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이해못할 눈물이 너를 키우리니
언제나와 같은 우리의 이야기는, 작은 마을과 비밀 아지트와 정겨운 친구들에서 시작된다. 언제나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은 것만 같은 우리의 이야기는 그래서 늘 유년과 성년 사이의 어딘가에쯤 놓인 과도기의 이야기였고, 흔들리는 경계의 이야기였으며, 가냘픈만큼 절실한 발버둥의 이야기였다.
그 시절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을 그토록 사랑했던 이유는, 분명 우리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함께함으로써 우리는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너도, 나와 똑같이 흔들리고 있었기에, 너와 함께하는 그 시간만큼은 나는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이상하고 잘못된 존재이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흔들렸고, 우리는 함께 온전했다. 그렇게 내 옆에 네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어느샌가 눈치채게 되었을 것임이 분명한데, 그것은 우리가 함께하는 이 시간이 결코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선명한 어떤 직감이었다. 이 상실의 징조가 우리에게 모험을 향한 열정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은 분명 역설적이다. 모험은 뜨거운 안녕의 여정이다. 모든 모험은 잘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잃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어느 여름날, 언젠가의 우리였던 소년들은, 마찬가지로 언젠가의 우리였던 한 소년의 시체를 찾기 위해 숲 속으로 모험을 떠난다. 이 모험의 끝에서 소년들이 얻고 싶은 것은 소년의 시체, 곧 소년의 죽음이다. 죽음은 가장 정확한 상실이다. 이처럼 소년들은 소년의 상실을 얻기 위해, 즉 소년을 잃기 위해 이 상실에의 여정에 나선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처럼 그들 또한 착각하고 있던 것이 있다. 그들은 소년의 시체를 발견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영웅이 되기를 바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즉, 소년의 상실은 그들에게 영웅의 획득을 의미했다. 아주 단순하게, 소년을 대가로 더 나은 자신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웅의 꿈을 함께 꾸며 모험을 시작한 소년들은 모험의 과정 속에서 무수한 현실의 벽을 만난다. 그리고 그 벽들에 의해 그들의 무력함은 더욱더 알려지며 이로 인해 영웅의 꿈은 하나둘 깨어지게 된다. 그리고 모험의 끝에 결국 소년의 완전한 상실의 증명인 시체를 발견하게 된 소년들은, 동시에 결코 영웅이 아닌 무력한 소년으로서의 그들 자신의 정직한 모습을 함께 조우하게 되며, 이로 인해 전환이 이루어진다.
소년의 죽음을 도구삼아 영웅이 되려했던 소년들은 이제 역으로 그들의 목적이었던 영웅을 포기하고 소년의 죽음 그 자체를 지키려 하게 된다. 그들은 눈치채게 되었던 것이다. 상실이라는 사태는 다른 근사한 목적을 위한 도구적 사태가 아니며, 상실된 것, 즉 소년이라는 존재 또한 다른 우월한 성취를 위해 도구처럼 쓰여야 할 대상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소년은 언제나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었던 유한한 존재다. 이 '하고 싶음'과 '할 수 없음' 사이에서 체험되는 간극을 우리는 슬픔이라고 부른다. 이 슬픔은 유한한 존재인 소년의 삶에, 그리고 소년과 동일하게 유한한 존재인 우리 모두의 삶에 내려앉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슬픈 유한성의 존재며, 때문에 인간은 슬픈 소년이다.
그렇기에 소년의 죽음은, 그리고 그 죽음이 드러내는 슬픔은 결코 도구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부정하려는 의도와 같은 것이다.
상실은, 우리로 하여금 상실된 것을 다시 기억하게끔 한다. 상실된 것의 의미를 상기하게끔 한다. 이 과정은 애도라는 이름으로 형상화된다. 애도는 상실된 것의 의미를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해 그것을 잘 상실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소년들의 이 모험은 결국 애도의 모험인 셈이다.
소년들은 소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기하기 위해, 즉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상기하기 위해 이 모험을 떠났던 것이며, 모험은 그들에게 있어 그 자체로 애도의 과정이 되어주었다. 이로 인해, 결국 모험의 끝에서 그들은 소년이 의미하는 유일한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슬픔이다. 소년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이 슬프다는 그 사실이다.
다시 한 번,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는 유한성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슬픔의 이유다. 이 유한성을 무시하고 '하고 싶음'에만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할 수 있음'으로만 치환시키고 있을 때, 우리는 답답해하며 화를 내게 된다. 이 화는 결국 '할 수 없음'의 슬픔을 무시하며 도구화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소년들 또한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그동안 늘 발버둥칠 수밖에 없었던 답답함의 이유는, 그들이 대단한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무력한 한계로 가득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그들은 유한성이 지시하는 슬픔이라고 하는 자신들의 삶의 근본적인 성질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며, 때문에 삶이 늘 불만족스럽게만 경험되었던 것이다.
