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2018)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천국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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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붓다가 영취산에서 설법을 할 때의 일이었다. 어느날 붓다는 법좌에 올라 그저 꽃 한 송이만을 든 채 아무 말 없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붓다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다 어리둥절하였으나, 오직 가섭만이 그 의미를 알아듣고 환한 미소로 화답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붓다도 함께 미소지었다.


이를 염화미소(拈華微笑)라고 한다.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향해 선은 정확하게 이 염화미소로 대답한다.


이제 여기 시공을 건너온 또 다른 배경 속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에게 묻는다.


"천국이란 어떤 곳인가요?"


이 영화는 마리아의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탐구가 결국 어떠한 대답으로 이어지게 되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는 영화다.


마리아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귀신 들린 여자, 미친 여자, 창녀 등으로 대우받으며, 예수를 따르던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좀처럼 정당한 위상을 회복하지 못해왔다. 6세기 로마의 교황인 그레고리 1세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창녀로 해석함으로써 이러한 굴절된 이해는 더욱 굳건한 선입관을 형성해왔고,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소 그녀가 예수를 따르던 사도 중의 사도로서 대접받을 수 있기까지는 십 수세기가 지나야만 했다.


이는 결국, 영화에서도 묘사되듯이, 여성인 마리아가 다른 남성 사도들보다 더 심층적인 종교적 의미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남성이 중심이 된 가부장적 종교의 구조 속에서는 차마 승인되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마리아의 개인사 속에서도, 그녀가 귀신 들린 여자처럼 취급받게 된 이유 또한 이와 동일하게 그려진다.


마리아는 그녀의 아버지와 가족들이 정한 약혼자와의 결혼을 한사코 거부하며 저항한다. 즉, 유태사회에서 절대적인 아버지의 법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자 그녀의 가족들은 마리아를 사악한 귀신에 씌여 정신이 이상해진 존재로 대하게 된다. 구마의식의 형태로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하는데, 즉 아버지의 법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을 가하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그리고 그 구분을 통한 규탄과 처벌의 논리는 바로 이렇게 이루어진다. 세계를 안정되게 만드는 아버지의 법을 따르면 정상,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으로 규정되어 심판되는 이 억압의 역사는, 이처럼 늘 반복되어 왔다.


마리아는 아버지를 따르고 싶지 않은 내적인 몸의 울림과, 아버지를 따라야 한다는 외적인 생각의 압력 사이에서, 결국 딜레마에 갇혀 아무 것도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쓰러지고 만다. 그렇게 마리아가 비정상인으로 소외되어 버려진 그 자리에 예수가 찾아온다.


마리아는 청한다.


"제 안에 아버지를 거부하는 이 귀신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는 답한다.


"여인아, 여기에 귀신은 없다. 너는 하나님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러자 마리아는 즉시 기억해낸다. 자신이 고요함 속에서 간혹 느끼던, 자신과 함께하던 그 시선이, 지금 자신 안에서 그녀를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서 살게 하려는 그 울림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이 사실을 이해한 마리아는 쓰러져있던 그 소외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를 따라 나선다. 그녀 앞을 가로막는 아버지와 가족들의 거센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그녀 자신으로 살겠다는 거룩한 의지를 그녀의 삶으로서 선언하게 된다. 아버지의 법이 제공하던 안락과 번영이 있는 마을의 삶을 포기하고, 차가운 잠자리와 거친 식사만이 있는 황무지의 삶을 택한다 할지라도, 마리아는 절대적으로 그녀 자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으로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리아는, 하나님을 택하는 삶이란, 곧 종교적 삶이란,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한다.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이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 영화에서는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정확하게 묘사해낸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타자를, 세계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사는 삶이다. 자신과 타자와 세계를 향해 전적으로 개방된 삶이다. 자신과 타자와 세계를 정직하게 맞상대하는 삶, 곧 만남(encounter)의 삶이다.


그녀는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도 그녀 자신이 살아왔던 이 형태의 삶이, 예수가 살아가고 있는 동일한 형태의 삶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는 정확한 예수의 이해자로 형상화된다. 마리아는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 삶에서 야기되는 불안, 두려움, 슬픔, 외로움 등과 같은 마주함의 반동까지도 모두 포섭한 뒤 펼쳐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용기를 이해한다.


이것은 곧 자신과 타자 및 세계를 정직하게 마주하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지를 알고, 그렇게 두려워하는 자기 자신을 수용하는 용기며, 이 수용을 통해 타자 및 세계 또한 수용하고자 나아가는 그 용기다. 바로, 위대한 신학자 틸리히가 묘사하는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courage to be)'다. 이 용기는 곧 예수가 자신의 삶으로 전하고자 한 인간의 본이며, 마리아가 정확하게 이해한 인간의 삶의 정수다.


