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의 신화: 하나의 관점, 하나의 마음"
집착이 고통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집착의 소재가 다양한 것이 아닙니다. 집착의 소재는 언제나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입니다.
즉,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우리가 고통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뭔가 나쁜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다만 고통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받는다는 이 이야기는 더 섬세하게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에 집착한다는 것은, 고통만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빨간 볼펜의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빨간 볼펜을 싫어하기에, 그 빨간 볼펜에 대한 생각을 1분간 하지 않으려고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분명 우리는 그 1분 동안 빨간 볼펜만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고통을 어떻게든 없애야겠다는, 고통만을 바라보는 그 집착이,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자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구원자는 아주 단순하게, 누군가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으로 상정되는 존재입니다.
체 게바라는 아주 현명하게, "우리 중 누구도 다른 누군가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스스로를 구원할 뿐입니다."라는 통찰을 남겼지만, 구원자에 대한 갈망은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욱더 커다란 신화를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구원자의 신화가 사실 우리의 고통을 더욱 배가시키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자를 기대하고 있기에 더 고통받게 됩니다. 이는 이러합니다.
구원자의 정체는 누구보다도 고통에 집착하는 이입니다. 누구보다도 더 고통이 없어야 한다며, 그렇게 고통만을 바라보는 이입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고통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가 구원자가 되는 것일까요?
고통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 즉 가장 두려워하는 이가 구원자가 됩니다. 가장 두려움에 쫄아 있는 이가 구원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가장 쫄아 있는 구원자는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쫄지 마."
그는 사실 자기 자신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들으라고 이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그의 귀를 막아 불통이 되어 말이 잘 안들리기에, 그렇게 더욱 큰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자는 "쫄지 마."라는 이 말을, 자신이 다른 이에게 전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들을 정신차리게 하기 위해 자신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오해합니다.
구원자의 말의 대상이 되는 이, 그는 바로 피해자입니다.
구원자는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불쌍한 피해자를 반드시 찾아내어, 그 피해자의 편에 서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부당하고 사악한 권력자에게 괴롭힘당하는 피해자를 설정하여, 권력자-피해자-구원자로 성립되는 삼각구도 속에서 피해자를 조력함으로써, 구원자의 힘을 통해 피해자가 권력자에게 승리하거나, 권력자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는 현실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마치 권력자-피해자의 양자구도로 펼쳐지는 장기판에, 구원자라는 제3자가 개입하여 훈수를 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훈수의 방향성은 언제나 피해자가 이기는 일방적인 현실을 향합니다. 물론 구원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늘 부조리하게 권력자만 이겨 왔는데, 이제야 내 도움으로 피해자가 이기게 되는 현실이 뭐 어때서?"
구원자는 지금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고통에만 집착하고 있기에, 자기가 개입하고 있는 그 양자구도 속에서 실제로는 어떠한 마음이 펼쳐지고 있는지를 영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더 근본적으로 구원자는 자기가 왜 구원자가 되었는지를 도무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자가 구원자가 된 이유, 그것은 구원자가 가장 큰 피해자였기 때문입니다. 구원자는 순도 100%의 피해자에 다름아닙니다. 가장 고통받아, 고통을 가장 두려워하게 된 피해자가 바로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구원자는 사실 훈수를 둘 능력이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훈수라고 하는 것은 장기판 전체를 볼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구원자는 순도 100%의 피해자인 까닭에, 구원자에게는 피해자의 관점밖에는 없습니다. 피해자의 관점으로밖에는 보지를 못합니다.
'하나의 관점'으로만 보는 일, 이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우리가 같은 자리에 서서 어떤 꽃을 계속 보고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관점으로만 계속 보고 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바로 속박입니다. 우리가 그 꽃을 우리의 시선으로 속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가 꽃에게 속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홀렸다(haunted)."라고도 표현합니다.
집착은 홀린 것입니다. 홀리면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것처럼 자유를 잃습니다. 감옥에 갇힌 상태가 됩니다.
우리가 감옥에 갇힌 것처럼 경험되는 상태, 이것이 고통입니다. 갑갑하고, 짓누르며, 절망적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즉, 미래로 이어질 삶이 끊어진 것처럼 막막합니다. 삶을 잃은 것입니다. 이처럼 삶을 잃은 상태, 이것이 다시 한 번, 고통입니다.