소년의 죽음은 그 죽음을 애도하는 우리로 하여금 슬픔이라고 하는 소년의 삶의 의미를 상기하게끔 한다. 죽었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다. 죽음이라는 상실을 통해, 삶 자체가 근본적으로 내포한 슬픔이 드러나는 것이다. 죽었든, 죽지 않았든 간에,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이 삶의 유한성이 언제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다.
삶이 슬픈 것이라는 이 명제의 발견은 소년들의 눈빛을 한층 깊게 만드는 대단히 조숙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슬픔의 발견은 인간을 깊어지게 한다. 슬픔의 이해는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슬픔을 깊이 이해하는만큼, 삶에 대한 이해의 깊이 또한 정확하게 심화된다. 그리고 심화된 이해는 결국 우리를 삶의 고유성에 대한 국면으로 접어들게 한다.
이는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음에 대한 또 다른 내적 변주이기도 한데, 그 표현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해받고 싶지만 이해받을 수 없다.'
그 어떤 가장 좋은 이해자라 할지라도, 그 이해자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결코 표현될 수 없는 우리 삶의 가장 심원한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에서는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지닌 심연성이다. 우물이 너무나 깊기 때문에, 그 우물의 가장 밑바닥을 누구도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는 삶이 내포한 가장 심오한 역설이며, 가장 신성한 신비다.
우리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슬픔을 경험할 때, 이는 곧 우리가 가장 깊은 삶의 자리에 도달해 있다는 의미다. 그 자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한 자리다. 즉,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의 가장 고유한 자리다. 우리가 우리 자신인 의미다.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만드는 이 고유한 자리는 슬픔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다. 슬픔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슬픔에 상냥해진다는 것이다. 슬픔 앞에 친절한 눈빛의 깊이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성숙해진다는 것, 즉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픔을 담아내는 눈빛으로 삶을 이해하며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곧,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더 많은 성취를 이룸으로써가 아니다. 너무나 간절히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어떻게든 할 수 없었기에 야기된 더 많은 실패와 좌절과 무력함에, 즉 우리의 모든 한계에 상냥해짐으로써 우리는 어른이 된다. 그 모든 한계 앞에 알려지는 슬픔에 대해, 우리가 흘린 눈물만큼 우리는 성숙해진다. 이른바, 눈물이 소년을 키운다. 눈물이 우리를 키운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었던 그 모든 발버둥 속에서, 말로는 차마 다할 수 없는 혼자만의 그 모든 애틋한 여정이 알리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우리의 그 모든 깊은 슬픔이, 우리를 더욱더 아름답게 길러낸다. 더 깊은 우물이 더 많은 물을 담고 있는 것과 같다. 가장 깊은 우물이 가장 맑은 물을 담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사실 또한 함께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삶은 상실로 인해 완성된다. 이 말은, 삶은 상실로 인해 비로소 의미를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슬픔이다. 슬픔은 바로 깊이다. 때문에 우리의 삶은 상실로 인해 슬픔을, 즉 깊이를 회복하게 된다. 깊이는 공간의 은유로서 동시에 너비로 치환될 수 있다. 따라서 삶의 완성은 곧 너비의 회복이다. 바로 우리 가슴의 너비의 회복이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우리 삶에서 상실된 그 모든 것이 다 담기고도 넘쳐나는 그 광대한 가슴의 존재로서 회복된다.
그것은 밤하늘과 같은 존재다.
하늘 아래서 우리가 상실한 모든 것은 하늘로 올라가 하늘에 담긴 의미가 된다. 슬픔이 된다. 일렁이는 작은 별이 된다. 밤하늘과도 같은 우리의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별이 반짝일 때, 우리의 눈동자도 반짝인다. 별이 더욱 깊은 가슴을 향해 흐르는 유성이 될 때, 우리의 눈물도 흐른다. 아무도 모르는 별은 아무도 모르는 눈물이 된다. 우리의 가슴은 더 깊은 호수가 된다. 호수에 담긴 별빛은 더욱 영롱하고, 눈물은 더욱 맑다.
누구도 이해못할 그 별빛의 슬픔을 가장 옆에서 묵묵히 지키는 이 밤하늘이 얼마나 고요했던가를, 그 침묵의 상냥함을, 우리는 언제까지고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