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참 예뻐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들리는 대사인 "넌 참 예뻐."라는 이 표현은, 우리의 통속성을 자각함으로써 야기되는 낯뜨거움을 담지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존재의 가장 원초적인 성질을 성찰해내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간에 존재의 민낯을 만나는 체험은 물론 다소간에 부끄러운 일이다.
존재의 민낯은 곧 존재의 핵심적인 속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가 어떠한 각양각색의 꼴로 드러나있든 간에, 그 모든 꼴들이 가득 펼쳐내고 있는, 또 그만큼 간절히 눈치채이길 바라는 핵심적인 속성은 바로 예쁨이다.
분명 우리는 언제, 어떤 경우이든, 우리가 예쁘다는 그 말을 듣고 싶어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예쁘다는 표현은 미추의 변별로 이루어지는 추함의 반대편에 있는 속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더 정확하게는 의미의 문제다. 우리가 선하든 악하든, 잘났든 못났든, 아름답든 추하든 간에, 우리가 의미있게 스스로를 체험할 때 우리는 동시에 스스로의 예쁨을 체험하는 것이다.
부연하건대, 현대에 들어와 존재론은 의미의 문제가 되었다.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해줄 것은 바로 우리의 의미다. 존재의 무고성을 묘사하고자 하는 "있는 그대로 괜찮다."와 같은 표현은 곧 "있는 그대로 의미있다."와 동일한 뜻을 담고 있다. 한적한 숲속의 들꽃처럼, 산책길 위에 마주친 길고양이처럼, 여름날 소나기처럼, 그렇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 예쁜 것이고, 있는 그대로 의미있는 것이다. 이와 같다.
존재가 내포하는 이 예쁨의 속성을 자신의 시선 끝에서 발견해내는 이들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물론 이는 예술가라고 하는 특정한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한 기능이며, 활동이다. 또 삶이다. 이는 누구라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한 형태며,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래서 상기한 표현이 늘 입에 붙게 된다. 자신이 마주하는 모든 것에서 예쁨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이다. "넌 참 예뻐."
이 영화의 주인공인 클레어의 카메라는 바로 그러한 기능을 한다. 카메라를 통해, 카메라가 포착한 피사체의 예쁨은 개방되고, 의미는 회복되며, 존재는 정당화된다.
클레어는 이러한 작용을 변화라고 부른다. 자신이 카메라로 촬영한 대상은 촬영 전과 후가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이것이 당연한 이야기인 이유는, 클레어가 근대가 아닌 현대를 살고 있는 까닭이다. 즉, 그녀는 뷰파인더 너머의 객체적 대상을 보고 있는 분리된 주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피사체의 삶에 적극 참여하는 시선이다.
개입하지 않는 중립적 관찰이란 없다. 물리학적 이야기다. 관찰이란 행위 자체가 이미 개입이다. 곧, 참여다. 그리고 참여로 말미암아 참여된 것은 변화된다. 다시 한 번, 당연한 이야기다.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예쁨을 보고자 하는 시선으로 인해, 예쁨은, 의미는, 존재는 회복된다. 곧, 존재의 위상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예쁘고, 의미있고, 정당한 것으로서.
우리는 이를 예술가의 시선이라고 명명할 것인데, 그래서 이 시선은 곧 신적인 시선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신적이라는 표현은 사랑의 초월성을 담보하기 위해 채용하는 은유다. 그렇다. 이 예쁨을 바라보는 사려깊은 시선에는 분명하게 사랑이 담겨있다. 아니, 이 시선 자체가 사랑이다.
클레어는 말한다.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삶을 천천히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어떠한 피사체를 촬영하고자 할 때 그 피사체의 삶을 대하는 태도며, 또한 사진이라는 남겨진 삶의 기록물을 활용해 이루고자 하는 방법론이다.
이는 결국 기억의 문제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삶은 늘 변화하며 흐르는 까닭에, 우리는 삶 속에서 결코 삶을 포착할 수 없다.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삶의 흔적, 즉 우리의 과거뿐이며, 정확하게는 우리의 기억뿐이다.