곧, 집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감옥에 갇혀 삶을 잃게 되는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감옥의 고통에 집착합니다.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 같은 자리에 계속 서서 감옥만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의 관점에서 계속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곧 감옥이 됩니다.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 하는 일이 곧 감옥을 만드는 셈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역설입니다.
집착은 바로 이처럼 마음의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구원자는 누구보다도 이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는 이입니다. 그리고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누구보다도 다른 이들을 마음의 감옥에 가두는 자입니다. 자신이 그러한 줄도 모르고, 그러한 일을 합니다. 속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음의 감옥이라는 표현은, 마음이 감옥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하나의 관점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의미입니다.
관점은 입장입니다. 입장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핵심적인 특성은 통짜(wholeness)이기에, 이 상대적인 하나의 입장들로는 마음이 그 형상대로 드러날 수 없게 됩니다. 즉, 마음은 환원되고 축소됩니다. 표현 그대로, 마음이 감옥에 갇혀 일그러진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통짜로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곧, 장기판 위에서 대립하는 어느 한쪽의 입장이 마음이 아니라, 장기판 전체가 마음입니다.
이른바, 마음은 전체의 그림과 같습니다. 정말로 그림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지고, 우리가 그 마음을 경험하는 방식이 그러합니다.
아주 효과적인 예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한 표현인 꿈을 꿀 때, 우리는 자신의 꿈을 3인칭처럼 경험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맞았던 기억이 꿈에서 나왔다고 할 때, 그 꿈속에서는 우리가 맞고 있는 모습이 밖에서 보듯이 보입니다. 즉, 우리가 그 사건을 실제 경험했을 때처럼 1인칭이었다면 결코 볼 수 없었을 우리 자신의 모습이, 그 사건이 재연되는 꿈속에서는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떠한 인상적인 사건을 경험한 뒤 그 사건에 대한 경험이 우리의 안으로 들어와 마음이 될 때, 마음은 그때 그 사건을 경험한 우리 자신의 입장만이 아니라 사건과 관계된 모든 입장을 함께 갖고 들어와 마음으로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이해하는 일은 하나의 입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 마음이 만들어진 사건과 관계된 모든 입장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 모든 입장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많은 심리치료에서, 피해의 고통을 호소하는 내담자에게, 가해자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입장까지 너그럽게 이해하는 천사표가 되기를 강요하는 2차 폭력이 결코 아닙니다. 결단코 아닙니다.
그렇게 모든 입장이 확보되어야, 마음은 자신을 짓눌러서 고통스럽게 하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자신을 피해자로만 무력하게 경험하던 내담자가, 태어나 그대로 온전한 사람으로서 그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모든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된 해방의 입장에 대해 구원자는 대단히 적대적인 반동을 합니다.
구원자는 권력자, 즉 가해자의 관점을 이해하는 대신에, 그 가해자의 관점을 구원자 자신이 보는대로 왜곡시켜 받아들이도록 피해자에게 종용합니다. 물론 구원자는 가장 큰 피해자인 까닭에, 이 왜곡된 구원자의 관점은 피해자가 원래 갖고 있던 그 하나의 관점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피해자는 구원자를 반가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구원자가 제시하는 이 하나의 관점이 바로 동일한 피해자의 관점이라는 사실을, 피해자로 설정된 이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 피해자의 관점이 구원자에게 지지받아 강화되면, 피해자는 더욱더 피해자로서의 자신을 공고히 하게 되는 셈입니다. 피해자라는 관점에 계속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여성주의 운동에서, 피해자라는 표현 대신에 생존자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에는, 바로 이렇게 구원자로 인해 피해자의식이 더 고착되는 현실을 피하기 위한 깊은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나온 표현이라 더 눈물겹습니다.