이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의 정반대편에 놓인 것이 바로 희생의 논리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 희생양을 통해 속죄하려는 이들을 보며 불같이 화를 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살지 않을 때, 우리는 늘 무언가를 희생시키게 된다. 그 희생을 고귀한 이름으로 포장한다. 특히 사랑이라는 언어는 희생을 미화하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 무엇도 희생시키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예와 같다. 예수는 사랑을 희생의 이름으로 바꾸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까지도 그 희생의 논리에 복속시킴으로써 그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이 억압의 구조에 대해 그토록 역정을 낸 것이다. 예수는 공식적으로 천명한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희생양이 되어야 할 것임을, 더는 누구도 희생되지 말아야 할 것임을, 이 어두운 희생의 역사가 종결되어야 할 것임을.


예수는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이 용기가 결코 희생될 수 없음을 다시 확인시키기 위해 마리아에게 말한다.


"이제 일어나, 눈을 뜨고 보렴. 네 삶은 지금 이순간 막 시작된 거야. 누구도 네 삶을 멈출 수 없단다. 누구도 네가 존재하고자 하는 이 삶을 막을 수 없단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이 용기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결코 희생되어야 할 존재가 아님을 알리는 이 용기는, 우리를 벅차오르게 하는 것이며, 곧 우리의 힘 그 자체다. 다시 한 번, 틸리히는 말한다. "존재는 힘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때, 우리는 우리가 이미 힘이 있는 존재였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힘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고자 할 때 역설적으로 바로 그순간 우리의 힘이 확인되는 것이다.


마리아의 독립은 아버지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은 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즉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가 곧 마리아를 힘있는 존재로 알려지게 한 것이다. "자유가 너희를 진리하게 하리라."라는 명제는 여기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이처럼 마리아가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했던 용기는, 마주하는 삶 속에서 타자와 세계를 향해 다시금 뻗어나가게 된다. 이로 인해, 타자와 세계 또한 그 용기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에 개방된다.


몰락한 마을에서 홀로 병들어 죽어가는 여인의 옆에 함께 누워 마리아는 말한다.


"나를 마주봐요. 내 눈을 봐요. 하나님은 진실로 다 알고 계세요. 당신이 얼마나 선하게 열심히 살았는지 이미 다 알고 계세요."


죽음 앞에 있는 한 여인과, 삶 앞에 있는 또 다른 여인이, 곧 죽음과 삶이, 이렇게 서로를 마주하며, 서로를 마주본다. 시선이 맞는다. 그녀들의 눈에서 함께 흐르는 눈물이, 가장 심원하게 갈라져있던 죽음과 삶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죽음과 삶이 같은 것을 느끼며, 같은 것을 증거한다.


마리아는 또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마주하며 동일한 현실을 경험한다.


예수를 잃게 되는 상실 속에서 무너져내린 마리아는, 마치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가는 것만 같은 절망적인 추락 속에서 역설적으로 거대한 깊이를 발견한다. 그 무언의 깊이 속에서 고요한 자신을 마주한 마리아는, 이내 십자가 앞으로 향해 예수를 마주한다.


그리고 예수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그 함께 맞닿은 시선 속에서, 마리아는 전부 다,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마리아는 분명 물었던 적이 있다.


"천국이란 어떤 곳인가요?"


이 질문 앞에, 예수는 마리아를 고요하게 마주보며, 마리아를 향해 그저 환하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 미소에 끌려 마리아도 함께 미소지었다. 불현듯, 마리아의 눈에서는 왈칵 눈물이 터져나왔다. 이 순간, 마리아는 정말로 알았던 것이다. 천국이 대체 어떤 곳인지를, 천국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천국은 염화미소다.


이 말은 천국이 마음 속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마음이란 것은 편의상의 언어일 뿐 애초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천국은 미소 속에 있는 것 또한 아니다. 미소는 천국이 거기에 실재했다는 결과로서의 증거일 뿐이다.


우리가 마주서고, 마주하고, 마주보는 시선이 함께 맞닿는 그 눈맞춤의 자리에 천국이 있다. 즉, 천국은 만남 속에 있다. 만남이란, 통함이다. 말로 전하지 않아도, 이미 전해진 것이다. 이미 그것인 것이다. 이미 하나인 것이다. 분리되지 않은 것이며, 그래서 영원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지금 이 삶의 자리가 곧 천국의 자리다.


이제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와 하나임을 정확하게 이해한다. 마리아는 예수다. 예수는 이렇게 부활했다. 마리아는 이 부활의 가장 정확한 증인이다. 예수가 이미 부활했음을 알리는, 그리고 더는 상실되지 않을 예수의 영원한 부활을 알리는 가장 거룩한 증인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가 언제라도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리는 가장 생생한 산증인이다.


그렇게 마리아는 이 기쁨의 소식을 알리고 싶어서, 마주하고 싶어서, 또 만나고 싶어서,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궤적이 천국의 미소처럼 눈부시다.


"천국은 한 여인이 땅에 심은 겨자씨와 같으니, 이 작은 씨가 커다란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가득 깃들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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