너무나도 괴로웠던 까닭에 우리가 잊고 싶은 그 기억을, 차분히, 천천히, 고요하게 다시 바라볼 때, 거기에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클레어는 분명 말하고 있다. 우리가 상대의 눈동자를 고요하게 응시함으로써 그 상대의 정직한 느낌을 전해받듯이, 우리의 기억을 고요함 속에 흐르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기억이 전하고 있는 그때의 삶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정직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직하다는 것은 굴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다. 때문에 지나간 우리 삶의 모든 자취 속에 담긴 이 정직성의 발견은 다시 한 번 예쁨의 의미를 함축한다. 곧, 우리는 알게 되는 것이다. 그때의 우리 자신도 예뻤다는 사실을, 아무리 잘못했고, 못났고, 추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쁜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모든 고등종교의 전통에서 이 바라봄(behold)의 원리는 가장 중요한 기제다. 바라본다는 것은 곧 존재(be)를 붙잡는(hold) 것이다. 잃은 것을 다시 찾고, 잊은 것을 다시 기억하며, 떨어진 것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클레어의 카메라는 정확하게 이 기능을 한다. 예술가의 시선은 정확하게 이 역할을 한다.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정확하게 이처럼 살아간다.
사랑은 관심을 갖고 고요하게 바라보는 일이며, 바라봄으로써 함께 그 삶에 참여되는 일이다. 이러한 사랑은 언제나 완성된다. 즉, 완성형이다. 완성은 완결이며, 곧 종결이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이 알려진 그 순간 완성되며 동시에 종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넌 참 예뻐."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사랑이 시작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지 않다. 사랑은 바로 그 말과 함께 완성되며, 종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가장 완벽한 순간의 음성언어다. 결코 반복되거나 재현되지 않는, 이 우주에서 단 한 번뿐인 가장 거룩한 사건이다.
성경의 은유를 빌려보자면,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한 뒤 이렇게 발화하였다.
"다들 보기에 참 좋구나."
"넌 참 예뻐."의 또 다른 변주인 이 표현과 함께 신은 활동을 멈추었다. 거기까지가 신의 역할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남은 것은 우리의 삶이다. 가장 예쁜 것으로서 그 존재가 있는 그대로 정당화된 우리가 걸어갈 새로운 길뿐이다. "넌 참 잘 날아."라는 말을 들은 갈매기가 할 일은, 그 자리에 앉아 다시 한 번 동일한 말을 들을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는 일뿐인 것과 같다.
결국 사랑은 우리의 실수와 과오로 인해 우리가 부당한 존재로 판정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삶을 종결짓고,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완결, 즉 완성과 종결로 표현된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 이러한 사랑이 내포한 종결의 함의를 잘 그려내고 있다. 사랑은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모든 변화에는 종결의 기회가 필요하다. 과거와는 다른 존재임을 주장하면서, 과거의 삶을 반복하는 새로운 존재란 애초 성립될 수 없다. 새로운 존재란 곧 종결된 존재다. 사진의 속성이 또한 그러하다. 사진은, 흘러가는 우리 삶에서의 완성된 한 순간의 증거인 동시에, 그 자체로 그 순간의 명백한 종결을 의미한다. 이른바, 박제된 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클레어는 막상 사진이라는 결과물에 대해서는 조금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진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을 찍는 예술가의 시선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사진을 찍기 전후로 피사체가 다른 존재인 것처럼, 사진을 촬영하는 그녀 또한 촬영 전후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클레어는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1분 전과 1분 후가 다른 존재로 드러나는, 즉, 1분 전의 예쁨과 1분 후의 또 다른 예쁨이 각각 드러나는 이것이 우리의 삶의 정체다. 이처럼 '보기에 참 좋은 것'은 공시적인 지평뿐만이 아니라 통시적인 지평 속에서도 거듭해서 새롭게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 시공의 날실과 씨실이 끝없이 엮어내는 삶의 어여쁨의 속성을 눈치챈 천상병 시인과 같은 이는 그래서 다시금 이렇게 발화하기도 하였다.
"요놈, 요놈, 요 이쁜놈."
이 말을 듣게 됨으로써 언제나 우리의 삶은 완결된다. 그리고 또 다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 삶도 어여쁠 것이다,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