그러나 구원자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피해자가 이기기만 하면 됩니다. 피해자가 이긴다는 것은, 곧 가해자가 몰락한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는, 가해자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자는 이처럼 가해자의 몰락, 곧 가해자의 죽음에만 모든 관심이 있습니다. 모든 관심으로 불타오릅니다. 늘 화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자가, 놀랍게도 피해자보다 더, 가해자의 죽음을 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구원자가 가장 두려움에 쫄아 있는 피해자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구원자는 자신을 두렵게 하는 그 대상이 제거되면, 자신이 더는 두렵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가해자의 입장을 이해함으로써 정말로 자유롭게 회복되는 길이 아니라, 무조건 가해자를 죽이는 길을 지지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구원자는 사실 피해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구원자가 무수한 피해자들에게 마치 그들의 편인 것처럼 달콤하고 신뢰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더라도, 구원자에게 피해자는 그저 도구일 뿐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대신 이루게 하는 도구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죽이고 싶은 이를 대신 증오하고 죽이게 하는 살인교사와 같습니다. 자신은 고층빌딩 위에서, 국가기관 안에서, 경찰의 보호 아래서, 지지자들 옆에서, 방송의 전파 뒤에서 안전한 지점을 확보한 채, 피해자가 목숨을 걸고 자기 대신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죽이려는데, 자기의 목숨은 걸지 않고 남의 목숨만을 거는 것입니다.
구원자가 실제로 하는 일이란 이러한 일입니다. 때문에 피해자는 구원자로 인해 더 고통받습니다. 피해에 집착하는 구원자로 인해, 즉 고통에 집착하는 구원자로 인해 더 고통받게 됩니다.
그래서 몰락이 필요한 것은 가해자가 아닙니다. 구원자가 몰락되어야 합니다. 더 큰 고통을 양산하는 구원자의 신화가 제3제국처럼 몰락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론은, 우리가 하나의 관점만을 고집하는 일을 멈추고, 마음의 모든 관점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생겨납니다.
아주 단순하게, 피해자로서 너무나 두렵기만 했던 우리가 가해자의 관점을 떠올리게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분명하게 기억하게 됩니다.
가해자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만만해 보여서 고통받게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결코 쉽지 않은 존재였기에, 그러한 우리가 두려워서 가해자는 가해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힘이 없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해자가 힘이 없기에 두려워서 가해했던 것입니다. 가해자는 우리 앞에 실은 그토록 허약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무력하게 느끼는 이가 폭력을 쓰게 된다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지극히 옳습니다.
가해자는 우리보다 우리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두렵게 경험했던 사건과, 그 사건이 만들어낸 마음의 모든 관점은, 서로 달라보이는 각각의 이야기들로 실은 하나의 두려움만을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곧, 여기에는 '하나의 마음'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통짜(wholeness)의 마음이란 곧 하나의 마음입니다.
두려워하는 피해자라고 하는 하나의 관점으로만 우리가 보고 있을 때, 우리에게는 가해자 또한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포커패를 통해서만 상대를 바라볼 때, 상대의 포커패 뒤에서 상대가 정말로 어떠한 것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모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던 '하나의 관점'에서 벗어날 때, 우리에게 공유되고 있던 '하나의 마음'이 비로소 보이게 됩니다.
피해자로서 보고 있는 하나의 관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피해자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해자의 관점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이는, 이미 그 의도 자체로 피해자에서 순식간에 벗어납니다. 그는 고통받는 피해자라고 하는 감옥에서 한순간에 탈출합니다.
이것이 진짜 구원자의 모습입니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마음의 구원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체 게바라는, 우리는 다만 스스로를 구원할 뿐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다만 자신만의 관점으로 축소된 부분적 마음이 아니라, 통짜인 '하나의 마음'임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 곧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의 이해자'가 바로 진짜 구원자입니다.
빨간 볼펜처럼 고통을 없애려 한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고통에 집착함으로써 더 큰 고통이 생겨납니다. 자신이 고통을 없애줄 수 있다고 하는, 고통에 대한 최고의 집착자인 구원자를 통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없애는 길이 아니라, 고통을 이해하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이 정말로 없어집니다.
두려움이 고통이라면,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이해해야 합니다.
두려움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두려움에 상냥해지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많이 두려웠구나."
이제 괜찮습니다.
내가 왔으니까요.
스스로를 구원하는 마음의 이해자가 왔으니까요.
이미 감옥은 없습니다. 이해받은 하나의 마음만 있습니다. 이제 안심이 됩니다. 마지막처럼, 반갑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마음을 상냥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