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슬픔: 시선이 개방하는 것
이 영화는 왜 이토록 따듯하고, 왜 이토록 슬픈 것일까.
아마도 이 영화가 우리 삶의 근본적인 성질, 바로 역설성을 정확하게 포착해내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들을 닮아 있다. 서럽고 웃기며, 끈질기며 어설프고, 서글프며 온기어리다.
우리가 대체로 동의할 수 있는 우리 삶에 대한 평가란, 바로 이번 삶은 망했다는 것이다. 결코 지금과 같은 것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되어버렸다. 그 어떤 불면의 밤을 거듭한다 해도 돌아갈 수 없고, 수천 개의 양동이에 후회의 눈물을 담는다 해도 돌이킬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일회적이다. 곧, 우리의 삶은 원 컷, 원 테이크다. 결코 멈추거나 돌이킬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이미 끝나버렸다. 망해버렸다. 형편없다. 한심하다.
망해버린 삼류 좀비영화와 같다. 재미도 감동도 없는, 삼류 배우들의 삼류 연기로 구성된 삼류 팝콘무비다. 즉, 우리의 삶은 누군가가 술자리에서 농담거리로 취급할 만한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한순간의 웃음이라도 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 기쁨을 제공하는 효용에서 유일한 위안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초반 30분은 바로 이러한, 망해버린 삼류 좀비영화의 실태를 보여준다. 턱을 괴고 무감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몇 번이라도 영화관을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게 될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의 우리의 삶에서 무수하게 탈출을 꿈꾸어봤지만, 그 탈출의 실현마저도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힘겨운 시련이 되었던 것과 같이.
그리고 여기에 단 하나의 구원이 있으니, 그것은 카메라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이 삼류 좀비영화의 크레딧이 다 오른 뒤에도 스크린을 투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거기에 정말로 무엇이 있는가를 기필코 드려내려는 듯이, 가장 정직한 몸짓으로 우뚝 버티고 서있는 카메라의 시선은 이윽고 그 모든 것을 개방해낸다. 벅차고, 또 벅차도록.
이 30분 남짓 되는 좀비영화가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그 이면의 이야기는 그렇게 개방된다.
'싸게, 빠르게, 그리고 적당한 퀄러티로'라는 기치하에 상업적인 영상들을 제작해오던 삼류 영화감독은 어느날 한 제안을 받게 된다. 그것은 원 컷, 원 테이크로 생방될 수 있는 좀비물을 한 편 만들어달라는 제안이다. 이를 수락한 감독은 적당한 삼류 각본을 구성하고, 적당한 삼류 배우들을 모집한다.
우리 삶의 닳고 닳은 전형적인 군상처럼, 이 영상물은 적당한 갈등과 적당한 타협 속에 무리없이 성취될 운명이었다. 그 운명은 삼류 감독을 삼류 감독으로, 삼류 각본을 삼류 각본으로, 삼류 배우를 삼류 배우로 다시 한 번 정립시키는 동어반복의 운명이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생방송 당일에 사건은 일어난다. 출현하기로 했던 배우 둘이 사고로 인해 불참하게 된 것이다. 이 해프닝 앞에서, 감독은 결국 자신과 전직 배우였던 자신의 아내를 대신 출현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시작된 촬영현장에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여러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배우가 배탈이 나고, 술에 취하고, 연기에 과몰입되는 한편, 각본은 애드리브로 메워지고, 촬영기사는 허리를 다쳐 쓰러지고, 크레인은 무너진다.
이것은 이른바 삶의 반역이다.
자신을 또 한 번의 삼류의 동어반복으로 정형화하려고 하는 통제의 의도 앞에서, 삶 자신이 결코 통제될 수 없음을 여러 사건들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 반역의 선언은 이른바 다음와 같이 형상화될 수 있다.
"삼류가 아닌 진짜를 보여봐."
감독도, 배우도, 여러 스탭들도 모두가 하나되어 이 통제되지 않는 삶 앞에서, 삶의 주체가 실종된 부재의 간극을 메우고 원 컷, 원 테이크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모든 최선을 다한다. 즉, 그들은 이 통제할 수 없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그리고 진짜로 삶의 주체가 된다. 그들 자신을 삶의 주체로 세우게 된다.
이 삼류 영화를 성립시키기 위해, 이제 주체성을 회복한 그들이 가장 깊은 정성을 담아내는 장면들은 깊고 그윽하기만 하다. 이 삼류 영화를 향한 정성을 통해, 그들이 '진짜'로 거듭나는 장면은 가득히 눈물겹기만 하다. 삼류 영화를 향한 정성의 깊이는 곧 그들 자신을 향한 정성의 깊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여기에는 분명히 정성이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망했다고, 우리 자신마저도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 삶 속에는, 반드시 그 삶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투여된, 아무도 모를 그 깊고 가득한 정성이 있었던 것이다.
보이는 것 이면에는 반드시 그 정성이 있었다. 가장 깊은 정성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그렇게 우리 삶을 가득 사랑하고 있었다. 아무리 형편없는 삼류의 삶일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이 사랑이 있었다. 아니 그것이 삼류였기에, 오히려 삶은 스스로를 더욱 사랑하고자 하는 역설을 성립시켰다. 이 역설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진짜로 살아냈다. 진짜인 것으로 살아났다.
카메라의 시선이 개방하는 것은 언제나 바로 이것이다.
삶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그 이면에서 사랑도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시선 또한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그 이면에 있는 것을, 바로 그 사랑을 개방하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우리 삶을 비추고 또 비추어낼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가치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치가 성립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곧 우리 삶을 향한 시선의 가치를 은유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처참하고, 단지 끝날 때만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어떤 희망도 없던 우리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 삶을 이어지게 하기 위해 우리가 투여한 그 모든 정성 속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부정될 수 없는 진짜인 우리 자신의 웃음이 반드시 존재했다. 그 웃음은 슬픔을 이해하는 자의 웃음이었다. 바로 사랑이 짓는 따듯한 슬픔의 미소였다.
우리의 삶을 고요하게, 끝없이 응시하고자 하는, 그럼으로써 반드시 이 사랑의 미소를 발견하고자 하는 의도가 바로 시선이다. 그래서 시선은 언제나 개방해낸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이 삶의 의미를, 곧 사랑의 실재를.
부재한 것이 아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원 컷, 원 테이크인 이 삶이, 곧 단 한 번뿐인 이 삶이 우리에게 얼마나 따듯하고 슬픈 것이었던가를, 그토록 우리에게 얼마나 생생한 진짜였던가를, 이 삶의 주인공인 우리 자신이 바로 그렇게 얼마나 귀한 단 하나의 보석이었던가를.
카메라의 렌즈가 빛나는 이유는, 그 시선 끝에 비추어진 우리가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시선은 이처럼 계속 "빛이 있으라."라고 말한다. 이 빛으로 가득한 우주를 향해, 카메라는 결코 멈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