을 통해 우리는 충분한 청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깨달은 이의 모습에 근접한다고 생각해왔던 직업 유형이, 실은 깨달음과 상당히 멀리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은 유용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미처 생각하기 어려운 의외의 답을 향해 우리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판타지 세계에서의 여러 직업 유형을 기각해온 와중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은 이의 특성을 대단히 잘 보여주는 직업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도둑입니다.
도둑은 현실적입니다. 도둑은 세계를 통제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떠나, 오직 스스로에게 필요한 일만을 하며, 동시에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만을 합니다. 이 말은, 도둑은 사실 파악에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도둑은 억지로 힘을 행사하기보다 섬세하게 관찰하며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 이해의 핵심을 형성하는 것은 바로 도둑 자신의 직감입니다. 곧, 느낌입니다. 그렇게 도둑은 스스로의 느낌을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도둑의 대표적인 특성들은 곧 깨달은 이의 특성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둑은 '깨서 닿는다'는 깨달음의 핵심적인 특성을 그대로 대변합니다.
도둑은 훔치는 자입니다. 도둑이 훔치게 되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곧, 보물입니다. 이처럼 도둑은 보물을 훔치기 위해 언제나, 깨서 닿습니다. 장벽을 깨서 보물에 닿습니다.
판타지 세계를 다룬 매체들에서 곧잘 도둑은 도망의 명수로 묘사됩니다. 도망이란 것은 곧 한계상황에서의 탈출입니다. 이것은 실존의 원리입니다. 이 탈출을 종교적 언어로는 초월이라고도 부릅니다. 하나의 경계를 깨고 그 밖으로 향하는 일, 이것이 곧 초월입니다.
때문에 도둑이 어떠한 장벽을 깨는 일은, 곧 그 장벽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도둑은 이 탈출의 대가입니다. 즉, 도둑은 초월의 대가입니다. 초월이라는 말이 생소하다면, 우리는 이 용어를 다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유.'
실존은 언제나 밖을 향한 탈출이고, 그래서 자유입니다. 인간의 실존은 곧 자유입니다. 그리고 도둑은 바로 이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상을 대변합니다.
도둑이 보물상자를 여는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사방의 장벽에 갇혀 있던 귀한 보물이, 도둑으로 말미암아 그 장벽 밖으로 나와 자유를 찾게 됩니다. 그때서야 이제껏 보이지 않게 가리워져 있던 그 보물의 빛이 더는 장벽에 의해 막혀 있지 않은 사방을 환하게 비춥니다.
곧, 도둑은 보물을 정말로 귀한 보물로서 해방하는 자입니다. 장벽에 갇혀 있던 인간을 사방으로 열린 이 우주의 가장 귀한 존재로서 드러내는 자입니다. 그래서 도둑은 깨달은 이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갇혀 있던 한계로부터 어떻게든 틈새를 찾아내 탈출하는 도둑의 모습은, 자유를 향한, 그리고 자유 그 자체인 인간의 고귀한 자기증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둑의 행위는 마치 분수의 물줄기처럼, 도둑 주변에 흘러넘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러한 도둑을 대도(大盜)라고 합니다.
이 큰 도둑이 하는 일은, 사방이 금고처럼 꽉 막힌 상대에게서 보물을 훔치는 것입니다. 억압과 통제로 인해 철저하게 폐쇄되어 있던 관계로, 상대 자신도 보물인 줄을 몰랐던 바로 그 보물을 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둑이 장벽을 깨고 보물을 바깥으로 드러낸 후에야, 상대는 그것이 보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너무나 두렵고 수치스러워서 자신이 금고 안에 꼭꼭 숨겨놓은 그것이 실은 무엇보다 빛나는 보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큰 도둑은 이처럼 상대의 금고 안에 든 보물을 훔치는 데 성공한 다음에는, 그 보물을 그대로 상대에게 돌려줍니다. 그가 재미와 의미를 느끼는 활동은 보물의 소유가 아니라, 보물을 장벽에서 탈출시키는 바로 그 행위 자체인 까닭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큰 도둑은, 보물이 아니었던 것을 보물로서 드러내는 활동이 다만 기쁘기 때문에 큰 도둑이 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도둑은 세상에 점점 더 보물이 없어지게 하는 자가 아니라, 보물없던 세상에 점점 더 보물이 많아지게 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도둑과 같이, 세상에 있는 그대로의 것들이 실은 있는 그대로 보물이었음을 드러내는 일, 이것이 있는 그대로 사는 일입니다. 깨달아 사는 일입니다. 도둑이 깨달은 이의 상징인 이유입니다.
여기에서 도둑은 분명하게 보물의 증인입니다.
보물을 훔치러 가기에 가장 먼저 그 보물을 보게 되고, 가장 가까이에서 그 보물을 보게 되는, 보물에 대한 가장 생생한 증인입니다.
생생(生生)하다는 것은 삶이 두 배라는 의미입니다. 곧, 정말로 살아 있는 것에 대한 묘사입니다.
보물에 대한 증인으로 사는 것, 그것이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삶입니다. 깨달은 삶입니다.
이를 다시 은유하자면, 보물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창조에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보물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는 이 모든 것을 우리도 그와 같은 시선으로 함께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이 정말로 '좋은 것'이라는 사실에 하나님과 같이 기뻐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보물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도둑이 하는 모든 일입니다.
하나님은 도둑과 같이 오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그 마지막 날, 모든 것이 숨김없이 드러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도둑과 같이 오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숨겨져 있던 우리의 보물로서의 면모가 개방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도둑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을 위한 마지막의 일을 하는 존재입니다. 이 우주의 마지막 보물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이는 도둑과 같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도둑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